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6집 앨범 <트레이스>를 발표한 이적. 그의 정규앨범은 2013 <고독의 의미> 이후 7년 만이다. 뮤직팜 제공
25년 전 이적과 김진표가 ‘패닉’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을 때, 가슴속 응어리진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이가 많다. ‘왼손잡이’라는 노래 때문이다. 왼손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금기시됐다. 밥을 먹을 때 왼손을 쓰면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학교에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심지어 체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세상은 온통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디자인돼 있다. 지하철역 개찰구 교통카드 단말기도, 카메라 셔터와 대부분의 변기 물 내림 레버도 오른쪽에 있고, 의자와 일체형인 대학 강의실 책상도 오른쪽 팔걸이만 있다는 사실을 오른손잡이는 자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왼손잡이들은 그 불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라는 ‘왼손잡이’의 노랫말은 시원했다. 다만, 수많은 왼손잡이의 생각과 달리, 이 곡은 순전히 그들만을 위한 노래가 아니었다. 이적은 억압받는 성소수자의 삶을 비주류의 상징인 왼손잡이에 빗대 노래했다. 이적은 과거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이 노래에 대해 “‘우릴 왼손잡이 정도로 봐주면 안 되냐’는 성소수자의 말을 듣고 만들게 됐다. 소수자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가수 이적이 ‘왼손잡이’ 이후 25년 만에 ‘다름’과 ‘연대’에 대한 노래를 들고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11일 발표한 정규 6집 앨범 <트레이스>를 통해서다. 그의 정규앨범은 2013년 <고독의 의미> 이후 7년 만이다.
타이틀곡 ‘돌팔매’는 ‘왼손잡이’의 25년 후 이야기 같은 노래다. 이적은 이 곡에 다양성과 연대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선명하게 녹였다. 이 노래는 나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린 제각기 다르지/ 모두 닮은 존재라면 외려 이상하지/ 우린 같을 수 없지// 우린 완전히 남이지/ 서로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지.”
그러면서도 “누군가 너를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괴롭힌다면/ 그땐 우린 또 하나지/ 돌팔맬 그저 모른 척할 수는 없지/ 겟업 같이 안고 일어나/ 흙을 털어 내 우린 서로들의 편이야”라고 연대의 손을 내민다. 이런 생각은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명언과도 맥이 닿아 있다. 특히 이 곡엔 이적과 함께 ‘패닉’으로 활동한 김진표가 피처링에 참여했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것은 2005년 패닉의 앨범 <패닉 04> 이후 15년 만이다.
정규 6집 앨범 <트레이스>를 발표한 이적. 그의 정규앨범은 2013년 <고독의 의미> 이후 7년 만이다. 뮤직팜 제공
새 앨범에는 모두 12곡이 담겼다. 9곡이 새 노래고, 앞서 발표한 ‘나침반’ ‘숫자’를 비롯해 코로나 시대 위로곡인 ‘당연한 것들’이 함께 수록됐다. 농담처럼 뱉은 말이 실현된 곡도 있다. 1번 트랙인 ‘물’은 이적이 콘서트에서 물을 마실 때마다 팬들이 환호성을 보내자 “이렇게 좋아하시니 언젠가 ‘물’이란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 소품과도 같은 ‘한강에서’, 레게 리듬에 기반을 둔 ‘민들레, 민들레’, 유예된 희망에 대한 탄식이 배어나는 ‘준비’ 등의 곡도 눈길을 끈다.
이적은 7년 만의 정규앨범에 대해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11일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긴 시간 공들여 만든 앨범이 세상에 나오는 건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일”이라며 “열두 곡의 노래에 시간을 내어 귀 기울여주실 여러분이 제가 음악하는 이유입니다. 노래가 여러분께 아름답게 닿길 (바란다)”이라고 밝혔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