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제이엔오갤러리 개인전에 선보인 서용선 작가의 <마고> 연작들. 지난달 17~26일 작가가 전시장 현장에서 작업하면서 새로운 도상으로 직접 그려낸 신작들이 대부분이다. 추상적인 사선과 직선으로 형상화한 절대신 마고의 모습과 땅을 딛고 걷거나 응시하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그린 대작들이 나란히 내걸려 있다. 안쪽 두 그림 아래에 그가 현장 작업을 하며 쓴 붓과 물통, 물감들이 작품의 일부로 함께 놓여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그의 괴력을 어떻게 풀어 설명할 수 있을까.
올해 칠십 줄에 들어선 노작가한테 주문이 들어왔다. 주어진 시간은 단 열흘. 그 안에 198㎡(60평) 남짓의 전시장을 수십점의 새 작품으로 채워달라는 것. 한민족의 창세 신화 중 하나인 마고신화 속에 나오는 여성신 마고와 태초 마고성의 사람들 군상이 채우는 그림의 숲을 일구는 것이 목표다. 이 거대 서사의 미술을 어떻게 금세 만들어내라는 걸까. 공장식으로 작품을 찍어내듯 생산했던 앤디 워홀 같은 팝아티스트라면 모르겠지만, 수작업으로 다작의 내공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제이엔오갤러리의 서용선 개인전 ‘마고, 그 신화’전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마고성 사람들3, 뛰다>.
하지만 서용선(70) 작가는 해냈다. 단순한 열정으로 풀이할 수 없는 집요한 끈기와 새 형상을 창조하겠다는 상상력과 집념. 그 불가사의한 동력이 열흘간 출근하듯 찾았던 전시장에서 숯불처럼 붓질로 타올랐다. 12년 전 사실상 마무리했던 과거 <마고신화> 연작들의 신과 인간들의 도상을 다시 기억하고 복기하면서 2021년 팬데믹 시대의 상상력을 입혀 분투하듯 땅을 딛고 도약하고 몸을 움찔거리는 군상들의 물감 드로잉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 그림들은 그의 신작전 ‘마고, 그 신화’(7월3일까지)가 열리고 있는 서울 청담동 제이엔오(JNO)갤러리 전시장 한복판을 빙 두르듯 내걸렸다. 12년 전 우연히 봤던 작가의 마고 연작을 기억하고, 지금 시대에 걸맞은 신작을 현장 작업으로 만들어보려 한 화랑주의 의도는 “의기투합이 잘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절묘하게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뜻대로 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고희’의 나이를 입증하듯, 국내 화단에서 현역 최고 대가로 인정받는 서용선 전 서울대 미대 교수가 최근 돋보이는 기획전을 세곳에서 차렸다. 제이엔오갤러리와 경기도 여주미술관에서 그의 40여년 풍경회화·역사회화의 여정을 새로운 개념틀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두개의 기획전을 펼쳐놓았다. 부산 재송동 갤러리하이에서는 2016년부터 올해까지의 자화상들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전시(7월7일까지)를 시작했다. 세 전시 모두 자신의 신·구작들을 한데 모아 뜯어보고 분석하고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담론틀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국내 화단 최고의 인문주의 화가로 상찬을 받는 이유를 실감하게 한다.
여주미술관의 ‘만첩산중 서용선회화’전 1전시장 일부. 작가가 국내와 세계 곳곳의 도시와 자연 속을 섭렵하며 포착한 다기한 풍경회화들을 가벽을 친 좁은 공간 속에 촘촘하게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공연기획자 김형남씨가 작가에게 헌정한 여주미술관의 개인전 ‘만첩산중’은 지난 30여년간 고구려 성터, 단종 사적, 세월호 해역 같은 국내외 역사 현장과 세계 각지 도시 공간 등을 소재로 그린 서용선 풍경회화의 다양한 단면들을 해체해 독특한 형식과 배치로 담았다. 작가가 국내와 세계 곳곳의 도시와 열차, 지하철 등 탈것, 자연 속을 섭렵하며 포착한 다기한 풍경회화들을 가벽을 친 좁은 공간 안에 촘촘하게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여느 전시장과 달리 그림의 전모를 보기 힘든 미로식 배치 방식을 두고 김형남 예술감독은 “서용선 회화에서 그냥 지나치거나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림의 공간을 방황하면서 느껴보게 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4일 낮 여주미술관에서 ‘만첩산중 서용선회화’전의 전시 얼개를 풀어 보여주고 관객과 교감하기 위해 열린 이야기 마당의 한 장면. 현대 옷에 전통 탈을 쓴 춤꾼이 서용선 작가의 대작 풍경 그림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낮 여주미술관에서 ‘만첩산중 서용선회화’전의 전시 얼개를 풀어 보여주고 관객과 교감하기 위해 열린 이야기 마당의 한 장면. 현대 옷에 전통 탈을 쓴 춤꾼이 서용선 작가의 대작 풍경그림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전시의 또 다른 흥밋거리는, 실험적 공연무대 특유의 난해함이 눈에 걸리기는 하지만, 서용선 회화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깔고 있는 춤판과 퍼포먼스다. 작품들에서 우러나오는 속도와 소리, 현장성의 이미지들을 힙합 래퍼와 배우, 퍼포먼서가 실험적 구도의 율동과 사운드아트로 재해석해 작품 앞에서 보여주는 정기 공연을 곁들이는 얼개다. 실제로 늦봄의 찬란한 햇살이 여주 들녘에 쏟아지던 지난달 24일 여주미술관에서 ‘만첩산중 서용선회화’전의 전시 얼개를 풀어 보여주고 관객과 교감하기 위한 이야기 마당이 열려 눈길을 모았다. 죽음과 삶, 일상을 오가는 인간의 몸짓이 핍진하게 펼쳐지는 그의 화폭 속에서 발견한 소리와 속도, 색의 밀도감 등을 경기민요 ‘제비가’의 도드리장단, 은율탈춤의 중춤과 힙합 댄스, 드럼 소리와 농악 장단 등으로 표현한 무대가 이어졌다. 오는 20일 서용선 회화의 본질을 추려 춤꾼·배우들이 펼치는 대형 공연으로 마무리되는 이번 전시는 1부에 불과하다. 미술관 쪽은 그의 풍경화를 해체한 요소들과 관객들의 반응, 공연 준비 과정에서 얻은 자료들을 가지고 올해 말까지 3부에 걸쳐 그의 작품들을 분석하는 장기 개인전을 여는 파격을 시도한다.
제이엔오갤러리 전시장의 <마고> 연작 신작들 밑에 놓인 붓과 물감통 등의 화구와 습작 그림들. 지난달 열흘간 전시 현장에서 직접 출품작들을 그리며 작업한 흔적으로, 출품작들과 함께 전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제이엔오갤러리 개인전은 상고시대의 마고 신앙을 토대로 그린 근작들을 분석하면서 작가의 역사의식과 무의식을 뜯어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시 현장에서 작업하면서 새로운 도상으로 직접 그려낸 신작들은 추상적인 사선과 직선으로 형상화한 절대신 마고의 모습과 땅을 딛고 걷거나 응시하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담았다. 현장 작업을 하며 쓴 붓과 물통, 물감들을 작품의 일부로 함께 놓고, 그의 메모장, 일정표 등도 전시에 포함한 실험적 구도가 돋보인다. 대표작들인 <마고성 사람들> 연작은 땅을 딛고 일어나 뛰며 도약하고 물을 마시고 뒤를 돌아보는 인간의 원초적 몸짓을 특유의 거칠고 굵은 필선과 기운 넘치는 동세로 그려냈다.
지난달 24일 낮 열린 ‘만첩산중 서용선회화’전 이야기 마당에서 서용선 작가가 관객 앞에서 자신의 작품세계와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뒤에 보이는 작품은 2015년 독도의 서도를 그린 대작 <독도3>이다.
여주미술관의 공연 현장에서 작가는 말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상과 세계를 오로지 내 의식의 끝까지 집요하게 보는 과정이지만, 한편으론 캔버스를 사고 물감을 뿌리고 붓질하고 작품 주위를 돌고 같이 사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낸 전시들은 그림의 특수성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림을 끼고 사는 작가의 삶의 모습, 태도 등을 담아내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