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새 앨범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를 낸 가수 정미조. 제이엔에이치(JNH) 제공
‘바람’ 같은 날들이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랬다.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예술의 자유엔 경계가 없었다. 음악과 미술을 오가며 바람 같은 날을 살다 보니, 어느덧 일흔한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노년의 시간은 적막했다. 그 적막 속에서 아득히 흩어진 세월을 반추하는 일은 아주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설렘보다 회한이 많은 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녜요. 물론 회한은 있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니 뉘우치고 한탄하기보다는 삶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지난 18일 만난 가수 정미조가 말했다.
그가 최근 발표한 새 앨범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는 시간과 유한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정미조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그 시간을 연민으로 쓰다듬으며 노래한다. 삶의 근원적 슬픔을 마주하고 마음의 무늬를 풀어놓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깊고 단단하다.
가수 정미조의 새 앨범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 앨범 사진. 제이엔에이치(JNH) 제공
정미조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20대에 벼락처럼 스타가 됐다. 1972년 2월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자마자 가수로 데뷔하면서다.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축제 오프닝 무대에서 노래했다가 초대 가수였던 패티김에게 ‘내 무대에 초대할 테니 게스트로 노래를 불러달라’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가창력이 남달랐다. 데뷔 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사랑의 계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 인기 가수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데뷔 뒤 7년 만인 1979년 그는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자신이 전공한 미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외로웠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는 그림과 공부에만 몰두했다. 홀로 고독과 맞서다 보니, 우울한 마음이 몇달씩 이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파리에서는 수도승과도 같았어요.”
그가 복귀를 알린 것은 파리로 떠난 지 37년 뒤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교수로 일해오다가, 2016년 <37년>이란 앨범을 냈다. 이듬해엔 후속작 <젊은 날의 영혼>을 발표하며 복귀가 ‘반짝 이벤트’가 아님을 증명했다. 컴백 뒤 세번째 작품인 이번 앨범은 아름다운 ‘어른’의 이야기로 모두 12곡이 담겼다.
앨범의 주제가 ‘시간’인 만큼 첫 트랙 ‘습관처럼’은 시계태엽을 감고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세상의 시간을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습관처럼 오늘 가고 오늘 같은 내일 오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네/ 동화 같은 삶은 없어 잠시 웃고 잠시 우는/ 아주 작은 얘기들이 세상의 전부.”
이어지는 더블 타이틀곡 ‘석별’과 ‘눈사람’은 모두 ‘이별’에 대한 노래다. 하지만 두 곡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석별’이 이별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를 축복하는 감정을 담은 곡이라면, ‘눈사람’은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하는 곡이다.
“슬픈 노래들이죠. ‘석별’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그댈 보는 내 맘 부족함이 없으니/ 오늘 우리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에 마음의 부족함이 없다는 대목이 뭉클하고 찡했어요. ‘눈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경우가 있잖아요. 팔과 다리가 없는 눈사람처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감정을 다스리며 노래하기가 참 쉽지 않았어요.”
최근 새 앨범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를 낸 가수 정미조. 제이엔에이치(JNH) 제공
자유로운 예술가로 살아온 정미조의 인생을 압축해서 담은 곡도 있다. 앨범과 같은 이름의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다. 6분 길이로 감정과 멜로디의 진폭이 큰 곡이다. 특히 이 노래 절정 부분의 노랫말은 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처럼 들린다. “저 바람같이 자유로운 날을 살다/ 어느 날 문득 바람같이 떠나가게/ 나 바라는 것 없이 남기고 갈 것도 없이/ 어떤 후회도 미련 하나 없이/ 내가 떠나는 그날에 내가 두렵지 않도록/ 오직 자유로움만이 내 마지막 꿈이 되길.”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고 했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는 이주엽 제이엔에이치(JNH) 대표다. 그는 “미국의 가수 겸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처럼 선생님(정미조)의 ‘마이웨이’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는 그런 목표로 만든 곡”이라고 설명했다.
초침이 째깍거리며 시작된 노래는 마지막 트랙곡인 ‘순환’에 이르러 태엽이 다 풀어지며 끝을 알린다. 하지만 이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노래는 유한한 삶이 아닌, 제목처럼 시간의 회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게 마지막 앨범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앨범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미조의 말이다. 노래처럼 바람 같은 날을 산 그의 시간과 삶의 이야기는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