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재미동포 노천희씨
“홍승용 선생님이 저에게 ‘선생님 공력으로 현승효 사상이 빛을 봅니다’고 하실 때 ‘현승효 사상이라니!’ 속으로 만세를 외쳤어요.”
재미동포 노천희씨는 서울 대성학원에서 재수하던 1970년에 같은 대구 출신으로 동갑인 고 현승효(1950~77)씨를 만나 7년을 연인으로 지냈다. 1971년 경북대 의대에 들어간 고인은 박정희 유신 독재에 저항하다 본과 2학년 때 제적당하고 75년 2월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그리고 제대를 불과 4개월 남긴 1977년 6월 구보훈련을 하다 쓰러져 사망했다. 군이 밝힌 사인은 열사병이었다.
고인은 28개월 군 복무 중 200자 원고지로 약 5천매 분량의 글을 썼다. 1600매 분량의 일기와 편지글은 노씨가 꼬박 2년 걸려 정리해 2007년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지난 8월 나머지 3400매 분량의 철학 에세이 유고가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자유와 투쟁>(도서출판 모임, 이하 회향)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2년 전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소장이 노씨에게 원고를 받아 2천매 분량으로 축약하고 일부 다듬어 펴냈다. “서른이 되기 전에 하나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고 싶다”고 고인이 죽기 한 달 전 일기에 쓴 바람이 44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이 책을 내려고 2016년에 29년 동안 사무원으로 일한 뉴욕 퀸스공립도서관에 사표까지 던진 ‘현승효의 영원한 연인’ 노씨를 지난 4일(현지시각) 전자우편으로 만났다. 뉴욕 퀸스에 사는 그는 1984년 남편과 함께 미국 이민을 가 두 딸과 손주 다섯을 두고 있다.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자유와 투쟁과 연결지어 사유를 펼친 단행본 ‘회향’을 두고 홍 소장은 이렇게 평했다. “40년 전 경북대 의대 중퇴생이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칸트의 선험철학과 헤겔의 변증법,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기독교와 불교사상 등을 종합해 인류가 추구할 만한 미래사회 모습을 체계적으로 구상해냈다면, 이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인은 책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인 ‘회향’을 인간 회복의 길로 제시하고 여기에 이르려면 ‘생존에 매달리는 던져진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타자와의 일치를 이루는 범아 형성을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봤다. 고향의 본질을 자유로 인식한 이 ‘회향적 인간학’에는 플라톤과 칸트 등의 철학 사상은 물론 기독교와 불교 등 종교와 문학·예술 쪽 수많은 텍스트가 종횡무진으로 동원된다. “젊은 나이와 군대라는 특수한 집필 환경, 지극히 억업적이었던 당대 정치 현실을 감안할 때, 현승효가 이룩한 종합적 사유의 결과는 실로 경이로울 따름이다.”(홍승용)
“데이트 때 승효씨는 인간 이성의 진보를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게 하는 책을 서른 전에 꼭 내고 싶다고 했어요. 열애에 행복한 때에도 읽고 사유했고 생각이 안 풀릴 때는 미치겠다며 자신의 몸에 상처까지 냈어요.”(노천희)
고인의 일기를 보면 심할 때는 하루 6번까지 구타를 당한 군의 “정신 모멸 환경”에서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훈련 때도 배에 책을 끼고 다녔고 촛불 아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 난해한 철학서를 독파했다.
고인이 군에서 그토록 쓰기와 읽기에 몰두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하자 노씨는 “승효씨는 투쟁하는, 행동하는 철학인이 되고 싶어 했다. 이론도 실천행동이라고 했다”고 답했다. “경북고 다닐 때도 맨날 잡지 <사상계>나 어려운 책을 끼고 다녔고 ‘청심학술토론회’도 만들어 일주일에 무조건 한 권씩 읽고 토론했답니다. 노무현 정부 시민사회수석을 한 이강철씨도 한 인터뷰에서 ‘승효와 친해지면서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고 말했죠. 군에 가서는, 책을 읽을 수 없는데다 사유하지 못하는 삶을 끔찍하게 생각했어요. 정신을 빼놓고 살라는 무지막지한 졸병 3년의 본전을 건진다면서 더 치열하게 읽고 사유하고 썼죠.”
동갑 경북대 의대생 현씨와 ‘7년 연인’
유신 저항해 제적당한 현씨 ‘군의문사’
군복무때 쓴 철학 에세이 유고 3400매
단행본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로 출간 편집 맡은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장
“군대 폭압 속 종합적 사유 경이로워” 데이트 때도 고인이 사상과 책 이야기를 많이 했냐고 하자 노씨는 이렇게 답했다. “데이트할 때도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가 저는 집에 가자마자 자는데 승효씨는 밤새 책을 읽고 와서 다음날 다 얘기해 주었어요. 이야기를 해주면 내 애인은 어쩌면 이렇게 아는 것도 많을까 놀랍고 너무 큰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워낙 승효씨가 장난꾸러기라 저를 놀려먹고 낄낄 웃느라 사상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어요.” 고인이 휴가 때마다 그에게 건넨 회향 유고는 대학 노트 8권 분량이다. 노씨는 이 원고를 1982년 고인의 큰형으로, 한-일협정 반대시위인 6·3항쟁을 이끈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에게 돌려주었다가 24년이 지난 2006년 출간 목적으로 돌려받았다. 하지만 빛바랜 철학 유고가 빛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원하면 구십까지 다닐 수 있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출간에 전력한 이유다. 노씨는 이번 책에 실린 글에서 “죽는 날까지 지상에 그 고귀한 사람(현승효)의 유전자를 퍼뜨리고 싶다”고 썼다. 왜 ‘고귀한’일까? “승효씨는 대학에서 반유신 성명서나 결의문을 도맡아 쓰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고통으로 중생을 도와야 하며 그게 자기완성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위생병 시절 일기를 보면 구보를 못 하는 동료 병사 대신 자원해 죽을 지경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죽을 때도 극심한 폭염에 구보훈련을 하는 어린 병사들 곁에 있어 줘야 한다며 안 가도 될 훈련에 갔어요. 이게 고귀하지 않으면 무엇이 고귀할까요. 저는 그에게서 고귀한 인간을 봤어요.” 고인은 1974년 경북대 치예과 지망 수험생이 소아마비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매일신문>에 투고해 대학 처사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노씨는 이 독자 투고가 대학 쪽 반발을 사 고인이 대학에서 내쫓기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봤다.
그가 고인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생각한 것은 극심한 몸의 고통을 겪던 1997년 무렵이었다. “목디스크로 도서관에서 출근 정지까지 당할 때였죠. 이제 폐인이 되어 일생을 마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승효씨 원고가 생각났어요. 아무도 안 하면 내가 그 이름을 드러내겠다고 결심했죠.” 고인을 죽음으로 내몬 유신체제의 정점인 박정희 딸 박근혜가 한국 정치판에서 의기양양하게 힘을 과시하는 것도 영향이 있었단다. “박근혜가 노무현 정부 때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일군 나라인데 노무현 때문에 무너지니’ 이런 소리를 하는 데 분노를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현승효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하니 평소 말이 없던 남편도 좋다고 해요. 남편이 2004년 노트북도 사 오고 한글 프로그램을 깔아줘 우선 일기를 정리했죠.”
민중화가 노원희 작가의 동생인 그는 미국에서도 전쟁과 인종차별 반대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해왔다. 1990년대 초부터 뉴욕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운동을 해왔고 지금도 6·15공동선언실천 뉴욕지역위원회 회원으로 평화·통일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실천에는 승효씨 영향이 컸다고 했다.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다 승효씨와 같은 정신을 가졌으니까요. 승효씨 만나러 가듯 그 사람의 유지를 조금이라도 실천하듯, 신바람 나서 시위에 나갑니다. 그런 곳을 가면 승효씨 말대로 정신과 육체가 일치되는 것 같아요. 고인이 된 우리 엄마 종교가 원불교인데 귀가 닳도록 하는 말씀이 ‘머릿수 하나 보태라, 자리 하나라도 채워라’였어요. 저는 재능은 없지만 시간은 있고 아프지 않으니 머릿수 채운다 생각하고 시위에 갑니다. 어떤 책이든 읽으면 결론은 다 실천 행동을 하라는 거잖아요.”
마지막으로 계획하거나 진행 중인 현승효 기념사업을 묻자 그는 “없다”면서 바람을 말했다. “경북대 의대에서 승효씨를 제명한 사유가 부당하니 지금이라도 명예 졸업장을, 동생을 잊지 못하고 아파하시는 두 형님과 두 누님께 드렸으면 합니다. 또 경북대 여정남기념공원이나 승효씨가 휘젓고 다닌 의대 교정에 기념비를 세웠으면 좋겠어요. 이런 거로 제 한이 풀리지는 않습니다만.”
그는 이번 책을 읽고 언니(노원희)가 “깨닫는 묘미가 있더라”는 소감을 전했다며 “책을 승효씨 부모님 영전에 바치고 싶다”고 했다. “승효씨 부모님이 이 책을 보지 못하고 가신 게 너무 속상해 책이 나온 뒤 울었어요. 승효씨는 다 큰 자식이 너무 의젓하면 부모님이 소외감을 느낀다며 부모님 앞에서는 바보 영구 맹구 같이 행동했어요. 승효씨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어이고 철 없는 놈!’ 그러셨죠.” 그는 2년 전 고인이 된 둘째 언니가 책 출간을 재촉했다는 이야기도 기사에 꼭 넣어달라고 했다. “둘째 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천희야 승효 책 꼭 내래이. 27살 묵은 사람이 우째 그래 썼겠노!’ 해서 제가 ‘응’ 다짐하고 홍승용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불멸의 남자’ 현승효 기념 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노천희씨. 노천희씨 제공
현승효씨가 76년 4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찍었다. 노천희씨 제공
<회향> 유고. 노천희씨 제공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자유와 투쟁> 표지. 홍승용 소장은 초판 천 권 중 절반이 이미 판매됐다고 밝혔다. 문의 010-8250-6033.
유신 저항해 제적당한 현씨 ‘군의문사’
군복무때 쓴 철학 에세이 유고 3400매
단행본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로 출간 편집 맡은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장
“군대 폭압 속 종합적 사유 경이로워” 데이트 때도 고인이 사상과 책 이야기를 많이 했냐고 하자 노씨는 이렇게 답했다. “데이트할 때도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가 저는 집에 가자마자 자는데 승효씨는 밤새 책을 읽고 와서 다음날 다 얘기해 주었어요. 이야기를 해주면 내 애인은 어쩌면 이렇게 아는 것도 많을까 놀랍고 너무 큰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워낙 승효씨가 장난꾸러기라 저를 놀려먹고 낄낄 웃느라 사상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어요.” 고인이 휴가 때마다 그에게 건넨 회향 유고는 대학 노트 8권 분량이다. 노씨는 이 원고를 1982년 고인의 큰형으로, 한-일협정 반대시위인 6·3항쟁을 이끈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에게 돌려주었다가 24년이 지난 2006년 출간 목적으로 돌려받았다. 하지만 빛바랜 철학 유고가 빛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원하면 구십까지 다닐 수 있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출간에 전력한 이유다. 노씨는 이번 책에 실린 글에서 “죽는 날까지 지상에 그 고귀한 사람(현승효)의 유전자를 퍼뜨리고 싶다”고 썼다. 왜 ‘고귀한’일까? “승효씨는 대학에서 반유신 성명서나 결의문을 도맡아 쓰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고통으로 중생을 도와야 하며 그게 자기완성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위생병 시절 일기를 보면 구보를 못 하는 동료 병사 대신 자원해 죽을 지경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죽을 때도 극심한 폭염에 구보훈련을 하는 어린 병사들 곁에 있어 줘야 한다며 안 가도 될 훈련에 갔어요. 이게 고귀하지 않으면 무엇이 고귀할까요. 저는 그에게서 고귀한 인간을 봤어요.” 고인은 1974년 경북대 치예과 지망 수험생이 소아마비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매일신문>에 투고해 대학 처사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노씨는 이 독자 투고가 대학 쪽 반발을 사 고인이 대학에서 내쫓기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봤다.
노천희씨와 현승효씨가 74년 12월 계명대에서 찍었다. 노천희씨 제공
노천희씨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집회에서 장미꽃을 들고 있다. 노천희씨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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