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에제키엘 37,21-2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로마 9,2-3)
1961년 4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4·19 일주년 기념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 이수병 선생님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청년 학생들이 3·1 독립선언과 항일투쟁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에 종속된 정치체제를 넘어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을 위한 불길을 댕긴 것입니다.
4·19로 분출된 뜨거운 시대정신은 청년과 시민을 각성시켰고, 이는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절절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청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판문점으로 향했습니다. 청년 학생들의 열정과 울부짖음은 뿌리를 찾고자 하는, 구원과 완성을 찾아가는 인간 본성의 발로였습니다. 이는 분열된 두 나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예언자의 가르침과 명령, 그리고 동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사도 바오로의 역설적 고백과도 상통합니다.
당시 신학생이던 저는 이 구호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지만, 감히 생각해 보지도 못한 말이었습니다. 아니,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딴 세상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시대의 엄청난 변혁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귀 막고 눈 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념적으로는 불사조가 되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정작 행동은 아직도 스스로 불태우지도 못하고 하늘도 날지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신학생들은 장면 총리가 가톨릭의 모범 신앙인이라 생각했기에 시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중반 한국 가톨릭의 실상이었습니다. 정지용 시인 같은 선구자적 신자들도 계셨으나, 이는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신학생이었던 우리에게 이 구호는 매우 낯설고 한편으로 신기하기조차 했던 것입니다.
4·19 직후 범람했던 혁신적 선구자들은 민주와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목소리를 키웠으나, 이승만 사퇴 후 넉 달 만에 출범한 장면 정권은 혁명의 열망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용기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시대의 요구를 포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꿈은 결국 일 년도 안되어 5·16 군사 반란으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자비한 탄압과 반동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5·16 군사 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가장 위협이 되는 세력은 무엇보다 두려움을 모르고 물러설 줄을 모르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이수병 선생님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4·19 일주년 행사에서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혁명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 복역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어둡고 아픈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민주를 열망했던 학생,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포기할 일은 없을 것이며, 박정희 정권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일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1974년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눈엣가시였던 민주 세력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려는 의도로 2차 인혁당 사건을 기획합니다. 즉, 민청학련의 있지도 않는 지하조직이 인민혁명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21명에게 중형을 선고합니다. 8명은 사형, 7명은 무기징역, 6명은 징역 20년입니다. 이때 이수병 선생님도 사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1975년 4월 8일,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사형집행 통보서가 서대문 구치소에 전달되었고, 대법원 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는 점입니다. 민주와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재심의 기회도 갖지 못했고,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모진 고문의 흔적을 들킬까 봐 가족 면회도 금했고, 문제가 생길 게 명약관화했기에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비참한 길을 걷는 한국’이란 제목의 기사를 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회는 이들의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역시 항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뒤처리에만 몰두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장례식도 방해
크레인으로 운구차 뺏어 강제 화장
운좋게 집에 돌아온 이수병 시신의
등짝에 검게 탄 전기고문 흉터 등
온몸의 고문 흔적을 내 눈으로 목격
1975년 4월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들의 구명운동을 했던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를 강제 추방하고, 언론을 동원해 사형 당한 8인을 악마화하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그들 전원이 종교의식을 거부하고 모든 반정부 행위를 인정했으며, 최후 진술에서 “조국이 하루빨리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훗날 이 모든 것들은 당연히 거짓으로 밝혀집니다.
절망스럽게도 사형당한 이들의 장례조차 마음대로 치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로 첫 본당인 응암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었습니다. 장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영구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성당을 향해 오던 영구차가 방향을 틀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송상진 선생님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는 녹번동 삼거리에서 무려 4시간을 실랑이하다가 중앙정보부가 크레인까지 동원해 강제로 끌어가서 화장해버렸습니다. 서도원 선생님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는 경찰이 고향인 창녕으로 끌고 갔습니다. 유족에겐 유골만 전달되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이수병 선생님의 유족은 시신을 집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그의 아내는 남편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헌병들이 뒤돌아보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하루아침에 아내는 기둥 같은 남편을 잃었고, 어린 세 자녀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시신에 남겨진 가혹 행위의 흔적에 그의 아내는 오열하며 혼절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 현장의 증인입니다.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은 온통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고, 전기고문으로 철판이 닿았던 등은 까맣게 탔으며 발뒤꿈치는 움푹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문의 흔적들은 사진으로도 남아 그때의 처절했던 상황을 역사 앞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제들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 관련 가족들을 만나게 된 것은 1974년 7월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님이 중앙정보부에 잡혀 구속되자 그분들을 위한 석방 운동을 하게 된 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당한, 말할 수 없는 고문 얘기에 온몸이 저려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의분이 일었습니다. 이 사건이 귀 막고 눈 감고 있던 우리 사제들을 깨워서 역사의 현장, 세상 한복판으로 이끌었습니다. 바로 정의구현사제단이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인 1975년 4월 9일 정의구현사제단은 그동안 정부가 저질렀던 불법과 사법부의 비밀재판을 규탄하고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틀 뒤인 4월 11일 이 일로 저는 중앙정보부 5국 대공수사국으로 끌려갔습니다. 6국 정치국과는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수사관은 제게 이렇게 말하며 겁박했습니다. “이봐, 여기는 간첩 잡는 곳이야! 6국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라. 알았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저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용기를 주십시오!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화살기도를 반복해서 끊임없이 올렸습니다.
음습한 벽을 넘어 옆방에서 들려오는 악랄한 고문과 피맺힌 절규에 저는 십자가 예수님을 기억하며 순교자들의 결단을 되새겼습니다. 희생된 여덟 분을 마음에 모시고 안식을 기원하며 청원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하룻밤의 고통은 마치 1천년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날 당한 고통과 모욕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을 통한 은총의 첫 체험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2005년 이수병 선생님을 포함해 8인이 희생된 2차 인혁당 사건은 재심의 소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2007년 1월 피고인 8명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됩니다. 그해 8월에는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시국 사건 최대 배상액이란 판결을 끌어냈습니다. 이수병 선생님의 사망 당시 다섯 살도 채 안 되었던 세 자녀는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나이를 훌쩍 넘어 쉰 전후가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둘째 아들의 혼배 성사를 제가 집전했습니다. 오래전에 진 빚을 갚는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스스럼없이 외치기 어렵고, 이 구호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일부 언론과 일부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담할 뿐입니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국민의 85% 지지를 받았던 문재인 정부도 시대정신의 구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과연 제대로 해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정의를 향한 결단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시대는 늘 용기 있는 앞선 사람이 문을 엽니다. 그 문으로 한 시대가 통과합니다. 신년 벽두, 통일운동에 몸담았던 귀한 분들이 생각납니다. 이수병 선생님을 포함한 8인, 임진강을 헤엄쳐 건넜던 김낙중 선생님,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문익환 목사님, 정경모 선생님, 유원호 선생님, 임수경 선생님과 문규현 신부님 그리고 서경원 선생님 등 통일운동의 선구자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통일의 불을 지피는데 자신을 불쏘시개로 썼던 의인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뜻을 이어받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의 외침을 실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겨레의 이름으로 하나 된 민족 공동체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온 세상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가 끊임없이 노력하며 간구하오니, 갈라진 우리 민족을 한시바삐 하나가 되게 해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의 선구자들이여, 우리 겨레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