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이마빡이 허옇게 넓은 순박한 시골 아저씨였나요?”
“에이미 와인하우스, 네 모습이 옛날 티브이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한 맺힌 소복 유령 같지 않니?”
“모자를 들고 선 찰스 다윈 할아버지, 뭘 생각하며 우릴 보고 있나요?”
역사 속 위인들의 숲속을 거닐면서 관객들은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다섯개 방으로 나뉜 622㎡(180여평) 전시장에 500여년간 세계사를 수놓은 위인과 거장의 얼굴들이 가득하다.
이제 대부분 세상에 없지만, 지금 살아 숨 쉬며 우리와 대면하는 듯한 착시감을 안긴다. 배경과 색감, 표현기법, 화풍의 차이 속에 용모가 천차만별이고, 후대에 전해진 다채로운 삶의 기억들이 겹쳐져 여느 명화와는 다른 연상 작용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4월 말부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1층 특별전시실에 차려진 특별전 ‘시대의 얼굴―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는 ‘인간을 뜯어보고 이해한다’는 초상화의 인문적 매력을 여실히 전해주는 역대 최고 수준의 서구 명화전이다.
‘런던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라는 영문 고유명사로 더 친숙한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은 1856년 세워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으며 가장 큰 규모의 초상화 컬렉션을 갖고 있다. 연간 방문객이 200만명에 육박하며 인스타그램 팔로어만 100만명에 이른다.
전시가 시작되는 1부 ‘명성’ 영역의 입구. 전시의 첫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는 16~17세기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확대한 큰 그림 패널이 보인다. 이 초상화는 작가가 생존했을 당시 그린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3부 영역에 나온 엘리자베스 공주의 초상화. 제임스 1세의 딸로 17세기 초 유럽 왕실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로버트 피크가 1610년께 14살의 공주를 그린 이 작품은 가슴의 다이아몬드 사슬 장식을 비롯해 복식 전체를 화려한 귀금속으로 가득 수놓아 공주가 뛰어난 미모와 막대한 부를 갖췄다는 것을 드러낸다.
일반적인 미술사 전시는 명작의 작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 전시는 그림 속 주인공의 인생에 주안점을 둔다. 루벤스, 안토니 반다이크, 로댕, 레이놀즈 등 서구권 거장들의 작품 천지지만, 이들은 전시를 끌고 가는 주역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뉴턴, 다윈, 엘리자베스 1세, 찰스 1세 등의 명사와 왕부터 흑인 성직자, 성소수자 등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를 움직였던 인물들 자체가 전시를 끌어나간다.
특별전은 상식적인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이란 다섯 열쇳말로 전시장을 나눠놓고, 시공을 넘나드는 초상화들이 배우처럼 등장해 주인공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1부 ‘명성’의 들머리에 셰익스피어와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딜런 토머스의 초상을 함께 놓고, 2부 ‘권력’에서도 여성 교육에 헌신했던 19세기 인물 루이즈 조플링과 2000년대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 맞서 이슬람 여성 교육을 주창한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초상화를 시공을 초월해 대비시킨 데서 이런 기획 의도가 도드라져 보인다.
3부 영역에 전시된 요절 팝스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초상화 <에이미 블루>.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 말린 두마가 요절 소식을 듣고 그린 작품이다. 미디어에 노출된 스타의 얼굴 이미지를 바탕으로 창백한 파란 톤의 색감이 깔리고 단순화한 이목구비로 얼굴을 구성해 질풍노도의 삶을 살다 홀연히 사라진 천재 뮤지션의 삶을 인상적으로 표상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존 미술거장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2005년 그린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미국 할리우드 힐스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공간을 배경으로, 친구인 큐레이터 찰리 샤이프스가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캔버스 앞에 선 작가가 등장한다. 그림 속 화가와 모델, 이를 지켜보는 관객 사이의 시선이 얽혀들면서 감상의 흥미를 돋우는 호크니 자화상의 명작이다.
전시 꾸밈새는 현란하지 않다. 책이나 교과서 도판으로 친숙한 뉴턴, 다윈 등 역사적 위인들의 초상화 실물들을 만날 수 있고, 최근 선보인 현대 작가들의 개성적인 유명인사 초상 작업들도 보여준다. 특히 3부에 전시된 요절 팝스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초상화 <에이미 블루>는 단연 인상적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 말린 두마가 와인하우스 요절 직후 그린 이 그림은 미디어에 노출된 스타 이미지를 바탕으로 창백한 파란 톤 색감을 깔고 단순화한 이목구비로 구성해 질풍노도의 삶을 살다 홀연히 사라진 천재 뮤지션의 삶을 표상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존 미술 거장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2005년 그린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은 작업실에서 친구 큐레이터 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캔버스 앞에 선 작가가 등장하면서 화가와 모델, 이를 지켜보는 관객 사이의 시선이 얽혀든다. 영국 전위작가 트레이시 에민의 <데스마스크>도 놓칠 수 없다. 사생활을 까발리는 설치작품들을 전시했던 작가는 청동제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몸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욕망을 내비친다.
전시장 5부 말미에 나온 영국 작가 트레이시 에민의 <데스마스크>. 2000년대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청년 현대미술가(yBa) 그룹의 일원으로 사생활을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설치작품들을 전시했던 작가다. 그는 이 청동제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몸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흔적과 욕망들을 내비치고 있다.
기획진은 디지털 몰입영상 등 첨단 기법으로 뒤발하거나 관객 참여, 물량주의를 앞세운 요즘 전시 흐름을 따르지 않았다. 전시장은 고전적인 얼개지만, 초상화 장르의 유산에 홀로그램, 엘시디(LCD) 화면 등 현대 기술로 인물을 재현한 최근 작업들까지 망라하며 주제에 맞춤한 작품 배치로, 참신한 공간 연출이 돋보였다.
또 하나, 영국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허접하고 볼만한 회화사 거장들이 없다는 선입견을 깨뜨린다는 점에서도 전시는 의미가 있다. 게인즈버러, 레이놀즈, 로런스 등 18~19세기 영국 거장들이 여인과 군인 등을 그린 인물화 소품과 대작들은 고전미술 탐구와 감각적인 사생이 어우러진 그 시기 인물회화의 정점으로, 감상 뒤에도 눈에 아른 거릴 만큼 매력이 충만한 작품들이다. 8월15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