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개인전 ‘창과 더미’가 열리고 있는 상업화랑 전시장. 서울 을지로 상가들이 보이는 왼편의 실제 창문과, 창문틀을 배경으로 바깥 을지로 상가들을 그린 오른편 유화 작품 <두 개의 초록 선>이 대비를 이룬다. 작가는 을지로를 담은 연작들이 “풍경 속 세부들을 묘사해 집을 세우고 거리를 만들고 원근과 빛을 조율하기 위해 작은 붓질을 거듭해서 쌓는 과정이 됐다”고 말했다.
“불과 며칠 전에 괴물들이 나타났어요!”
대안미술공간 ‘상업화랑’의 운영자 양찬제씨가 옥탑방 전시장 뒷문을 열어주면서 손짓했다. 문밖 옥상 너머에 공룡같이 큰 고층 크레인 4대가 눈에 들어온다. 어림잡아 높이가 100m 이상 돼 보인다. 크레인은 재개발 계획이 확정된 을지로3가 6구역의 낡은 상가 건물 위에 군림하듯 도열해 있다. 을지로3가 조명상가 건물 3·4층을 쓰는 상업화랑 옥상은 을지로3가 재개발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옥탑방 전시장엔 최근 수년간 을지로의 낡은 건축 공간 구석구석을 그려온 소장 한국화가 정재호씨의 신작 풍경화가 내걸렸다. <창과 더미>에 먼저 눈길이 닿는다. 세운상가에서 망원렌즈로 을지로 공구상가 뒤편의 휑한 풍경을 당겨 포착한 사진을 유화로 옮긴 작품이다.
낡은 건물 사이로 비스듬히 걸쳐진, 끝이 날카로운 각목과 폐기물 더미를 세심한 붓질로 묘사한 작품은 바깥의 크레인과 겹쳐지며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각목과 폐기물 더미에서 ‘사선으로 일어선 창’과 ‘전장의 주검’을 떠올리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개발과 철거에 대한 저항과 갈등처럼 비친다.
상업화랑 옥탑 전시장 뒷문을 열면 보이는 을지로3가 6구역 재개발 현장. 대형 건물 신축 공사를 위해 최근 설치한, 높이 100m가 넘는 크레인 4기가 낡은 건물들 사이로 잇따라 서 있는 모습이다.
<창과 더미> 옆에 나란히 붙은 <소리를 듣는 곳>은 낡은 벽면의 빌딩과 금속제 패널로 두른 지붕, 100년 가까이 된 적벽돌 공장의 자태가 허공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을지로 상가에 얽힌 역사적 풍경의 중첩상을 원경의 건물 실루엣과 벽면에 붓 작업을 통한 질감으로 보여준다는 얼개가 돋보였다.
이 작품들은 정 작가가 상업화랑의 옥탑방과 그 아래층 본전시장에서 지난 2일부터 열고 있는 개인전 ‘창과 더미’ 중 일부다. 수년간 작업해온 을지로 풍경 연작 20여점을 모았다. 한국화 화단에서 세필 묘사의 실력자로 꼽혀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재료와 작업 방식, 풍경을 바라보는 인식 등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드러낸다. 2000년대 이래 서울 도심의 아파트와 빌딩의 정면부를 담는 극사실적 회화로 두각을 드러냈던 그는 을지로 작업을 계기로 수묵채색 안료 대신 양화의 유화물감을 재료로 쓰면서 정면을 바라보는 관점을 벗어났다. 을지로 상가 골목이란 근대사 공간에서 건물의 모서리와 이면, 그 언저리의 허공까지 끌어들이면서 사연이 깃든 서사적 풍경을 처음 시도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창과 더미>(부분). 을지로 공구상가 뒤편의 쓸쓸하고 휑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중첩된 낡은 건물 사이에 창처럼 비스듬히 걸쳐진 각목과 폐기물 더미가 보인다. 작가는 각목과 폐기물 더미 모습에서 ‘사선으로 일어선 창’과 ‘전장의 주검들’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으나, 조금 더 세심하게 묘사한 것 외에 더는 나가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창과 더미>와 더불어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두 개의 초록 선>은 이런 시도를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을지로 상가가 보이는 실제 전시장 창문과 거의 똑같은 구도로 나란히 놓여 대비를 이룬다. 실제 창가 풍경과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초록 테이프 붙은 창틀 안 을지로 풍경은 작가가 관찰하고 공부한 수많은 공구상가의 풍경과 이야기, 사건이 녹아든 총체적 이미지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을지로 상가 건물 외벽이나 주요 기물을 마치 만지는 것처럼 부각한 질감 효과다. 유화물감을 쓰면서 “붓질 하나하나가 바로 물질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외벽 타일이나 가게 셔터 개폐 장치를 유화물감의 섬세한 모필로 부각한 소품은 사진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재개발 구역의 현상을 생동감 있게 전해준다. 27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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