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이사장이 지난 7일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만 31살 소장학자이었던 1971년에 연세대가 다산 정약용을 대학의 얼굴로 삼겠다고 마련한 ‘실학 공개강좌’ 자리에 선 적이 있어요. 원로 사학자 천관우, 철학자 박종홍 등 쟁쟁한 석학들의 뒤를 이어서요. 그때 강의 내용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번에 나름대로 해답을 찾은 것 같아요.”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김영호(81)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이 최근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학자 20명의 논문을 모은 책 <세계사 속의 다산학-실학의 집대성에서 동서문화의 통합으로>(지식산업사)를 펴냈다. 그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다산 국제공동학술연구 책임을 맡아 2015년부터 세 차례 이끈 국제학술회의와 따로 네 차례 열었던 연구회 성과를 모았다.
“국립대만대 중문과 차이쩐펑 교수가 주자의 고향에서 연 학술대회에서 한·중·일 사상사를 비교·분석해 보니 맹자의 민본사상을 민주사상으로 전환시킨 학자는 정약용뿐이라고 하더군요.”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김 이사장에게 다산학 국제공동연구의 성과를 묻자 바로 꺼낸 말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명예교수, 나카 스미오 일본 교토부립대 문학부 교수, 리민 중국 정주대 역사학과 교수 등이 다산 학문을 놓고 다양한 논의를 펼친 이 책에 김 이사장은 ‘제3기 유학론과 다산학’이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다산을 공자·맹자와 주자를 이은 ‘3기 유학의 건설자’로 규정했다. “주자의 2기 신유학이 기독교 바람에 촛불처럼 흔들릴 때 청년 다산은 기독교와 서학 세계에 철저히 빠져든 뒤 다시 헤엄쳐 나와 유학의 눈을 새롭게 띄웠어요.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처럼, 동서 문화를 통합해 세계 유학을 다시 열었죠.” 유학 종주국인 중국의 3기 유학을 두고는 “공·맹에서 주자의 도로 이어지는 ‘도통론’에 입각한 중화주의 재판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시진핑 시대 중국 유학붐은 2기 유학의 연장선이라고 봅니다. 서학과 충분히 회통하지 못한 데다 중화주의의 새로운 도구 노릇까지 하고 있어요. 성숙한 3기 유학 없이는 중국이 세계를 끌어안을 수 없어요.”
그는 ‘동서 문화 통합’이라는 다산 3기 유학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로 ‘자주지권’(自主之權) 개념을 들었다. 다산은 <맹자> 주해서인 <맹자요의>에서 ‘인간은 금수와 달리 선악 결정권이 있다’는 의미로 이 말을 썼다. “다산은 동양에 없던 ‘자주지권’ 개념을 16세기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 쓴 ‘자주지의’(自主之意)에서 빌려왔어요. 인간이 자주적으로 결단한다는 뜻인데 이는 ‘네 행동에 네가 책임져라’는 근대적 인간론으로 연결됩니다. 자주지권을 갖는 인간은 타인과 계약을 맺는 것도 가능해요. 계약이 쌓이면 사회가 됩니다. 하지만 다산은 기독교의 용서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자기 수양과 노력으로 강해진다는 유학의 자강주의를 중시했죠.” 그는 이어 “다산은 이전까지 임금만 직접 대면하던 천(하늘)을 개인이 직접 만나는 관계로 해석했다”며 “이 역시 근대를 여는 다산의 사상 혁명”이라고도 했다. 차이쩐펑 교수는 수록 논문에서 어질 인(仁)을 두 사람 사이 문제로 해석한 다산의 ‘이인상여(二人相與)론’을 두고 “‘사회계약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동아시아 전통 유학의 소중한 자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 이사장은 경북대 대학원에서 경제사를 공부하고 들어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시절부터 실학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한국사 연구의 식민사관 극복과 재정립에 열정을 쏟다 다산 등 조선 후기 실학 전통과 만난 것이다. 그 시절 김 이사장은 조선 후기 수공업을 연구해 김용섭(농업 연구)·강만길(상업 연구) 교수 등과 함께 <19세기의 한국사회>(1972) 책을 내기도 했다.
한중연 ‘정다산 국제학술연구’ 책임
5차례 국제학술회의·연구회 진행
“다산은 동서통합 ‘세계 유학’ 열어”
경제사 전공 거쳐 실학사상 연구로
지난 5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연구
“유엔에 불법·무효화 청원할 계획”
그는 다산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다산 자료 수집가이다. 6년 전에 50년 가까이 모은 다산 서책 50종 166책, 시문·서화·문서 5종 23점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하기도 했다. 이번 책에 수록한 김문식 교수의 글 ‘정약용의 <상서> 금고문 이해’ 등도 그가 수집한 자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정민 한양대 교수도 제가 구한 다산 책으로 논문을 3편 이상 썼죠.”
수집 경위를 궁금해하자 그는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연세대에서 실학 강좌를 하던 때 자료수집가 안춘근 선생이 엿장수에게 다산 저작 원본 20여책을 구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상도동 그분 집을 출근하다시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제 열의에 못 이겨 엿장수를 소개해주시더군요. 이 엿장수가 자료를 구한 다산의 수제자 시골집을 알려줘 <매씨서평> 등 중요한 다산 전적을 구할 수 있었어요. 그때는 자료 모으기가 비교적 쉬웠어요.” 그는 앞으로 다산학 연구 과제를 묻는 질문에도 “원 자료로 다산 텍스트를 재정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자료가 많이 모여 가능하다고 봅니다. 정인보, 안재홍 선생이 1930년대에 다산 글을 집대성하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부분을 많이 들어냈고 편제도 자의적으로 했어요. 이번 공동연구에 참여한 분들 사이에 원래 다산이 의도했던 전서를 새로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요.”
그는 한일병탄 조약 100년이던 2010년에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 한·일 지식인 1천여 명이 참여한 ‘한일병합조약 불법무효 한일지식인 공동성명’ 발표를 끌어냈고 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을 맞은 2015년에는 2차 한·일 지식인 성명도 발표했다.
김영호 이사장은 1992년에 다산경제학상을 받았다. 강성만 선임기자
지난 5년 김 이사장은 일제의 전쟁 책임을 청산할 목적으로 1951년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문제점을 짚는 국제학술 연구도 이끌어왔다. 재작년까지 미국과 중국,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다룬 학술대회를 네 차례 했고 이 연구 성과를 묶은 단행본 출간도 앞두고 있다. “유엔은 1963년 총회에서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을 세계에서 가장 나쁜 국제조약 다섯개로 선정했어요. 여기에 한국을 서명 대상에서 제외해 대일 청구권조차 없는 나라로 만든 샌프란시스코 조약도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 지식인이 공동 서명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불법 무효화해야 한다는 청원을 유엔에 제출하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라는 감옥을 두들겨 부숴야죠.” 지난 5년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묻자 그는 “영국이 일본의 로비를 받아 총대를 메고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회의 참가를 저지했다는 게 이태진 교수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고 답했다.
그는 7년 전, 일본 ‘평화헌법’을 지키는 단체인 ‘9조의 모임’ 10주년 기조강연에서 ‘동아시아 시민평화헌장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지금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정치인들에게는 희망이 없어요. 그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 상대를 적으로 만들고 군비를 늘리고 긴장을 조성하고 있어요. 저는 동아시아 시민에게서 희망을 찾아요. 그들이 ‘우리가 주인이다’ ‘정치인들은 아시아를 망치지 말라’고 외쳐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 12억 중산층과 14억 스마트 피플(스마트폰 사용자)이 있어요. 그들이 서로 친구가 되자고 들고 일어나야죠.”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관계 해법에 대해 묻자 그는 “한국은 안이한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한국이 일본에 맞서 ‘발가벗고 한판 붙자’고 하면 일본이 오히려 손을 들 수도 있어요. 전후 유엔 중심 세계체제는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반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만들어졌어요. 이런 유엔의 마당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일본의 시도는 용납되지 않아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