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죽어 모압 땅에 있는 뱃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 모세는 죽을 때 나이 1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신명기 34,6-7)
“사람이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9)
모세는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첫 예언자입니다. 울부짖는 백성과 함께 아파하시는 공감의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살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깨닫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느보산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눈동자는 죽는 순간에도 맑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의 주재자임을 확신하고 고백하며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한 모세의 정신을 본받도록 호소하고 기도했습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의 상황을 빌미로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합니다.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를 허용치 않겠다는 살벌한 경고였습니다.
긴급조치 선포 며칠 전인 5월 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두 번째 담화문을 통해 “그동안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개해온 현실비판과 인권옹호 운동을 주교단이 책임지고 차원을 높여 정부와 직접 대화로써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빈말이었습니다.
교회 안팎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사제들은 줄기차게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과 언론자유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제들은 매달 모임을 통해 시국을 분석, 성찰, 종합하며 증언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주교단의 제동이 자칫 내분으로 비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처하면서도 결코 복음적 삶을 포기하거나 예언자적 소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1975년 후반기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내실을 위한 성찰과 재충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권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고 학생들은 계속 구속되었습니다. 게다가 김지하 시인은 사형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습니다.
1976년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주간입니다. 25일 가톨릭과 개신교 대표가 공동합의 형식으로, 김지하 시인과 학생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작명에 따르면 ‘원동성당 연합기도회 사건’입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더 큰 탄압으로 대처했습니다. 2월 말에는 대학교수 460명이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했습니다. 권력이 대학 강단까지 완전히 장악한 것입니다. 그 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뜻이 있어도 행동하지 못하는 암흑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요구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1976년 3·1절을 맞아 명동성당에서 구속자 석방과 인권회복 미사를 열기로 계획했습니다. 김몽은 주임신부께 미리 허락도 받았습니다. 당시 명동성당은 김수환 추기경의 묵인으로 개방적 분위기여서 우리가 원할 때는 언제나 자유롭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3·1절 미사를 계획하던 중 우연히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 목사님은 3월 1일에 뭘 해야 하는데 아무도 장소를 빌려주지 않는다면서 행사를 함께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1부에 미사를 봉헌하고, 2부 시간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일치의 지향으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배인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가 그날 강론을 해주십사 요청했습니다.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당은 700여 명의 신자로 가득 찼습니다. 그중엔 공화당의 이효상 국회의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승훈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하자 장내가 술렁였습니다. 김승훈 신부님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부당성과 언론의 책임,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힘주어 말하고 구속자 석방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모두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입니다. 장내는 흥분에 휩싸였고, 이효상 국회의장은 슬쩍 자리를 떴습니다.
긴급조치 9호의 암흑 깨트리기 위한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에 동참
김대중 서명에 노발대발한 박정희가
작은 모임에 ‘정부 전복 음모’ 덧씌워
덕분에 반유신 운동은 더 활발해져
3·1절 민주구국선언을 했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던 1977년 3월22일 이희호(앞줄 왼쪽)씨와, 2심에서 풀려난 안병무·이해동씨 등이 재판장까지 걸어서 가며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이튿날 ‘뉴욕타임스’에 보도됐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부 미사를 마친 후 김지하 시인 모친의 호소문을 문정현 신부님이 대신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제2부 개신교의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설교는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 문동환 목사님이 맡았습니다. 그는 신명기 34장 ‘모세의 죽음’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120세의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해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바랐던 일이지만 후계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박정희 정권이 노욕을 버리고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김승훈 신부님의 강론과 딱 맞아떨어지는 내용이어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어서 3부에서는 이우정 교수님이 3·1 민주구국선언을 읽었습니다. 긴급조치 철폐, 구속 인사 석방, 언론 · 출판 · 집회의 자유 보장, 의회정치 회복, 사법부 독립 등 5개 항을 요구하고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촉구했습니다. 이 선언문에 서명한 10인은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입니다.
미사는 별일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서명한 10인에 김대중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박정희가 알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순식간에 3·1 민주구국선언은 종교계와 재야인사들이 기획한 ‘정부 전복 음모’가 되었습니다. 서명한 10인을 포함해 총 20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습니다. 저 역시 저녁 미사를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가던 중 형사 수십여 명이 성당을 둘러싸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바로 삼양동 가는 버스를 타고 산동네에 있는 수녀원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형사들이 저의 사진을 들고 전국의 성당과 수녀원을 이 잡듯 다녔다고 합니다.
수녀원에서 이틀 머문 후 다시 응암동으로 돌아가 교우 할머니 댁에 은거했습니다. 저를 빼고는 입건된 모두가 잡혀갔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쓴 후 뒷담을 넘어 성당으로 들어가 미사를 집전하고 중앙정보부에 전화해 “저는 성당에 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성당을 지키고 있던 서부경찰서장과 정보과장 등 여러 명이 문책 해임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명동성당 미사와 3·1 민주구국선언은 소박한 행사였는데 박정희가 키워 준 측면이 있습니다. 정치인, 변호사, 교수, 목사, 사제, 여성단체가 포함된 민주화 투쟁은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하여 전 세계에 타전됩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법원이 정동에 있었고, 토요일에도 정상 근무하던 때였는데 법원의 모든 업무와 재판 일체가 중단되고 덕수궁과 시청 일대를 차단한 후 민주구국선언 관련자만 재판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진주, 홍성, 광주, 공주 등 여러 교도소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 또한 이 사건으로 2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체질이라, 천정이 높고 3~4월에도 천장에서 성에가 뚝뚝 떨어지는 서대문 형무소 생활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30대의 혈기로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감옥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새벽 ‘감옥의 영성’이란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저에게 감옥 생활은 성경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으며, 성서 속 고난과 사도의 이야기가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옥을 제2의 수련소라고 정의합니다. 다만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이후 종이와 펜을 주지 않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3·1 민주구국선언은 하느님이 만드신 절묘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큰 섭리를 저는 이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계획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일을 성취시키신다”(Homo proponit, Deus disponit)라는 성경 말씀과 라틴어 격언의 깊은 뜻을 되새기며 묵상합니다.
3·1 사건은 상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큰 의의를 지닙니다. 가톨릭 사제와 목사 등 뜻있는 이들의 작은 모임이 일파만파로 작용해 전국을 흔들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공포와 억압으로 침체되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깨고 각계각층이 연대하여 유신체제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이후 1976년의 활동들은 대부분 3·1 사건과 관련된 기도회로서, 신자들과 국민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새로운 전기를 이루었습니다. 11월에는 가톨릭농민회가 주체가 되어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듬해인 1977년에 ‘함평고구마 사건’으로 비화하여 농민운동의 토대가 형성된 해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46년 전의 민주구국선언을 다시 읽어봅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에 이르니 안타까움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120세의 모세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기약하는 성경 장면을 떠올리며, 진정한 용기와 선한 의지에 대해 묵상합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 홍익인간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3·1 순국선열들을 기립니다. 민(民)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포한 3·1 독립선언은 왕 중심의 왕정제도를 넘어선 만민평등의 혁명선언입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공공성을 함께 확신하며 고백합니다. 시대의 쳇바퀴 속에서 저희가 결코 뒷걸음치거나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용기로 세상 한가운데서 민족과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 민주와 자유를 위해 멈추지 않고 전진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3·1 독립선언, 3·1 민주구국선언을 일상과 역사의 삶 속에서 재현하고 깊이 뿌리내려 남북의 평화공존을 실현하게 해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