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의 동영상 작품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의 한 부분.
큰 화면 위로 건물 내부 여기저기에서 공사 일을 하는 인부들의 작업 동영상이 흐른다. 배선을 치고 용접해서 철제 부착물을 붙이거나 자르고, 벽에 구멍을 뚫는 등 거칠고 어수선한 공정이 긴박한 드럼 연타음의 리듬 속에 펼쳐진다. 동영상 아래와 옆엔 중계방송 자막처럼 문자 띠가 나타난다. 삶과 죽음, 절망 따위에 대한 연극 대사 같은 글귀들이 명멸한다. 인부가 허리를 구부리고 특수 절단기기로 큰 합판을 한 번에 자르는 영상 밑에 ‘그리고 네 안에 남은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질 때/이제 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아…’란 자막이 나오는 식이다.
인테리어 업체의 현장 소장으로도 일하는 김주원 작가의 동영상 근작은 괴이한 인상으로 우선 와닿지만, 볼수록 영상 속 흐름을 주시하게 하는 묘한 흡입력을 지녔다. 지금 서울 종로5가 두산갤러리에 차려진 그의 개인전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에서 이런 근작들을 만나게 된다. 김 작가는 서울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찍은 공사 작업 장면들과 안양, 홍콩 등지에서 겪은 일상의 여러 순간들을 기록해 4시간짜리 영상물로 편집했다. 인부들의 머릿 부분을 지글거리는 듯한 이미지의 휘갈긴 선 뭉치로 가리고 그들이 몸 놀려 일하는 광경을 영상에 담고, 그 중 강조하고 싶은 물건들(오브제)은 별도로 사진을 찍어 클로즈업한다. 군에 입영해 전방 초소에서 통신병으로 생활할 당시에 핵폭발, 전쟁과 죽음, 등을 떠올리며 썼던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 영상작업을 다듬었다. 공사현장의 가공된 동영상 아래에 마치 뉴스 방송의 토막뉴스처럼 문장들이 흘러가는 영상 띠를 두르고 측면에는 배경 음악으로 나온 얼터너티브 밴드의 노래 제목을 넣는 등 요즘 영상세대의 감성을 반영한 화면 연출이 기발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공부한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진들을 소재로 음악과 텍스트를 엮어 새롭게 의미를 파생시키는 작품들을 내보여왔다. 지난해 10회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5년 만에 차린 개인전이다. 21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두산갤러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