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예술단 판 이용수 대표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인 이용수(75) 예술단 판 대표는 자칭 괴짜다. 국민은행 대리 시절인 1982년 첫번째 책 <별소리 다하네>를 펴낼 때부터 스스로 괴짜라고 책 광고를 냈다.
그에게 괴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적이며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찾아 무언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사람이다. “괴짜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우주 속의 큰 무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봐야죠. 예의 차리고 재기만 하면 뚫고 나갈 수가 없어요. 괴짜라고 하면 친근하게 느껴져 상대와 거리도 줄일 수 있어요.”
새달 6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자신의 창작 판소리 <블랙홀에서 온 사나이> 공연을 계획하고 있는 이 대표를 지난 19일 경기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자택에서 만났다.
1998년 32년간 일한 국민은행에서 명예퇴직한 그는 2007년 이후 지금껏 창작 판소리 9개를 무대에 올렸다. 중종과 대장금의 사랑을 소재로 만든 <왕과 장금> 창작 판소리 공연은 2007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 이어 2008년 예악당에서 했는데 400석과 700석 객석이 가득 찼단다.
이번 창작 판소리는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자커’가 지구인을 대표해 명왕성과 블랙홀에 끌려가 블랙홀 대황제와 조사관 앞에서 지난 삶의 죄과를 심문당하는 내용이다. 지구촌 생태 위기와 아이들의 꿈과 활력을 빼앗는 입시교육의 문제점을 꼬집는 한편 ‘종합예술’이자 ‘영혼의 음악’인 판소리의 미덕도 곳곳에서 드러냈다. “인간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작품이죠. 46억 년 전 인간들에게 편히 쉬고 가라고 지구별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마치 지구가 자기 것인 양 땅을 사고팔면서 등기까지 하잖아요. 지구를 훼손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똑같은 공부를 하면서 졸고 있고 재벌들은 목에 힘을 빡 주잖아요. 인간들은 또 달이나 화성 탐사에 나서 무단으로 사진을 찍고 우주의 신비까지 까발리고 있죠.”
판소리 동편제의 고장인 전북 남원 운봉 출신인 그는 1973년 고 박봉술 명창한테 적벽가를 배우며 본격적으로 판소리에 입문했다. 84년부터 20년 넘게 조상현 명창에게 춘향가·심청가를 배웠고 수궁가는 고 정광수 명창 지도로 이수자 지정까지 받았다.
그가 은행 퇴직 4년 전부터 시작한 ‘판소리 강습’을 받은 수강생도 수만 명에 이른단다. 그는 국민은행 호남본부 부본부장이던 1994년 광주 무등산 너덜겅 약수터에서 처음으로 국악 교실을 열었고 그 뒤로 근무지가 바뀌어 서울 대모산과 전북 내장산 등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다. 퇴직하던 해 서울 강남문화원에서 시작한 판소리 강좌는 지금껏 24년째 이어오고 있다. “대모산에서 저한테 배운 제자가 지리산 천왕봉에 앉아 판소리 단가 ‘사철가’를 부르다 화답하는 이가 있어 물었더니, 무등산에서 저한테 판소리를 배웠다고 해 서로 반가워했다고 하더군요.”
판소리에 ‘웬 블랙홀이냐’고 묻자 그는 “30년 동안 신문에 나오는 우주 이야기를 다 스크랩했다”며 말을 더했다. “판소리를 하며 우주에 관심이 생겼죠. 판소리에 우주의 섭리가 다 있어요. 5바탕이 다 그래요. 예컨대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춘향을 그리워하는 대목을 보면 ‘자시에 하늘이 생기고 축시에 땅이 생겼다’고 해요. 온갖 지식의 보고이자 깊이가 있는 수궁가에도 우주와 천문학이 나옵니다. 판소리를 하면 우주가 친근하게 느껴져 공부하게 됩니다.”
남원 운봉 출신 1973년부터 소리 배워
자칭 ‘괴짜’ 은행원으로 32년간 근무
1998년 명퇴 뒤 창작판소리 9개 공연
28년째 ‘판소리 강좌’ 수강생 수만명 ‘블랙홀에서 온 사나이’ 내고 공연 예정
“지구별 망가트린 인간들 반성 촉구”
그는 판소리 공부 이전에는 한때 코미디언을 꿈꾸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오산 미군기지 장교클럽 무대에서 영어로 스탠딩 코미디를 한 적도 있어요. 서울 이태원 지역의 한 호텔 연예부장 소개로 무대에 올랐죠.” 그는 이 시절 방송국을 직접 찾아가, 농부가 홀태로 나락을 훑는 동작에서 착안해 직접 만든 ‘홀태 댄스’를 선보이며 출연을 제안하기도 했단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욕설만 하는 코미디를 혁신하고 싶었죠.”
그는 해발 470m에 자리한 고향 운봉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녔다. 주산 특기생으로 전남 광주의 중학교에 진학한 뒤 광주상고를 나와 국민은행에 수석으로 들어갔단다.
그는 자신을 ‘괴짜 이용수’로 키운 건 운봉이라고 믿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10리 길에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유행가를 목청껏 부르곤 했죠. 뭉게구름 흘러가는 모습이나 빨간 저녁노을을 보면서 상상력을 키웠어요. 우리 집 정면으로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바위도 보였어요.” 그는 신나게 말을 이었다. “부친이 매사냥꾼이어서 어려서부터 매를 따라 하늘을 달렸고 산과 들을 누볐죠. 판소리를 좋아한 어머니는 장터에서 명창 이화중선의 소리를 듣고 그 내용을 다 기억해 들려주셨고요. 우주를 보며 넓게 뛰다 보면 ‘세상에 태어나 유치원 운동장에서 줄넘기만 하다 가면 되겠냐’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말도 했다. “어릴 때 자연에서 나무 크는 것을 보고 또 동물들 배고프면 밥 주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논에 물 없으면 물을 대면서 자연스레 인성이 길러지죠. 드넓게 뛰어놀면 숨 막히는 게 없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가 이번 공연에 앞서 ‘우주 판타지 판소리 소설’이라는 수식어로 펴낸 <블랙홀에서 온 사나이>를 보면 판소리의 미덕은 무한에 가깝다. 지식이 가득하고 도덕성 함양에 도움을 주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고 건강에도 좋다는 등 설명이 끝이 없다. “대모산에서 가르칠 때 수강생 한 분이 정신과 약을 먹고 있었는데 수강 두 달 만에 약을 끊었다고 해요. 판소리는 큰소리로 하기 때문에 배우면 자신감을 줍니다. 또 판소리에는 한시와 음양오행, 동의보감, 역사, 상고사, 지리, 철학이 다 들어 있어요. 수궁가는 의학 지식이 동의보감보다 더 자세히 나와요. 제가 용왕에게 도사가 침놓는 대목을 하니까 한 관객이 선생님은 한의원 차려도 되겠다고도 하더군요.”
그가 판소리를 통해서 누리는 즐거움은 하나 더 있다. “흥보가를 보면 제비가 강남에서 박씨를 물고 흥보가 사는 운봉으로 옵니다. 변강쇠타령의 변강쇠가 옹녀와 정을 나눈 인월도 예전에는 운봉이었어요. 살면서 고향을 죽어라 노래하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소설에는 외계인들이 주인공 자커의 뇌를 열어보려는 대목이 나온다. 자커가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판소리 다섯 바탕과 자신의 창작 판소리 작품들까지 모두 30시간 동안 공연할 수 있는 내용을 외우고 있다는 게 놀라워 그 비밀이 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요즘은 몇 번 본 사람도 얼굴을 자주 깜빡해요. 하지만 판소리 사설은 다 외웁니다.” 그는 이어 적벽가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이 죽어 나가는 대목의 창을 숨가쁘게 들려줬다. “약 70가지 방법으로 죽어요.” 기억력의 비밀을 묻자 답이 간결하다. “판소리는 장단 고저가 있으니까요.” 공연 문의 (02)778-9358.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판소리의 고장 운봉에서 태어나 판소리를 하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용수 대표가 판소리 한 대목을 부르며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자칭 ‘괴짜’ 은행원으로 32년간 근무
1998년 명퇴 뒤 창작판소리 9개 공연
28년째 ‘판소리 강좌’ 수강생 수만명 ‘블랙홀에서 온 사나이’ 내고 공연 예정
“지구별 망가트린 인간들 반성 촉구”
<블랙홀에서 온 사나이> 표지.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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