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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다다익선’ 꼭대기로 올라간 보존과학자들

등록 2020-07-19 19:09수정 2020-07-20 09:37

명작은 어떻게 수리하고 새 모습이 되는가?
작은 모니터들이 금속제 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린 <다다익선>의 꼭대기 부분. 언론에 처음 공개된 모습이다. 발판을 딛고 올라온 미디어보존 전담 연구원인 권인철 학예사가 모니터의 먼지 오염 상태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맨 위에 빨간빛 램프등이 붙어 있다.
작은 모니터들이 금속제 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린 <다다익선>의 꼭대기 부분. 언론에 처음 공개된 모습이다. 발판을 딛고 올라온 미디어보존 전담 연구원인 권인철 학예사가 모니터의 먼지 오염 상태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맨 위에 빨간빛 램프등이 붙어 있다.

“아찔하시죠?”

미디어아트 보존전문가 권인철 학예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장 백남준이 남긴 높이 18.5m짜리 초대형 영상탑 <다다익선>의 꼭대기 기둥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현기증을 참으며 2단 수직 사다리를 타고 조심조심 올라가 위쪽 발판 구멍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아득하게 펼쳐진 영상모니터의 원형 대열이 보인다. 높이 18m 지점. 꼭대기를 살펴보니 빨간빛 램프등이 기둥 꼭지에 붙어 있고, 8대의 ‘아트스타’ 브랜드 6인치 모니터가 기둥 본체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었다. 아래로는 석탑 상륜부처럼 한 단에 4개씩 모두 13단, 52개의 모니터가 보인다. 하지만 모니터와 전기장치 모두 한결같이 수년은 묵었을 눅눅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흉물스럽다. 권 학예사가 말했다. “매일 꼭대기에 올라와 일일이 모니터 상태를 점검하고 먼지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일입니다.”

1200여개의 비계 부재를 대고 보존 수리 작업에 들어간 &lt;다다익선&gt;의 최근 모습. 투명 천장과 마주 보는 상륜부 모습이다.
1200여개의 비계 부재를 대고 보존 수리 작업에 들어간 <다다익선>의 최근 모습. 투명 천장과 마주 보는 상륜부 모습이다.

■ 거장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되살리려는 노력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들머리 원형 공간에 1988년 설치된 이 명작은 요즘 32년 만에 최초로 보존과학 전문가들의 종합 점검을 받고 있다. 2년 전 전기 배선과 모니터 노후로 가동이 중단돼 복원 방향을 놓고 논란을 빚은 뒤 지난해 9월 미술관 쪽이 2022년 재가동을 목표로 원형 복원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지난 4월부터 비계를 놓고 가림막을 친 뒤 재활치료의 첫 단계인 진단 작업을 시작했다.

석달을 넘긴 <다다익선> 진단 현장을 찾아 이 대작의 환부를 살펴봤다. 권인철 학예사를 비롯한 보존과학 실무진은 열악한 작업 여건 속에 고투 중이다. 1~2명만 출입이 허용되는 좁은 작업 공간, 높이 올라갈수록 흔들림이 커지는 발판 구조물, 윙윙거리는 대기음까지…. 오래 발 디디고 서 있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12월 중순까지 1003개 모니터 점검과 먼지 제거 작업을 마치는 강행군을 이어가야 한다. 모니터들은 브라운관의 정전기 작용으로 유난히 먼지가 더 많이 달라붙는다. 이번주까지 모니터 60대를 점검했다는 권 학예사는 “부담감이 크다. 하지만 웅장한 작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제 모습을 찾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가슴 벅차다”고 했다.

<다다익선>뿐만이 아니다. 국립미술관에서는 병들고 아프고 상처 입은 미술 작품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복원하는 전문가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날마다 이어진다. 근현대 미술품의 보존처리와 관련해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곳이 2018년 12월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보존과학실이다. 정식 명칭은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인 이곳에서 어떻게 아픈 작품을 살피고 치료하고 처방하는지 궁금했다. 마침 ‘보존과학자 C의 하루’란 제목으로 지난 5월부터 그들의 일상과 고민을 다룬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청주관 보존처리 작업 현장을 최근 둘러봤다. 작품의 이면에 대한 관심과 열정, 차가운 과학적 분석이 어우러져 전시실과는 또 다른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곳은 전시장과는 다른 현대미술의 별세계였다.

청주관 조각실 수복 작업대 위에 놓인 최정화 작가의 조형물 &lt;플라워트리&gt;의 꽃잎 장식물들. 한 연구원이 꽃잎 하나를 들어 부서진 부위를 가리키고 있다.
청주관 조각실 수복 작업대 위에 놓인 최정화 작가의 조형물 <플라워트리>의 꽃잎 장식물들. 한 연구원이 꽃잎 하나를 들어 부서진 부위를 가리키고 있다.

청주관 보존처리실…‘진찰·투약·수술’ 병원과 똑같네

“어 이거 눈에 익은 장식품인데?” 청주관 1층 조각 처리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띈 것은 키치예술가로 유명한 최정화 작가의 명작 <꽃나무(플라워트리)>의 조각들이다. 연구사들이 손전등을 비춰 들고 테이블 위에 놓인 수십개의 울긋불긋한 꽃과 이파리 장식을 일일이 들어 올려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야외에 설치했다가 부서지거나 빛이 바랜 50여개의 꽃송이와 가지를 떼어 수리하고 다시 붙이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다.

현대미술 작품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작업에선 작가의 의도를 중시한다. 권희홍 학예연구사는 “최 작가를 만나 보존처리를 어떤 방향으로 진행하면 좋을지를 인터뷰한 문건과 보존처리 관련 동의서 등을 복원에 참고하고 있다”고 했다. 전에는 이런 식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최근엔 좀 더 정확하고 원만한 복원을 위해 생존 작가의 경우 작품 제작 의도 등을 담은 구술록을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장 뒤뷔페의 대형 조형물 &lt;집 지키는 개&gt; 옆면에 광학 현미경을 대고 균열도를 측정하고 있다. 연결된 모니터에 확대된 균열 부위가 컬러 화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장 뒤뷔페의 대형 조형물 <집 지키는 개> 옆면에 광학 현미경을 대고 균열도를 측정하고 있다. 연결된 모니터에 확대된 균열 부위가 컬러 화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좀 더 안쪽에서는 작고한 조각가 조성묵이 참나무 생가지와 동으로 뜬 발을 결합해 만든 설치조각 <무제>를 탁자 위에 놓고 김용무 연구원이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다. 작가는 작품 재질을 아까시나무로 기억했으나, 분석 결과 참나무로 드러나 어떤 방향으로 보존처리를 할지 매일 관찰 일지를 쓰며 고민한다고 털어놨다. 생나무와 금속재료를 함께 쓴 전례 없는 작품인데다 작가가 타계한 터라 아직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다른 방에서는 표면의 균열이 심해진 장 뒤뷔페의 반추상조각 <집 지키는 개>를 놓고 연구원이 청진기 격인 광학 현미경을 여기저기 들이대며 진찰 중이었다. 바로 옆 모니터에는 균열이 생생하게 확대돼 나타났다.

이병도 서예가의 글씨 작품을 놓고 작품 뒤의 묵은 배접지를 벗기는 지류실 김미나 학예사의 작업 모습. 높은 집중도와 긴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이병도 서예가의 글씨 작품을 놓고 작품 뒤의 묵은 배접지를 벗기는 지류실 김미나 학예사의 작업 모습. 높은 집중도와 긴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3층 지류실은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첨단장비는 거의 없고 연구원들이 묵언 수행하듯 70년대 서예작품 뒤쪽 종이겹을 벗기거나, 병풍화의 변색·훼손된 비단 부위를 새 소재로 보강해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징징거리는 기계음도, 직원들 간의 대화도 거의 없었다. 단지 작품 세부에 레이저를 쏘듯 강렬한 눈길을 쏟으며 일하는 모습뿐이었다. 서예 글씨를 수복하던 김미나 연구사는 “흥미 있는 볼거리가 있다”며 갑자기 작은 옹기 단지를 가져왔다. 밀가루를 물에 풀어 발효시킨 것으로 검은 곰팡이가 둥둥 떠 있었다. 시큼한 술 냄새가 나는 이 액체는 비단이나 종이를 잘 배접해 붙이기 위한 천연 밀가루풀 원액이었다. 이렇게 밀가루 액을 배양한 뒤 곰팡이를 걷어내고 맑은 액만 떠내 말린 가루를 풀의 재료로 쓴다는 설명이었다.

지류실에서 옹기 안에 배양 중인 밀가루풀 발효액. 밀가루를 물에 풀어 숙성시킨 것으로 거뭇거뭇한 빛깔의 곰팡이가 보인다. 이 곰팡이 층을 걷어내고 아래 맑은 용액을 건조해 나오는 흰 가루를 접착제로 쓴다.
지류실에서 옹기 안에 배양 중인 밀가루풀 발효액. 밀가루를 물에 풀어 숙성시킨 것으로 거뭇거뭇한 빛깔의 곰팡이가 보인다. 이 곰팡이 층을 걷어내고 아래 맑은 용액을 건조해 나오는 흰 가루를 접착제로 쓴다.

그 옆 유화실에서는 모래와 흙을 물감과 섞어 그림을 그렸던 작고 화가 최영림의 갈라진 그림을 두고 보강재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무기물 분석실에서는 구본웅 등 근대기 주요 작가들의 물감 안료의 성분을 분석해 그들이 썼던 물감의 특징을 족보처럼 분석하는 작업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연구원들의 작업 풍경은 전시에는 드러나지 않는 작품 재료와 제작 과정, 그 속에서 작가의 개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흥취를 전해줬다. 근대기 작품의 보존수복에 얽힌 비화나 수리 방식을 놓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보존과학자의 애로를 드러낸 5층 기획전 ‘보존과학자 C의 하루’에서도 작품에 새로운 시간과 이야기를 쌓아가는 이들의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최영림 작가의 그림에 분광분석기를 대고 물감층 성분을 탐색하는 재료분석실 작업 모습.
최영림 작가의 그림에 분광분석기를 대고 물감층 성분을 탐색하는 재료분석실 작업 모습.

밀려드는 복원 필요 작품들…인프라는 여전히 허약

최근 들어 보존과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긴 하지만, 현재 국공립 기관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 등 인프라는 여전히 취약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1970년대에 보존과학 관련 전문연구원이 등장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엔 1980년 ‘양화 수복실’이란 이름으로 시작해 2018년 국내 최대 규모의 보존수복 전문시설인 청주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재료, 기법, 양식 복원 등에서 일정한 전범이 있고 상당한 복원사를 지닌 고미술이나 문화재 분야와 달리 근현대 미술 쪽은 훨씬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하는 상황임에도 관련 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국립미술관은 30명 선이고, 대전시립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에 각 1명씩이 전부다. 사설 미술관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10여명 정도가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립미술관은 전국 각지 공립미술관의 작품 수복 보존업무와 교육까지 맡느라 작업 피로도가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지난달 23일 청주관 보존과학실을 돌아본 뒤 만난 전문가들은 예산 증액뿐 아니라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유기물·무기물 재료 분야, 미디어아트 분야 등의 전담 인력을 크게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임상진 연구관은 “훼손된 작품이 고투 끝에 전시 가능한 상태로 회복돼 선보일 때가 가장 기쁘다.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여건이 좀 더 무르익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청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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