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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4·3과 ‘작별하지 않는다’고 하는 까닭

등록 2021-11-01 09:59수정 2021-11-02 14:58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5) 4·3 제주 항쟁

“그때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이에……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아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오 2,16)

예수님의 탄생과 얽혀 벌어진 이 학살 사건은 당시 헤롯 왕의 잔인함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복음사가는 이 아픔을, 나라를 빼앗긴 북 왕조 이스라엘 멸망 당시의 비명과 통곡, 그 어떤 위로도 마다한 예레미아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이 어린이들을 순교자로 추앙하며 매해 12월 28일에 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범주는 매우 넓고 깊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훗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예수님의 수난, 그 예시적 전표(前標)입니다. 무릇 억울한 죽음은 모두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상통하며 공동체를 위한 보속과 속죄 그리고 정화를 뜻한다는 성서 신학적 선언입니다.

십자가 죽음, 고통의 신학에는 두 가지 큰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 차원의 교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갑니다. 오히려 죽는 게 나을 듯한 고통의 정점에서 우리는 “왜, 내가?”라며 원망하고 항변합니다. 이 물음에 십자가의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나를 보세요. 하느님의 아들인 나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세상으로 갔으나 어이없게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종교 사범, 군중을 선동했다는 국가 사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어요. 그러니 당신과 나는 동병상련의 처지입니다. 당신의 고통이 크고 깊지만 나를 보아서라도 그 고통을 이겨내세요. 자, 함께 손잡고 힘을 냅시다!” 십자가 신학의 위력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차원의 교훈입니다. 최근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상 최대의 오판’이라고 지적하며,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종교의 사회적 사명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를 향해 ‘이제는 더는 나와 같은 억울한 죽음을 없게 하라!’라는 호소이며 절규입니다. 온갖 불복과 정치적 조작을 청산하라는 명령입니다. 십자가 신학의 사회 실천적 교훈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앞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스스로 치유되며 부활을 확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울한 사람, 작은 사람,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잘 돌보라 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받고 억울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과 같이, 모든 시대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이 순교입니다. 따라서 4·3 제주 항쟁의 희생자들도 우리 시대의 순교자들입니다. 이것이 이분들을 기려야 할 신앙적 이유이고 우리가 져야 할 시대적 책무입니다.

4·3 희생자는 우리 시대 순교자
김대중정부때 진상규명 시작됐으나
빨간칠 하는 이들 아직 남아있어
평화위해선 잘못을 진정 회개해야

그런데 우리는 매우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4·3 제주 항쟁을 폭동과 공산반란으로 불러왔습니다. 교과서에서도 30여 년 이상 폭동이란 이름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도 일부 교과서들은 여전히 과거 논조를 고수했습니다. 이런 비뚤어진 생각을 지닌 이들은 2021년 오늘에도 우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에 저는 반사적 본능을 의지로 제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상 마지막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4·3 제주 항쟁을 폭동이라 하는 것은 단세포적입니다. 손가락 아홉 개를 외면하고 왼손 새끼손가락 하나만 보겠다는 심보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을 공격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빌미였을 뿐,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에 의해 사건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결말을 낳습니다.

4·3 항쟁으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밝힌 희생자 수는 14,233명입니다. 그중 무장대와 전혀 관련 없는 여성이 20%가 넘고, 10살 이하의 어린이와 노인도 12%에 달합니다. 일각에서는 희생자가 최대 3만 명이라고 하는데, 제주도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 비밀문서를 토대로 6만 명 사망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인구 급증과 흉년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분명 해방이 되었는데도, 일제강점기 수탈에 앞장섰던 관리와 경찰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1일, 3·1절 행사에서 기마 경관에 의해 어린아이가 다치게 됩니다. 행사를 구경하던 주민들이 이에 항의하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자행해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4·3 항쟁의 도화선이라면, 서북청년단과 육지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 진압은 4·3 항쟁의 기름 탱크가 되었습니다.

다만 젊은 남자라는 이유로, 혹은 남로당에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심지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젖먹이 아기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라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미국 대통령 특사 무초(John J. Muccio)는 소련과 북한을 배후로 지목하기까지 했습니다. 6·25 전쟁 중에도 무차별 살상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9월21일 사건이 최종 종결될 때까지, 무려 7년 7개월간 지상에서 지옥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1978년에 발표한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4·3 제주 항쟁을 다룬 소설입니다. 주인공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연장자를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은 4·3으로 남편과 남매를 잃고 평생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다가, 가족이 학살당한 옴팡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순이 삼촌의 죽음은 이미 30년 전에 일어난 해묵은 죽음이라고. 현기영은 작품 발표 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최근 한강 작가가 4·3 항쟁을 소재로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발표했습니다. 제목 그대로 우린 아직도 4·3을 떠나보낼 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4·3 제주항쟁을 재조명하려는 정치적 관심은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도 진상규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희생자 유족에 지급할 배상금과 보상금도 2022년 국가 예산으로 책정했습니다.

2018년 4·3 항쟁 70주년을 맞아, 당시 제주 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교황은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을 통해 ‘4·3 항쟁 70주년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비극은 덮는 것도 잊는 것도 아닌, 드러냄으로써 치유된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 종교의 계시이며 구원의 핵심입니다.

공권력 특히 해방정국에서 경찰 권력의 횡포는, 군사독재 정권이 자행했던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해방정국 3년 동안 공공연히 테러와 폭력을 자행했던 잘못이 매우 큽니다. 이에 2018년 1월 서울 강북구청은 4.3 제주 민간인 학살 주요 책임자로 알려진 조병옥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16위 흉상건립사업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는 1947년 삼일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에게 발포한 사건의 경찰 지휘 책임자였습니다. 우리 사회공동체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진심으로 회개할 때에만 상처는 치유되고 공동체 정신이 살아날 것입니다.

성경은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법과 정의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억울하고 약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늘 응답하셨습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공동체를 억압하고 탄압했던 많은 정치인, 법관, 검찰, 군인, 경찰 등 수사 책임자들의 회심을 바라며 제주의 평화가 한반도의 참된 평화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선조들과 4.3 제주 순교자들이여, 우리나라와 온 세상의 정의 평화 실현을 위해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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