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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6월 명동성당에 1만명 청년이 몰려들었다

등록 2022-06-20 10:00수정 2022-06-20 10:20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8) 6월 민주항쟁

호헌철폐 외치다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수도자들 5박6일간 시민 지키며 정권과 대화
결국 대통령직선제 개헌 6·29선언 이끌어내
6월 항쟁
6월 항쟁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마태오 7,7-8)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가 18,4-5)

초지일관이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신념을 지켜야 하며 끝까지 항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오10,22)라는 말씀과 상통합니다. 성경은 개인의 완성과 구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선익과 해방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삶이 그 예범이며, 불의한 정권과 독재자들에 맞서 싸운 열사들과 익명의 청년·학생·시민이 바로 선구적 실천자입니다.

1987년은 불의한 국가 권력의 탄압 속에 매일같이 이어진 구속 사태로 인하여 모두가 숨죽인 채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임계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포악한 군사정권, 무자비한 고문 정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가 권력은 물론 군사집단과 공공행정도 정의에 기초하지 않으면 결국 강도 집단에 불과하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 IV, 4』 말씀을 되새깁니다. 불변의 진리는 빛이 닿으면 어둠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속성은 거짓이고, 거짓을 퇴치하는 것은 오직 밝음뿐입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시민들.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시민들.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노태우, 분노한 시민들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습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됩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의 후계자를 위한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가 시동을 건 것입니다. 당시는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조작으로 온 나라가 분노와 울분으로 들끓었던 때입니다.

전두환 군부정권은 4·13 호헌 조치로 일체의 개헌 논의를 봉쇄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과 청년 학생들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6월 10일에 맞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수많은 시민이 참여합니다.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동시다발로 시위에 나선 것입니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경찰력이라 해도 이런 역동적 시위를 막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날의 행사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항쟁의 불씨로 타오른 것은 명동성당 농성 때문입니다. 6월 10일 을지로와 퇴계로 등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합니다. 사전에 2차 집결지로 명동성당을 정해 놓았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6시부터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물밀 듯 몰려왔습니다. 성당 안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학생들로부터 ‘해방구’란 말을 들었습니다. 성당은 본디 해방구이니 절묘한 은유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경찰들은 시위대를 독 안의 쥐라고 여기고 명동성당을 완전포위했습니다. 학생들은 농성을 계속할 것인지 해산할 것인지를 격렬히 토론한 다음 이를 찬반 투표로 정합니다. 그들은 비록 계획하지 않은 농성이지만 6·10 이후 새로운 투쟁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농성을 이어가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5박 6일에 걸친 피 말리는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0일 저녁 명동성당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와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했습니다. 민주화의 열기로 그득했으나 한편으로는 흥분, 분노, 증오가 뒤섞인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모습을 보였습니다. 입마개, 복면, 각목, 화염병 등으로 전열을 갖춘 시민, 학생들의 모습은 성당의 종교문화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소한 풍경이었습니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우리를 밟고 넘어가시오”

1987년 6월12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와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1987년 6월12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와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11일 아침이 되자 시위대는 성당 입구에서 도로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고, 성당에서 가져간 앰프와 스피커를 통해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경찰은 명동성당에 진입해 전원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성당 측은 이를 강경하게 거부했습니다. “강제 진압은 예수님께 총부리를 들이대는 것과 같다. 가톨릭교회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라고 천명한 것입니다. 예상 밖의 강경한 반응에 경찰은 한발 물러섰습니다.

서울교구의 젊은 사제들은 5박6일 동안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만일의 경우 경찰이 성당에 진입해 시민·학생들을 체포하면 함께 끌려가 증언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최루탄 세례 속에서도 많은 수녀님과 교우들이 명동성당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인간 방패가 되어 묵주신공을 바치며 시위대를 격려하면서 대치 중이던 경찰들도 위로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성모님과 경건한 여인들이 연상되었습니다.

당시 경찰 총수였던 권복경 치안본부장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명동성당에 들어가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권 본부장이 성당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티자 “왜 못 들어가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전국적으로 시위가 격화되자 군 병력 투입 직전 상황까지도 갔다고 합니다.

명동성당이 지닌 종교적, 도덕적 상징성이 군사정권의 폭주를 막았던 것입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이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국제 여론이었습니다. 특히 1988년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성당 진입은 상당한 부담이 된 것입니다. 올림픽 유치가 시민·학생을 지켜 준 것이니 참으로 묘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때의 명동성당은 전무후무한 보호소이자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성소였습니다. 청년, 학생, 시민, 상인, 초중고교생 등 남녀노소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곳에서 목청껏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농성 기간 중 전두환 정권과 명동성당 측의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6월12일 저녁, 가톨릭 신자이자 안기부 차장인 이상연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는 “시위대를 내보내 주십시오. 협조가 되지 않으면 공권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점잖게 경고합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님은 지금도 회자가 되는 그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가서 내 말을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해주시오. 공권력이 투입되면 내가 맨 앞에 누울 테니 나를 밟고 넘어가시오. 그다음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오. 그들을 모두 밟고 넘어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추기경님의 한마디는 총칼과 권력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한 권력자에게는 뜨끔한 경고였으며, 명동성당 안팎에서 시위를 이어가던 시민과 청년, 학생들에게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그 후 제가 협상 대표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안기부 차장은 “함세웅은 안 된다”고 했지만, 추기경은 그가 나서야 학생과 중재가 가능하다고 밀어붙였습니다.

1987년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1987년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사상자도 구속자도 없었던 5박6일

그 후 저는 조종석 서울시 경찰국장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만나 서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마침 조 국장의 조카 한 분이 수도자여서 비교적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안기부의 지시를 받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혜롭게 녹여 외형적으로는 서로 대치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며 일을 진행했습니다.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도 물리적 마찰을 피하려 최선을 다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안전하게 귀가했습니다.

하루는 고려대학교 85학번 법대 3학년 여학생 대표 이승홍이 군중을 이끄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잔 다르크 성녀와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며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여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많은 사람 앞에서 딸을 무섭게 야단치며 끌고 가려 했습니다. 저는 부녀를 사제관으로 모셔서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학생이 선생님의 따님이지만 여기서는 시민과 학생의 공적 대표이니 그렇게 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내일 안에 따님을 꼭 집에 가도록 설득할 테니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따님의 명예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 학생은 그날 늦은 밤 성당 후문을 통해 안전하게 귀가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대의 숫자는 줄어 마지막에는 200~300여 명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결사대였습니다. 성당 관계자는 물론 당시 시위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말조차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하루하루 힘겹게 버텼습니다.

이 기간에도 명동성당에는 혼인미사를 봉헌한 신랑 신부와 축하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경찰의 통제와 최루탄 때문에 큰 곤욕을 치루었지만, 시대적 아픔을 껴안고 이 모든 것을 기쁘게 녹여냈습니다. 6월14일은 주일이라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여러 차례 봉헌되었는데, 미사 전에 거의 모든 신자가 봉헌금을 시위대 학생들을 위한 격려금으로 모두 내놓았습니다. 6월15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 미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성당 안에 이렇게 갇혀 있지 말고 이 열기와 열망을 전국으로 확산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을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6월 15일 아침, 결국 시위대는 자진 해산합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12대의 버스에 학생들과 신부님들이 나눠 탔습니다. 학생들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성당을 떠나 시내로 나갔습니다. 5박6일에 걸친 명동성당 농성은 한 명의 사상자도 구속자도 나오지 않고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명동을 사수하고 더 강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다는 일각의 비판도 받았지만, 사제로서는 그것이 한계이자 최선이었습니다. 전쟁터와도 같았던 처절한 이 순간들은 명동성당이 공생과 공유를 실현하며 민족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가장 귀중한 체험이었습니다.

1987년 6월13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시위대가 성당 앞을 지나가는 신부를 박수로 축하하고 있다.
1987년 6월13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시위대가 성당 앞을 지나가는 신부를 박수로 축하하고 있다.

상계동 철거민, 계성여고 학생들…모두의 ‘연대’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은 뜻하지 않았던 큰 의미도 남겼습니다. 바로 연대의 힘입니다. 1987년 4월부터 명동성당 입구에서는 상계동 철거민들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6월10일 시위대가 성당에 들어오자 그들이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가지고 있던 냄비와 솥을 모두 내걸고 밥을 하고 라면을 끓였습니다. 학생들의 빨래도 해주었습니다. 성당 주변의 직장인과 상인들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성당 안으로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보내주었습니다. 특히 명동성당과 담을 맞대고 있는 계성여고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담벼락 너머로 자신들의 도시락을 넘겨주었습니다.

대학생들은 각자의 캠퍼스에서 연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서울교구의 젊은 사제들은 단식투쟁과 철야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시위대의 안전한 해산을 위해 날마다 미사를 올린 것은 물론입니다. 농성 기간에 명동성당 앞에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위대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외신 기자들이었습니다. 1987년 5월부터 홍콩과 도쿄의 외신 특파원들이 한국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마치 암묵적 약속이라도 있었던 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성당 앞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필연적”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국제적 언론의 힘을 확인한 계기였습니다. 이렇듯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모두의 공감과 연대가 6·29 선언을 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명동성당 농성은 전두환 군부 독재의 폭압에 스러졌을 수도 있는 6·10 항쟁의 불씨를 살려낸 풀무질이었습니다. 농성을 변곡점으로 6·10 항쟁은 지속력을 가지고 확장됩니다. 6월18일 열린 최루탄 추방대회에 150만 민중이 참여했고,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 때에 6월 항쟁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특히 6월 28일 부산 중앙성당의 미사와 그 후 사제들과 수녀님들의 거리평화대행진은 감동을 자아내는 장엄한 기도였습니다. 결국 6·29 선언을 통해 제5공화국은 종언을 고했고, 우리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을 통해,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이 광장을 밝히는 촛불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만민의 해방과 온 백성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큰 사랑과 십자가 죽음을 깊이 묵상합니다. 박종철, 이한열, 두 청년의 희생을 계기로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나 염원했던 민주주의와 공화의 가치를 되새깁니다. 저희는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끊임없이 두드리면 분명히 받고, 얻고, 또 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6월 민주항쟁으로부터 35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순국선열들의 열정, 6월 항쟁 시민·학생 주역들의 그 희생과 헌신의 불길로 저희를 더 뜨겁게 불태워 주시고 투신케 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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