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7)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17)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쿠데타뒤 ‘민족적 민주주의’로 분칠
굴욕적 한일회담에 분노한 학생들이
박정희의 거짓 민주주의를 폭로 _______
대중 감성을 자극한 박정희의 술수 누군가는 일제 36년이 근대화 기간이라 주장하지만, 어불성설입니다. 침략과 수탈이 핵심입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에 경제 발전이 있었다고 하나, 이는 부차적 결과일 뿐입니다. 핵심은 군사반란과 배반에 기초한 비양심, 반인권, 반민주, 반민족, 반평화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강도는 강도일 뿐입니다. 날강도짓으로 어쩌다 어려운 이를 도와주었다 한들 결코 자선이 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이 죽어가면서 읊조렸던 마지막 절규와 기도를 기억합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라.” 부끄럽고 뼈아픈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1962~1963년 군 복무를 하였습니다. 저 또한 청년 사병들처럼 군 복무하는 동안 불의와 불법과 모순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군대는 불의한 군부독재의 온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여 목숨을 걸고 3·1 독립혁명의 물꼬를 튼 것도 우리 청년, 학생이었습니다. 그 뜻을 이어 청년, 학생들이 박정희 군사반란과 배반에 맞서 나섰습니다. 신의는 인간관계의 핵심 덕목이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신앙과 믿음입니다. 따라서 배반과 배신은 씻을 수 없는 죄입니다. 상한 음식이 건강을 해치듯, 반란자의 말과 배신자의 말은 민족공동체에 대한 저주입니다. 거짓말도 계속하다 보면 그 말의 진위를 알기 어렵게 됩니다. 바로 군부독재 시대가 빚은 가치관의 혼란과 언어의 부패입니다. 박정희는 스스로 약속한 ‘공약’을 어기고 군정을 연장하려 들었습니다. 미국이 반대하자 포기하고, 그 대신 창당을 준비하고 기존 정치인의 손발을 묶는 내용의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는 등 집권을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합니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호가 ‘민족적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앞에 붙는 수식어들은 언제나 불순한 의도를 목적으로 합니다. 명분이나 목표 추구를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하겠다는 공지입니다. 박정희의 경우 ‘민족’이었습니다. 대선을 치른 1963년은 해방된 지 18년이 지난 때입니다. 일제강점기와 친일파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었던 당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아주 크고 확실한 가치였습니다. 친일 군관이자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매력적인 구호라 판단했습니다. 경쟁 후보였던 윤보선으로부터 가짜 민주주의라는 공격을 받았으나, 박정희가 승리했습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친일 청산, 미완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한 정치 술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민주를 훼손하거나 희생해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공동체 재건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좀 억압한다는, 독재 통치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구호가 처음 나왔을 때 대중들은 박정희의 속내를 알 수 없었습니다. 현실을 왜곡한 박정희의 기만은 1964~1965년 대부분의 국민이 반대하는 한일협정을 추진하면서 그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청구권 행사로 일제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자존심까지 버렸다는 사실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의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민족과 민주 중에 민족마저 내팽개친 것입니다. 이에 청년,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크게 외칩니다.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입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벌이는 학생들. <한겨레> 자료 사진
유신 이후엔 ‘한국적 민주주의’ 내세워 1960년대 말 일시적으로 사라졌던 민족적 민주주의는 유신독재와 함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속임수로 다시 대중을 현혹했습니다. 수식어만 달라졌지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독재 통치를 용인하라는 협박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7·4 남북공동선언 실천, 즉 분단에 대응하고 경제개발을 위해서 독재를 받아들이라는 강요였습니다. 투표라는 민주주의 형식을 빌려 법과 제도를 무력화하는 권력자의 야만적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라는 단어 앞에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도 한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제한 기득권자들의 속임수입니다. 개인적으로 민족이란 단어에 거부감은 없지만, 민족이 신성불가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생전에 “공격적 민족주의는 거부해야 하지만, 방어적 민족주의는 건강하다”고 얘기했습니다. 2022년,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을 치르며 지켜 온 우리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성장했고 단단해졌는지 되돌아봅니다. 아직도 철 지난 냉전 시대 논리에 물든 사람들이 있고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우리 사회가 충분한 자정 능력을 갖췄다고 믿습니다. 모든 불의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보다 인류 보편적이고 공동선에 근접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기를 바라며, 아울러 남북의 평화공존을 기원합니다.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느님,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선열들의 고귀한 삶을 본받고 실천하게 하소서. 미숙한 모든 이들을 깨우쳐주소서. 잘못된 군사문화, 배신의 제도를 청산해 역사의 무덤에 묻고, 이제는 아름답고 성숙한 민족공동체의 민주주의 문화를 꽃피우고 알찬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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