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간송미술관 소장품. 8월12일부터 9월3일까지
18세기 활동한 그림거장 심사정과 그의 제자로 19세기 화원화가로 활약한 이인문이 각각 그린 두루마리 그림 대작 <촉잔도권>(오른쪽)과 <강산무진도>가 사상처음 한 자리에서 나란히 진열장에 놓인 채 관객을 맞고있다. 전시장 벽면에는 <강산무진도>를 크게 확대한 디지털 풍경 이미지들이 붙어 감상의 맛을 배가시킨다. 노형석 기자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전시장인가?
진열장 주위로 온갖 새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낭랑하게 들린다. 눈앞에 보이는 삼면 벽은 이상향의 풍경으로 뒤덮여 있다. 절벽과 고개가 물결치는 웅장한 산세의 흐름 속에 사람 사는 마을이 어우러진 아늑한 낙원의 이미지들이다.
22일부터 다시 문을 여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전시실에서 한국·중국의 옛 선비들이 꿈꾸던 무릉도원 그림들을 정말 무릉도원의 분위기에 휩싸인 듯 만나게 된다. 한국 전통미술의 역사에서 길이가 가장 긴 그림이자 선비들의 낙원을 그린 대표작들로 유명한 두 점의 두루마리 그림이 나란히 특제 진열장 안에 놓였다. 조선 후기 18~19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인 현재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권>과 그의 제자 격인 화원화가 고송유수관 이인문의 대작 <강산무진도>다. <촉잔도권>과 <강산무진도>의 가로 길이는 각각 8.18m와 8.56m다. <강산무진도>가 조금 더 길지만, 회화사학자들과 애호가들은 스승·제자 사이인 두 사람의 두 대작이 사상 처음 극적으로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데 흥분한다. 실제로 <강산무진도>는 중국 중원에서 오늘날 쓰촨 지방인 촉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그린 스승 심사정의 <촉잔도권>을 보고 이인문이 기본 모티브를 잡아 그렸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해왔다. 하지만, 인적 드문 중국 관념산수화 구도의 <촉잔도권>과 달리 300명 넘는 숱한 인간 군상들이 암봉 사이 계곡 마을과 강변 포구 등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세속적 풍경을 농익은 필치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개성의 차이도 보여준다. 두 대작들의 공간은 문화재청과 박물관의 공동기획 행사인 ‘새 보물 납시었네―신(新)국보보물전 2017~2019’(9월27일까지)의 일부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새로 지정된 국보와 보물 157건 가운데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 등을 뺀 83건 196점을 대중 앞에 내보이는 큰 기획전이다. 국보와 보물 공개 전시로는 사상 최대 규모라고 두 기관은 밝혔다. 유물을 빌려준 기관과 개인, 사찰 등의 소장처만 34곳이다.
김득신의 풍속도 <야묘도추>.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의 모습과 놀라 쫓아가는 어미 닭과 집주인의 몸짓을 잘 포착했다.
전시장은 1부 ‘역사를 지키다’, 2부 ‘예술을 펼치다’, 3부 ‘염원을 담다’로 나뉘어 꾸려진다.
관심이 쏠리는 건 역시 2부의 선조들 미의식을 담은 예술유산들이다. 미술사 명가인 간송미술관의 컬렉션 명품 22점이 국가 보물 지정을 맞아 한꺼번에 대여 전시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특히 <강산무진도>와 짝을 이룬 간송 소장 <촉잔도권>의 국립중앙박물관 출품(실물은 8월 11일까지 전시하고 이후 영인본 전시)은 1972년 ‘한국회화’전 이래 48년만이어서 공동전시의 의미는 더욱 커졌다. 전시기간 3주 간격으로 교체되면서 선보일 간송의 다른 명작들도 쟁쟁하다. 말 타고 길을 가다가 버드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꾀꼬리를 보고 심란한 눈길을 보내는 선비 모습을 담은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과 이 땅 산하의 풍경을 조선 고유 화법으로 그리는 ‘진경산수화’ 대가 정선의 <풍악내산총람도>가 다음달 11일까지 먼저 선보인다. 뒤이어 18세기 앳된 조선 여인의 미묘한 자태를 그려 ‘조선의 모나리자’ 별명이 붙은 혜원 신윤복의 대표작 <미인도>가 다음달 12일부터 9월3일까지 내걸린다. 조선 후기 선조들의 소탈한 일상을 보여주는 김득신의 <풍속도 화첩>, 대학자이자 문인화가 추사 김정희의 난 그림모음인 <난맹첩>, 두물머리 등 한강변 풍경을 담은 겸재의 <경교명승첩>은 첩 속의 그림들을 번갈아가며 선보이게 된다.
도자기 명품으로는 고려 초기 청자 양상을 보여주는 성종시대의 ‘순화4년(993)’명 항아리(국보, 이화여대 소장)와 고려 상형청자의 정수인 투각연당초문 붓꽂이(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시선을 끌 것으로 보인다. 1부 ‘역사를 지키다’는 다양한 기록 유산들을 선보인다. 옥산서원 소장본 <삼국사기>와 연세대 소장본 <삼국유사>를 비롯해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등이 나왔다. 3부 ‘염원을 담다’는 국내 지정된 국보·보물의 절반이 넘는 불교 문화재의 위상을 살펴보는 자리다. 부처와 고승의 사리를 담는 용기인 사리기와 사리기를 넣는 사리감이 각종 공양품과 함께 탑에 봉안됐던 6세기 백제시대의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소장)와 7세기 익산 미륵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역시 처음 한자리에 나란히 놓여 관객을 맞는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 유물들로 백제 공예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명품들이다. 통일신라말~고려초기의 불교예술품으로는 2008년 경북 군위 인각사터에서 출토된 청동북과 청자정병, 향합들이 단연 주목된다. <묘법연화경 목판>(보물, 개심사 소장),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 권상>(국보, 개인 소장) 등의 불교 경전과 서적에서는 한반도 불교 기록문화의 유구한 면면들을 살펴볼 수 있다.
국보로 지정된 충남 부여 왕흥사터 출토 백제시대 사리장엄구. 문화재청 제공
박물관 쪽은 온라인 예약제를 도입해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2시간 단위로 관람 인원을 200명으로 제한할 방침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