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6촌 동생’ 김현경씨·‘외동딸’ 김세원씨
지난 1일 오후 서울 성북구 동소문로에 있는 아담한 한옥 마당에서 고 김수영(1921~1968)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가 방송인 김세원씨에게 옛 기억을 들려주었다. 세원씨는 지난 88년 해금된 ‘조선의 천재 작곡가’ 김순남(1917~미상)의 외동딸이고 올해 우리 나이로 94살인 김현경씨는 작곡가의 6촌 동생이니 둘은 ‘고모 조카 사이’다.
“저기 마루 왼쪽 안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순남 오빠가 자작 가곡 ‘산유화’를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데 너무 좋아 나도 따라 불렀어. 오빠는 한국의 베토벤이었지만 노래도 참 잘했단다. 피아노 옆에는 피카소가 데생한 ‘신부’ 그림 프린트도 있었어. 오빠가 그림도 잘 그렸지. 이 집에 시인 임화나 오장환, 소설가 김남천 등이 자주 드나들며 저 건넌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순남 오빠는 미술이나 연극, 소설이나 시 등 여러 방면에서 워낙 박식하고 씨(알맹이) 있는 이야기를 정말 재밌게 해서 오빠 말을 김남천이나 오장환 등 문인들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어. 임화는 부인 지하련과 같이 왔지. 다들 미남이었는데 특히 임화가 제일이었어. (김수영) 시인은 딱 한 번 이 집에 왔는데 오빠가 시인을 ‘회색분자’라고 해서 발길을 끊었단다. 시인은 사회주의자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거든.”
김현경씨가 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시인이었던 남편 김수영과 사별한 지도 올해로 52년이다. 하지만 그의 컴퓨터 같은 기억은 나이를 잊은 듯했다.
“해방 뒤에 피아니스트 윤기선씨 등 연주자들이 이 집을 찾아 오빠에게 피아노 레슨도 받았어요. 오빠는 작곡만 한 게 아니라 연주자들에게 호흡하는 방식을 포함해 연주 기법도 가르쳤죠. 열 살 위인 오빠가 나를 굉장히 예뻐했어요. 내가 수필이나 시를 써서 오빠에게 보여주면 임화 김남천에게도 보여주고 오빠 친구들이 다들 칭찬해주었죠. 오빠가 ‘김씨 집안에 너와 나밖에 없다’고 농도 했죠.”
그는 2년 전 맹문재 시인 등과 한 답사기행에서 대지가 22평 정도인 이 한옥이 김순남이 1944년 결혼해서 4년 뒤 월북할 때까지 살던 집이라고 기억을 되살렸다. 김순남 생가인 서울 화동 집에 아트선재미술관이 들어섰고 결혼 전에 살던 관훈동 집도 헐렸으니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한옥은 작곡가가 남한에서 산 유일한 집이다. “오빠 신혼집이 돈암초 앞 기와집이었는데 지금 집처럼 한옥이 서너채 모여있고 옆에 경사진 골목이 있었죠. 그때 우리 집은 여기서 300m 정도 떨어졌어요. 돈암교에서 전차를 내려 오빠 집 방향으로 걸어 집에 가곤 했어요. 50년에 김 시인과 결혼한 뒤에도 돈암동에서 살아 이 지역 지리는 지금도 생생해요.”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이자 작곡가 백남준(1932~2006)은 김순남의 천재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작곡가는 한 나라에서 백 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데, 우리는 김순남이 나오려다 말았다.’ 김순남은 한국 최초로 피아노협주곡을 썼고 그가 임화의 시로 만든 노래 ‘인민항쟁가’는 북한에서 한동안 애국가처럼 불렸다.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뒤 명동에서 술만 취하면 ‘인민항쟁가’를 불러 고은 시인이 입을 틀어막기도 했죠.”(김현경) 김순남이 김소월과 오장환 등의 시로 만든 가곡 <산유화> <진달래꽃> <상렬> 등은 48년 월북 전까지 남한에서 민족 정서가 깃든 대중 가곡의 표본으로 평가받았다. 북에 가서는 50년대 초에 숙청당해 조선소 주물노동자 등으로 일하다 64년에 복권됐지만, 뚜렷한 음악 활동 기회를 얻지 못하고 8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수영 시인 부인 현경씨 2년 전 ‘확인’
“신혼부터 월북까지 살던 돈암동 한옥”
“오빠 반주에 ‘산유화’ 따라 부르기도”
“김수영 시인 두고 ‘회색분자’ 비판도” 1945년생 유일한 혈육 ‘방송인’ 세원씨
“아버지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 희망” 김순남은 결혼 이듬해인 1945년에 딸 세원을 얻었다. 딸은 부친이 88년 남한에서 해금되고 사라진 아버지의 음악을 찾아 중국만 13차례나 찾았단다. 95년에는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란 책도 냈다. “고모와는 93년부터 알고 지냈어요. 해금 전까지는 김순남이란 이름조차 꺼낼 수 없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고모와 제가 70년대에 동부이촌동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줄에 살았더라고요.” 시인의 아내는 순남 오빠를 베토벤과 소월의 시를 사랑한 ‘절대 자유인’으로 기억했다. “오빠는 베토벤을 제일 존경했어요. 베토벤 이야기를 하면서 ‘더 아름다우려면 법칙을 따라선 안 된다’는 말을 노상 귀에 박히도록 했어요. 위대한 작품은 법칙을 무시할 때 나온다고요. 오빠도 작곡에서 법칙을 파괴하려고 했죠. 제가 일본 암파서점에서 나온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사서 오빠에게 주기도 했죠. 그 책을 보더니 오빠가 베토벤 이야기라고 반가워했죠. 오빠는 북에 가기 전에 김일성 찬가 작곡 요청을 받았는데도 응하지 않았어요. 개인숭배라면서요. 오빠는 시인 중에서도 김소월 시를 제일 높이 쳤어요. 최고 시인은 김소월이라고 했죠.” 고모의 말에 세원씨가 받았다.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음악이라고 하셨대요. 새 우는 소리나 나무 흔들리는 소리도 다 음악이라고요.”
김씨는 한국전쟁 발발 다음 달인 1950년 7월에 관훈동 작곡가의 모친댁에서 김순남을 봤던 기억도 있다. 남편 김수영 시인이 인민군 치하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때였다. “김(수영) 시인 살길이 없나 의논하러 갔는데, 오빠가 굉장히 침울하고 무슨 말이 없었어요. 오빠 모친께서 아들이 대단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해선지 생선과 장조림에 진수성찬으로 독상을 차려놓았더군요. 그때 오빠가 저한테 밥은 먹었냐고 해요. 전쟁통에 먹을 게 없어 배가 많이 고팠지만 자존심에 먹고 왔다고 했죠.” 그는 “오빠가 월북할 때 중앙대 다니던 한 여학생이 북한으로 모시고 갔다”며 그 여학생을 직접 만난 기억도 있다고 했다. “오빠가 결혼한 뒤에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 윤치호 가의 한 여학생이 오빠 신혼집을 찾아오기도 했어요. 오빠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영화음악도 만들어 서랍에 돈을 쌓아놓고 살았다고 해요. 그러니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있었죠.”
그는 8일 미국 출국을 앞두고 있다. 손녀딸이 있는 미국 댈러스에서 매년 두 달 정도 머문단다. 2년 전 허리 질환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단다. 김수영 시인은 오빠의 음악에 대해 뭐라고 했냐고 하자 그는 “시인은 음악에는 문외한이었다. 내가 시인을 한두 번 클래식 음악 트는 다방에 데리고 갔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일제 시대에 중석 광산을 해서 우리 집 형편이 좋았어요. 제 방에 고가의 매킨토시 전축까지 있었으니까요.”
그는 돈암동 자신의 집 바로 뒤에 살았던 시인 오장환에 대한 각별한 기억도 풀었다. “오 시인이 약혼자와 함께 이복누이 집에서 살았어요. 미군정에서 남로당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동네에 형사가 쫙 깔렸어요. 그때 새벽에 오 시인이 우리 집으로 담을 넘어왔는데 아버지가 받아주었죠.”
세원씨는 6년 전에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격이 맞지 않았어요.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와 숙명여고 동문이었던 모친은 얌전하고 모범적인 분이었어요. 안에 열정이 많고 말이 없으셨죠. 아버지는 자유분방하셨고요. 결혼 뒤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것은 적은데 집에 비싼 커튼을 달라고 해서 속을 끓이셨다고도 했죠.” 그러자 고모가 받았다. “엄마가 아마 비위가 안 맞아 말이 없어졌을 거야. 순남 오빠가 나한테 ‘달밤에 아내한테 같이 산책하자고 하면 안 하겠다고 한다’고도 말했지.” 똑 떨어지고 야무진 목소리는 누구한테 물려받았냐고 하자 세원씨는 “어머니와 꼭 닮았다”고 답했다.
아버지 노래 중 특히 좋아하는 곡을 묻자 딸은 이렇게 답했다. “상렬이나 초혼, 진달래꽃이죠. 제가 음악방송 진행을 40년 했는데 (아버지 곡이) 기가 막혀요. 아버지 음악을 세상에 더 알리고 싶어요. 이 집이 헐리지 않고 지켜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 음악을 교과서에 싣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부친의 음악이 북한에 많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2010년 무렵 탈북자에게 들었는데 북한 바이올린 연주자 백고산(1930~1997)이 아버지 바이올린협주곡을 연주했다고 해요. 북에 기악곡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그가 가장 찾고 싶은 아버지 음악은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피아노협주곡이다. “아버지가 피아노협주곡 1악장과, 2악장 두 소절만 쓰고 월북하셨어요. 아버지가 이북에서 이 곡을 완성했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헝가리 국립문서 보관소에서 찾은 1952년 아버지 사진을 저한테 선물한 초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북 대사 겸임)한테도 북한에 가면 아버지 곡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내년은 ‘자유와 혁명의 시인’ 김수영 탄생 100년이다. 시인의 아내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김 시인과 함께한 세월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 양반 주사가 심해요. 주사 없이 봄날같이 조용한 날에는 행복했죠. 그런데 순간이에요. 다음날에는 난리를 쳐요. 내가 그 주사를 다 받아주었어요. 주사 부릴 때도 나는 항상 존댓말을 했어요. ‘안 됩니다’라고요. 한 번도 반말로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사별한 지 반 세기도 지난 남편이 가장 보고 싶은 때는? “요즘은 1년에 한두 번 꿈에 시인이 나타나요. 그러면 그 양반이 나한테 ‘같이 자자’ 그래요. 그러면 내가 ‘몸도 편찮으신데….’ 이렇게 대답해요. 그 순간에는 꼭 누군가 나타나 우리를 지켜 보더군요. 시인이 나한테 열정이 있었죠.” 인터뷰를 마치며 자유와 혁명은 김수영 시인 못지않게 시인의 아내에게도 맞춤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김순남 작곡가의 6촌 동생이자 김수영 시인 부인 김현경(왼쪽) 선생과 김순남 작곡가의 외동딸인 김세원(오른쪽) 전 <교육방송> 이사장이 1일 해방전후 김순남의 신혼집으로 추정되는 서울 돈암동의 한옥을 찾아가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사진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순남 작곡가.
“신혼부터 월북까지 살던 돈암동 한옥”
“오빠 반주에 ‘산유화’ 따라 부르기도”
“김수영 시인 두고 ‘회색분자’ 비판도” 1945년생 유일한 혈육 ‘방송인’ 세원씨
“아버지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 희망” 김순남은 결혼 이듬해인 1945년에 딸 세원을 얻었다. 딸은 부친이 88년 남한에서 해금되고 사라진 아버지의 음악을 찾아 중국만 13차례나 찾았단다. 95년에는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란 책도 냈다. “고모와는 93년부터 알고 지냈어요. 해금 전까지는 김순남이란 이름조차 꺼낼 수 없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고모와 제가 70년대에 동부이촌동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줄에 살았더라고요.” 시인의 아내는 순남 오빠를 베토벤과 소월의 시를 사랑한 ‘절대 자유인’으로 기억했다. “오빠는 베토벤을 제일 존경했어요. 베토벤 이야기를 하면서 ‘더 아름다우려면 법칙을 따라선 안 된다’는 말을 노상 귀에 박히도록 했어요. 위대한 작품은 법칙을 무시할 때 나온다고요. 오빠도 작곡에서 법칙을 파괴하려고 했죠. 제가 일본 암파서점에서 나온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사서 오빠에게 주기도 했죠. 그 책을 보더니 오빠가 베토벤 이야기라고 반가워했죠. 오빠는 북에 가기 전에 김일성 찬가 작곡 요청을 받았는데도 응하지 않았어요. 개인숭배라면서요. 오빠는 시인 중에서도 김소월 시를 제일 높이 쳤어요. 최고 시인은 김소월이라고 했죠.” 고모의 말에 세원씨가 받았다.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음악이라고 하셨대요. 새 우는 소리나 나무 흔들리는 소리도 다 음악이라고요.”
고모와 조카 사인인 김현경 선생과 김세원 전 이사장이 1일 김순남 작곡가가 신혼 때 살았다고 추정되는 돈암동 한옥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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