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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지금 더 생생한 시인의 외침

등록 2022-01-03 09:59수정 2022-01-03 10:17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4) 김수영 시인의 절규
김수영 사후 반세기 넘게 흘렀으나
‘썩은 과거와 결별’은 아직 미완

종교, 정치, 언론이 독사라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마태오 3,7-10)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태오 12,34)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마태오 23,33)

독사의 자식들. 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종교인과 권력자 등 위선자들을 무섭게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목숨을 걸고 죄와 유혹과 악의 뿌리인 사탄을 끊어버리겠다고 서약합니다. 삼중의 다짐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과 함께 교회 공동체와 영생을 믿겠다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거짓과 속임수는 가증스러운 범죄이며 위선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원죄라고 말합니다. 사탄인 뱀에게 속은 죄입니다. 거짓에 속은 아담의 죄보다 속인 뱀의 죄가 원죄의 뿌리로, 그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와 신학은 이 점을 놓치고 소홀히 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는 속인 자의 죄를 크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인 자의 후예인 위선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에 비유하며 크게 꾸짖고 계십니다. 속인 자의 대표로 당시 종교인과 정치인을 지목하십니다. 새해 첫 주간, 저는 이 말씀을 종교인으로서 되새기며 성찰합니다. 그리고 사제가 될 때 했던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과 기도를 반복해 올립니다.

정치인의 책무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아름다운 봉사직입니다. 신정 정치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한 짝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교분리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사실 한 실체의 양면일 뿐입니다. 종교 자체가 정치적이며, 정치 자체가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 언론은 종교와 정치라는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정직한 말과 진실을 전하는 기능은 종교적이라 봅니다. 제도와 규범, 사람의 언행을 종합, 해설하는 일은 정치적입니다. 그러므로 언론이 타락하면 종교, 정치보다 더 큰 악영향을 미칩니다. 하루속히 우리는 부패한 언론과 결별해야 합니다. 신문과 방송이 자연의 소리, 진리의 말씀, 스승의 가르침, 부모님의 교훈처럼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종교와 정치가 독사이고 언론이 독사라면 그 사회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서에서 수많은 예언자가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회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엔 절실함도 진실함도 없습니다. 이러하니 세상이 바뀌지도 않고, 영성에 닿을 수도 없습니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회개란 어제와 결별하는 일입니다.

성서의 ‘회개’ 같은 김수영의 시

여기 거칠지만 한없이 간절한 언어로 혁명적 결단을 촉구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김수영 시인의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입니다. 이 시에서 그는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거야말로 진정한 회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와 결별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썩어빠졌다 해도 그렇습니다. 이는 심장을 찢는 결단이며 내적 혁명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개인과 공동체 모두 질적으로 확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입니다. 시대의 혁명은 이처럼 사람들의 내면적 변화에서 출발합니다. 시어에는 비록 거칠지만 시대의 호소와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무엇에 이토록 격분한 것일까요?

김수영은 서울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을 보냅니다. 하지만 식민지 조국에서 집안은 몰락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나 밥벌이 공부보다는 시에 빠져듭니다. 귀국 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북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됩니다. 훈련소에서 간신히 탈출하나, 곧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됩니다. 3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에서 극한의 대립과 참혹한 살상을 경험한 그는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절망합니다.

김수영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김수영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그 후 12년간 이어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로 그의 절망은 더욱 깊어집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 희망이 지워진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일 밤 술잔을 가득 채운 술을 거름 삼아 피울음 같은 시를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4·19혁명은 벼락불처럼 그에게 희망과 미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4·19와 함께 시인은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곧 시대정신이고,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가 곧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승만이 사퇴를 선언하자 흐느껴 울며 수많은 시를 쏟아냅니다. 앞에서 말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는 당시 관공서마다 걸려 있던 이승만의 사진을 떼어 버리는 것이 혁명적 변화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왕과 사제, 지도자들을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백성을 외면하는 그들을 위선자라 칭했고, 망해야 한다고 독설했습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오늘날 사회, 정치적 개혁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김수영 시인의 시가 성서의 회개와 직결된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세상은 쉽게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4·19로 분출한 시대정신은 불과 1년 만에 5·16 군사쿠데타로 지워집니다. 그는 시 ‘기도’를 통해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라고 염원하지만, 4·19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바뀐 것 없는 현실에 그의 무릎은 꺾였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직전에 쓴 마지막 시 ‘풀’에서 그는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고 담담히 노래함으로써, 절망을 강권하는 세상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겠노라고 선언합니다.

기득권을 불편하게 했던 시인

그의 일생은 거칠었고 불온했습니다.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꿔야 한다’, ‘위선과 가식을 떨쳐야 한다’라는 주장은 기득권의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뿐 아니라 현재를 청산할 수 있는 용기가 곧 성서의 회개이며, 우리의 사회 공동체를 보다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어느덧 54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최근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첫걸음은 ‘우리는 그가 결별하자고 외쳤던 것들과 과연 완전히 결별했을까’란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종교, 정치, 언론을 집약한 그 시대의 길잡이, 예언자, 선구자, 역사와 인생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썩어빠진 어제는 바로 오늘의 종교, 정당과 정치 현실, 입법, 사법체계, 무엇보다도 사적 기업으로 타락한 언론의 변질, 그리고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와 분단체제, 유신 독재의 후유증 등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썩어빠진 과거와의 결별은 미완의 과제입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시대의 깃발이 되었던 시인의 결단과 용기를 본받아, 공동체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내적 변화를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지극히 정의로우시고 공정하신 하느님, 불의한 과거와 부조리한 현재를 청산하기 위해 심장을 찢는 마음으로 뉘우치오니 온 세상 온 겨레를 정화해 주소서. 순교자들과 순국선열들, 의인들의 투신과 예언자들의 불길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시어, 저희가 공동체의 행복과 평화를 증진하는 내적 변화의 원동력이 되게 해 주소서. 시대 변혁의 주역인 4·19 불사조가 되어, 혁명적 시와 기도로 온 겨레가 새로 태어나게 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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