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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역경 속 이룬 ‘우리말 갈래사전’ 겨레 위한 뛰어난 성취죠”

등록 2022-03-28 19:38수정 2022-03-29 02:31

[가신이의 발자취] 박용수 선생님 영전에
평생 시인·한글학자·사진가의 삶
투쟁 현장 늘 카메라 들고 나타나
한국 현대사·문학사 사진 기록
‘우리말 갈래 사전’ 등 분류 사전
독보적 위상과 쓰임새 빼어난 업적
남북 겨레말 사전의 매개 역할

90년대 중반 고인(가운데)이 현기영(왼쪽) 소설가·이승철 시인과 찍은 사진이다. 이승철 시인 제공
90년대 중반 고인(가운데)이 현기영(왼쪽) 소설가·이승철 시인과 찍은 사진이다. 이승철 시인 제공

길거리 싸움이 한창일 때 누가 불러서 돌아보면 거기에 선생이 계셨지요. 어디 길거리뿐일까요. 문학 모임이라면 크든 작든 카메라 목에 두르고 반드시 나타나셨습니다. 그 시절 그때의 한국현대사와 한국문학사는 선생의 카메라에 의지하여 우리 역사의 주요 장면으로 남았지요. 선생께서는 쑥스러워하시겠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나 대단한 작업인지요. 그날그날의 현장을 빠짐없이 기록한다는 것은 고역의 연속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80년대 이후의 가투 집회와 점거 농성장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빼곡합니다. 그 난장판을 누비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무엇보다 튼튼해야 합니다. 선생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그 현장을 찾았지요. 그런 점에서 선생은 강골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난관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어쩌면 이는 청력을 잃게 된 이후 세상과의 고투에서 획득한 선생의 전과일지도 모릅니다만, 타협 없는 쟁투였다고 여깁니다.

선생은 시인이자 한글학자, 사진작가로 일생을 사셨는데 다 이와 같은 쟁투와 독학으로 이룬 성취였지요. 이런 점으로 보면 선생은 역경을 딛고 선 남다른 의지의 소유자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그 어떤 티도 내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기 삶을 실천해 갔을 뿐이지요. <겨레말 용례사전>을 편찬할 때 저도 일년여 선생과 같이 작업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중노동이었으며 살림살이 걱정으로 대낮이 캄캄했을 지경이었지요.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지원에 비해 들어가는 비용이 터무니없이 늘어났으니까요. 함께 일하고 있는 우리는 맘이 졸였으나 선생은 태평했습니다. 오늘을 살아내면 내일은 이길 수 있다는 투였지요. 낙관이 지나치신 것 아닌가 싶었는데 이는 우리가 선생의 겉만 읽은 것이었지요. 나중에 들으니 선생 자신은 돈 구하고자 백방을 떠돌았다고 하더군요.

박용수 전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
박용수 전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

더러 선생의 고집을 독학자의 독선으로 읽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선생의 한 면만을 취한 것입니다. 선생의 과장된 제스처와 큰 소리 속에는 부드러운 내면의 말들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떨린 말들이 선생의 시로 표출되곤 했다고 봅니다. 한데 안타깝게도 작품 산출이 적었지요. 평생 시인이라는 호칭을 가장 자랑스러워했지만, 사진과 사전 작업에 붙들려 시 창작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은 가끔 이 점을 후회하듯 언급하면서 제게 시쓰기를 강권하셨고 첫 시집의 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당시의 선생과는 의견을 조금 달리합니다. 선생은 사진으로 시를 쓰셨고 사전 편찬으로 시 작업을 수행하신 것이라고요. 역사적인 사진 시를 기록으로 남겼으며 갈래사전, 용례사전이라는 득의의 시적 영역을 개척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겨레를 위해 ‘나’를 던져 넣은 박용수의 사명감이라 여깁니다. 선생은 그야말로 선공후사의 참사람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런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사진 작업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한 사전 편찬도 시 쓰기도 선생에게는 다 공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이중에서도 특히, 분류 사전 편찬은 우리 겨레의 자산이랄 수도 있을 만큼 뜻 깊은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들고 간 <우리말 갈래사전>은 이후 남북 겨레말 사전의 매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말과 우리 얼 통일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지요. 박용수라는 개인이 나를 바쳐 이룬 공적 결실의 역작입니다. 지금 다시 살펴봐도 선생이 지어 펴낸 <우리말 갈래사전>, <겨레말 갈래 큰사전>, <겨레말 용례사전>은 그 위상과 쓰임새에 있어 독보적입니다. 한 사람이 이와 같은 일을 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요. 저는 한겨레와 통일을 위한 선생의 염원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성취를 이룩했다고 봅니다.

선생은 <겨레말 갈래 큰사전> 머리말에 이렇게 썼습니다. “통일은 오리라. 이 땅의 겨레라면 통일의 그날을 빈손으로 맞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통일맞이 큰 잔치마당에 올릴 술 한 동이 빚는 마음으로 겨레말갈래큰사전을 엮었다.” 선생의 말씀을 이어 저는 이렇게 적어두려 합니다. “평화 통일의 그날에 올릴 술 한 동이 빚는 마음으로, 남북 한겨레가 함께 겨레말큰사전을 반드시 펴내어야 할 것이라고. 이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삼가 여기를 벗고 저기로 건너가시는 박용수 선생님의 평안을 빕니다.

정우영 시인,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사진 이승철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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