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공짜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의인은 제 가축의 욕구까지 알지만, 악인은 그 자비마저 잔인하다.” (잠언 12,10)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12,31-32)
성경의 <지혜문학>은 속담, 격언 등 선현들의 가르침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고 자신과 이웃, 공동체를 위해 실천하기 위한 지침서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의입니다. 그 덕목은 하느님에 대해서는 신앙이요, 형제·자매·동료들에 대해서는 신의이며, 이웃과 재물에 대해서는 신용이라고 표현합니다. 세 단어 모두 접두어는 ‘믿을 신(信)’자입니다. 그 반대어가 바로 배신(背信)입니다.
1970년대 저는 교도소에서 많은 의로운 교도관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들께 늘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억울한 재소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고, 재소자 처우 개선에 큰 힘을 보탰습니다. 교도소에는 ‘비둘기를 날린다’라는 은어가 있었습니다. 재소자의 편지를 밖의 친지들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당시 교도관들은 자신의 직업을 밝히기 꺼릴 정도로 열악했기에, 그 일로 금전적 대가를 받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하루는 한 교도관이 저에게 자신의 처지를 고백했습니다. 자신도 간혹 비둘기를 날리긴 하지만, 그 전에 꼭 대상자의 죄과를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가가 커도, 거짓말을 일삼는 ‘사기죄’를 범한 사람은 배제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사람과 상통했다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사달이 나므로, 사기꾼의 돈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교도소 내의 철칙이라고 합니다. 이후 저는 강의 중에 이 이야기를 전하곤 했습니다.
사기는 배신의 죄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크고 무거운 죄는 바로 하느님을 배반한 배교입니다. 초기 교회는 배교자들을 단호하게 공동체에서 격리하고 죽을 때까지 크게 뉘우치도록 조처했습니다. 말하자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스른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모순된다는 주장과 함께 신학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는 난제입니다. 이에 대한 종합적 결론은 자유를 지닌 인간이 그 자유를 남용한 잘못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자유를 훼손하는 행위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과 배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은총의 이 자유를, 4·19의 피와 희생으로 찾은 공동체의 고귀한 자유를 박정희는 군사반란으로 짓밟았습니다. 그 죄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신 하느님께 대한 배신이며 나아가 성령을 모독한 죄이기도 합니다. 물론 민족사적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비록 독재자가 부분적으로 자비로운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 자비는 잠언의 말씀과 같이 오직 잔인할 뿐입니다. 배신에 대한 이 신학적 선언을 우리가 늘 되새기고 역사 기도에 임해야 할 이유입니다.
저는 1965년부터 로마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국내에 있을 때보다 한국 소식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관에서 한 달이 지난 묵은 신문을 가져와 샅샅이 훑어보는 일은 우리 신학생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문을 보는 일이 매우 괴로워졌습니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혼돈과 실망뿐이었고, 신문의 행간에서 울부짖는 청년 학생과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5·16 군사반란으로 역사의 시곗바늘은 다시 뒤로 당겨졌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넘어 영구 집권을 꿈꾸었습니다. 이승만이 한 짓을 박정희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의 퇴행을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아프고 절망스러웠습니다.
1967년 대선에 두 번째로 나서면서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 공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거짓말이었습니다. 그 후 곧바로 3선 개헌을 준비했고, 1971년 3선 이후 바로 유신 체제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김형욱 회고록에 의하면, 1967년 대선 기간 중 사석에서 박정희는 “나는 절대 정권을 못 내려놔!”라고 실토했다고 합니다.
6·8 부정선거(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대대적으로 자행했던 이유도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원 정족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69년 1월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설레발을 치면서 3선 개헌의 물꼬를 텄습니다. 윤치영은 박정희를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이라 부른 희대의 아첨꾼으로 유명합니다.
야당과 청년 학생, 시민들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3선 개헌에 대놓고 반대하던 뜻 있는 젊은 국회의원들은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전국적으로 반대 투쟁이 일었습니다. 이에 위수령을 발동했고, 모든 학교는 교문을 닫았습니다.
3선 개헌 당시 헌법 개정안의 가결 정족수는 117명이었는데 공화당 의원은 총 109명이었습니다. 당시 정구영 국회의장이 개헌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확보된 찬성표는 108표입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 박정희는 공화당 108명, 유신정우회 11명, 신민당 3명으로 총 122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하고 9월 8일 국회에 개헌안을 상정합니다. 신민당 3명이라는 숫자에 놀라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의원 중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갔습니다. 이렇듯 어느 시대나 변절자는 존재합니다.
박정희 정권때부터 대구교구 변질
69년 3선개헌 앞장선 이효상이 원조
전두환 국보위땐 대구 두 신부 참여
독재 편들어 천주교회사에 오점 남겨
‘죽어야 부활’의 십자가 교훈 새기길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학생들의 저항을 철권으로 제압하고 끝내 국민투표로 개헌을 관철시켰다. 공화당 등 여권 의원들이 국회 별관에서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뒤 서둘러 빠져나가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국보위 참가한 대구교구의 이종흥, 전달출 신부
전국적인 개헌 반대 시위가 일어났지만 결국 9월 13일에 개헌안의 국회 표결이 선포되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신민당 의원들은 표결 저지를 위해 단상을 점거하고 반대 농성을 벌였습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에 다시 본회의를 소집하겠다고 밝히고 산회를 선언합니다. 여당 의원이 퇴장하고, 안심한 야당 의원들도 집으로 돌아가 단꿈에 빠져 있었을 이튿날 새벽 2시 50분,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너편의 국회 제3 별관에 불이 켜집니다. 그리고 주변 반경 500m를 1,200명의 기동경찰이 철통같이 에워싼 상황에서 날치기 통과가 이루어집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미처 의사봉을 준비하지 못해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3번 두드려 통과시켰습니다. 여기에 걸린 시간은 단 6분입니다. 당시 이 사건은 신생 언론매체였던 MBC 기자의 특종으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날치기 통과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이효상 의장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해온 학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런 그가 박정희 정권의 들러리로, 독재자의 앞잡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그는 “(대구) 이곳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으로 모시자”라고 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지역감정을 첫 등장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본래 가톨릭 대구교구장 서정길 대주교가 독재 정권의 들러리로 내세운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 이문희는 보좌 주교가 되고, 후에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대구는 원래 항일 재야 도시입니다. 3·15 부정선거 때 투표함을 몸으로 껴안고 지켰다는 대구의 야성이 박정희 정권을 기점으로 변질하였습니다. 어느새 대구대교구는 유신 교구, 어용 교구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일치의 가톨릭이 깨졌다는 사실입니다.
이후 대구대교구는 독재 정권과 밀착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대구대교구가 소유한 <매일신문>은 전두환의 언론 통폐합 정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대구교구의 이종흥, 전달출 두 신부는 국보위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입니다.
그러나,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앞장선 종교인도 있습니다. 한신대학교의 김재준 목사님입니다. 그는 문익환, 문동환 형제 목사의 스승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 역시 종교인의 책무라 여기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여실히 건설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생각을 높이 평가합니다.
177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교회로 달려가 성당 내의 성상들과 성물들을 파괴했습니다. 민중 속,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해야 할 교회가 귀족과 왕권에 결탁해서 높은 자리의 권력을 탐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와 신앙인이 제대로 살지 못하면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교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혁신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 특히 대구교구가, 죽어야 다시 태어난다는 십자가의 교훈을 깊이 새기길 바라며 함께 속죄의 기도를 올립니다.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길고 끈질긴 업보가 독재 정권으로 이어졌습니다. 2022년, 오늘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청산해야 할 과제를 더는 외면하면 안 됩니다. 친일과 독재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고통스러운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입니다.
불의한 독재 정권을 저지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한 정치인과 청년, 대학생을 기억하고, 하루빨리 불의한 과거와 친일 청산을 이루어 보다 투명하고 선명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또한 우리 가톨릭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참된 교회공동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자유의 은총을 잘 간직하며 선행을 통해 공로를 쌓겠습니다. 또한 이웃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공동선을 기초로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룩하겠습니다. 은총의 자유를 짓밟고 공동체에 해를 끼친 모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우며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은총과 자유를 잘 지키겠습니다. 그리하여 자유롭고 성숙한 시민 사회, 아름다운 민족공동체를 이룩하겠습니다. 모든 불의한 배신자들을 척결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