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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김기창의 부인’ 박래현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다

등록 2020-10-18 15:54수정 2020-10-19 09:39

[덕수궁미술관 우향 박래현 회고전]
박래현 작 <잊혀진 역사 중에서>(1963). 작가가 본격적인 추상 작업을 시작했음을 화단에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개인 소장
박래현 작 <잊혀진 역사 중에서>(1963). 작가가 본격적인 추상 작업을 시작했음을 화단에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개인 소장
“내 아내의 그림은 엽전과 맷방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것이라오.”

1966년 한국 화단의 유명한 부부 작가였던 김기창·박래현의 부부전이 열렸을 때다. 기존 화풍과는 완전히 다른 추상 그림을 선보인 부인의 신작에 대해 “정체가 뭐냐”고 기자가 물었다. 언어장애가 있던 운보 김기창(1913~2001)이 종이에 필담으로 써준 ‘해설’은 부인인 우향 박래현(1920~1975)의 뛰어난 추상 그림을 50여년간 옭아맨 굴레가 됐다.

주름을 잡은 듯한 노란 띠의 형상이 붉은빛, 검은빛을 머금고 흰 화폭을 흘러가는 독창적인 그의 추상 그림을 이후 화단과 미술 시장에서는 ‘맷방석’ 시리즈, ‘엽전’ 시리즈라 일컬었다. 빛나는 예술적 성취인 띠 모양의 추상 작품이 한국적 풍물을 본떠 그린 세속적 그림으로 폄하당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에서 지난 추석 연휴 직전 개막한 우향 박래현의 회고전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은 지금껏 운보에게 가려 있던 우현의 예술세계에 대한 편견을 확실하게 씻어내린 전시다. ‘삼중통역자’는 젊은 시절 일본 유학을 하면서 전통 채색 화가로 화업을 시작해 해방 뒤 남편 운보를 구화로 소통하며 열성적으로 뒷바라지했고, 말년엔 미국 유학 생활을 하며 영어와 한국어를 넘나들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생전 스스로 명명한 말이다. 기획자 김예진 학예사는 삼중통역자의 삶을 살았던 우현의 삶을 회화, 태피스트리(직물공예), 판화라는 세 장르로 의미를 확장해 탐구했다.

일본 유학 시절 박래현의 수작인 <단장>. 단단하고 말끔한 인물과 정물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수상했다. 개인 소장
일본 유학 시절 박래현의 수작인 <단장>. 단단하고 말끔한 인물과 정물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수상했다. 개인 소장
전시는 초창기부터 말년까지 그의 작업세계를 4부에 걸쳐 연대기식으로 풀되, 시기별 예술세계의 특징을 한국화의 현대, 여성과 생활, 세계여행과 추상, 판화와 기술로 요약해 잘 알려지지 않은 박래현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특히 개인 소장가들한테서 어렵게 입수해 관객 앞에 새롭게 내놓은 그의 초창기와 추상 시작기의 숨겨진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1부 들머리에 등장하는 1943년 작 <단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뚫어지게 붉은 화장대 거울을 응시하는 소녀의 모습을 단순한 구도에 단단하고 매끄러운 묘사로 잡아냈다. 오직 검은색과 붉은색, 흰색을 강렬하게 대비시켜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화장솔이나 소녀의 팔꿈치 레이스 묘사 등 세부까지 놓치지 않아 박래현이 초창기에 이미 탄탄한 기본기를 구축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운보와 결혼한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생활을 하면서 서구의 입체주의에 쏠려 작업한 1956년 작 <이른 아침> <노점> 등은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전시의 대표작이다. 기획자는 그 전후 정물화와 50년대 말 이어진 여인 군상, 부엉이 등의 반추상 연작을 통해 그의 작업이 60년대 추상 세계로 나가게 된 바탕을 명확하게 일러준다.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3부 추상 부분이다. 1962년 서구의 앵포르멜 감성 추상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잊혀진 역사 중에서> 연작과 <젊음의 초연> <해벽> 등의 작품이 줄줄이 등장하는 3부의 도입부는 단연 최고다. 노랑, 갈색, 붉은색, 청색 등의 안료가 우아한 색감의 덩어리로 화면에 번져가는 황홀한 감흥을 선사한다. 작가가 64년부터 시작한 미국과 중남미 여행을 계기로 직물공예인 태피스트리와 특유의 노란 띠 추상 작업에 매진하고, 그 뒤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판화에 진력하기 때문에 3부의 60년대 초 작품들은 짧은 기간 가장 강렬하게 빛났던 박래현 추상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돌아온 박래현의 말년작인 <어항>(1974-75). 개인 소장
미국에서 돌아온 박래현의 말년작인 <어항>(1974-75). 개인 소장
말년기 추상 작업을 다룬 4부도 감상의 재미가 쏠쏠하다. 애쿼틴트 등의 동판화 기법을 집중적으로 수련한 1969~1974년 미국 공방 작품들은 운보를 능가하는 우향의 국제성과 유연성을 실감하게 한다. 동판을 잘라 사물이나 역사적 이미지를 채워 넣거나 신문기사 또는 보도사진 등을 집어넣고, 하수구 마개 오브제까지 들어가는 팝아트 작업까지 섭렵한 작가의 폭넓은 작업 영역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말미에는 서구 판화 기법을 전통화 기법과 접합해 화선지에 그린 모호한 어항, 연화 등의 이미지를 두꺼운 장판지 위에 붙이는 전위적 기법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한국화의 대표 작가 운보 김기창의 내조자로만 알려졌던 우향 박래현의 초창기부터 말기까지의 작품을 모두 망라해 세심하게 분석하면서 역사와 생명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특유의 추상 세계를 구축했음을 드러낸다. 내년 1월3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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