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문명교류사 서설 1> 표지. 진인진 펴냄
‘유럽판 만리장성’이 다가왔다. 넘어야 할 숙명의 벽처럼.
1992년 12월,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던 유학생 박천수는 영국에서 일생일대의 답사 체험을 했다. 현지에서 연구년 일정을 보내던 지도 교수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잉글랜드섬 북부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찾게 된 것이다. 1800년 전 낯선 로마인의 성곽이 신라·가야 고고학 전공자의 화두를 실크로드사 쪽으로 돌려놓았다. 켈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길이 120㎞짜리 방벽은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시로 로마군이 만들었다. 일정 구간마다 있던 군영 터에서 수많은 유리기가 출토된 사실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유라시아 동쪽 끝 신라 왕실에서 보물로 취급된 로마 유리기가 서쪽 끝에서는 병사들 일상 용기로 쓴 것을 처음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떠올렸다.
돌아와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가 된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등 박물관의 실크로드 유물들을 샅샅이 실견했다. 이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중국의 시안, 베트남, 이탈리아 등 전세계 실크로드 고고 유적을 섭렵했다. 특히 2009년 이란 고대 아케메네스조와 사산조 페르시아 유적을 답사한 것은 실크로드 교류사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여년간 가야·신라 고분들의 출토 부장품과 고대 한-일 교류사를 연구하면서 이와 연결되는 실크로드 고고학 연구에 박차를 가해왔던 박 교수가 최근 역저를 냈다.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 문명 교류사의 발자취를 전체 유적 답사와 고고학적 유물 탐구로 정리한 <실크로드 문명교류사 서설>(전 3권·진인진 펴냄)이다.
책은 초원로·사막로·해로의 실크로드 세 부분을 각 권으로 나눠, 로마 유리기로 대표되는 실크로드 유적의 물품들이 세 경로를 오가면서 이룩한 문명교류사를 출토 유물의 이입 경로와 역사적 배경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고대 로마와 지중해 속주에서 생산돼 같은 제품이 중앙아시아, 인도를 거쳐 동쪽으론 당·신라·일본으로, 서쪽으론 로마제국의 최북단 영국 요크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에까지 흩어진 로마 유리기가 가장 빈번한 교류 사례로 언급된다.
세권의 책은 본문 분량만 각각 400쪽 안팎으로 모두 합치면 1160쪽에 이른다. 3권 해로편 말미에 16개 항목 약 80쪽에 걸쳐 세계 각국의 실크로드 연구 중요 문헌 목록을 정리한 건 이 책의 또 다른 진가다. 200건 넘는 지도, 도판과 현장을 돌며 직접 찍은 사진 자료들도 그냥 넘길 수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