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집 앨범을 발표한 민중가수 손병휘. 이흥렬 제공
어둠이 내리자, 광장에 몸을 누였다. ‘이번엔 군대를 투입하면 어떡하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경찰이 앞서 친 텐트를 부수고, 사람들을 해산시킨 뒤였다. 예술가들은 그 자리에 1인용 텐트 몇 동을 다시 펼쳤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귀는 광장의 끝쪽으로 한없이 열려 있었다. ‘공권력’이라고 불리는 우월한 무언가가 느닷없이 들이닥칠 것만 같아서였다. 늦가을의 새벽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나흘이 지났을 때였다. 광장에 모여든 시민을 보고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민이 저마다의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언론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100만 촛불의 함성’ ‘19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 집회’라고 앞다퉈 보도했다. 2016년 11월12일의 일이었다. 시민의 힘을 확인한 그는 이듬해 3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할 때까지 넉달 동안 광화문광장에 마련한 텐트를 지키며 노래했다. “이게 바로 혁명이구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거죠.” ‘거리의 가수’ 손병휘가 말했다.
2016년 11월부터 넉달 동안 서울 광화문광장을 지키며 노래한 민중가수 손병휘. 노순택 제공
그가 5년 만에 내놓은 8집 앨범 <아르(R!)>에는 ‘촛불 혁명’의 열정과 감정이 짙게 배어 있다. 앨범은 탄핵 국면 당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행동위원회 소속 예술가들과 넉달 동안 광장에서 경험한 기적 같은 시간이 바탕이 됐다.
그는 지난 세월 민주, 민중, 평등, 평화, 투쟁, 혁명 등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노랫말에 쓰는 것을 피해왔다고 했다. “(집회) 현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평소에도 들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2017년 대통령 탄핵 뒤 광장에서 철수하면서 이제는 그런 단어를 써서 곡을 만들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노래로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음률은 잠깐 입속에서만 맴돈 뒤, 이내 흩어져버렸다. 고민하던 차에 한 선배 가수의 말이 생각났다. “예술은 마음이 가난해야 나오는 거야.” 돌이켜보니 그랬다.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 살아오며 정신적으로 이것저것 가진 것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났다.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노래가 나올 것 같았어요. 일종의 환기가 필요했던 거죠.” 이탈리아, 타이, 제주도를 여행하며 곡을 썼다. 그렇게 1년여의 세월이 지났을 때, 스무곡이 완성돼 있었다.
이번 앨범에서 손병휘는 인디밴드 1세대인 허클베리핀과 처음으로 협업했다. 밴드 멤버인 이기용이 던진 말이 계기가 됐다. “형 음반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 이에 손병휘는 자신이 만든 스무곡을 꺼냈고, 이기용은 이 가운데 앨범에 넣을 만한 9곡을 추렸다. ‘R!’ ‘일기를 쓰는 것처럼’ ‘평화–봄 나비’ ‘붉은 섬’ ‘자유’ ‘다시 통일이야’ ‘20+’ ‘하도리에서’ ‘마지막 전사에게’였다.
8집 앨범을 발표한 민중가수 손병휘. 이동호 제공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곡은 ‘R!’이다. “서툰 말 한마디 주저하며 내민 손/ 불안한 눈빛, 여린 불빛, 그것으로 그곳으로부터// 혁명”은 시작되고 이뤄졌다는 내용의 노래다. 가사뿐 아니라 음역 전개, 소리 구성으로도 혁명의 과정을 표현했다. “촛불 하나가 번져 백만이 되고 시대를 바꾸는 물결이 되듯이, 악기 소리도 단출한 북소리 하나로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여러 악기가 더해져 두터워져요. 목소리도 저음에서 시작해 계단식 전개를 거쳐 고음에 이르죠.”
그는 ‘평화–봄 나비’와 ‘다시 통일이야’로 지금의 남북관계를 안타까워하고, ‘마지막 전사에게’를 통해서는 진보운동을 했던 옛 동지들에게 시대와 함께 가는 운동을 하자고 말을 건다. ‘하도리에서’는 이 앨범의 유일한 사랑 노래다.
1993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에서 노래를 시작한 손병휘는 이듬해 포크그룹 ‘노래마을’을 거쳐 1999년부터 솔로로 활동했다. 그동안 ‘촛불’이 있는 곳에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해오며 ‘거리의 가수’ ‘촛불 가수’ ‘시민 가수’란 수식어를 얻었다.
그는 “어쩌면 이번 8집이 마지막 음반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투쟁이 살아 있는 한 민중가요는 영원하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시대적 흐름이란 게 있어요.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보이는 게 민중가수고 민중가요인데,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저 역시 조용히 사라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죠.” 시대를 노래한 27년차 민중가수가 말을 마칠 때, 창밖에선 한여름의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김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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