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민간학술단체 정암학당에서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는 김진식(56) 박사는 서양 고전 전문 번역가이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기원전 65~8)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필명 김남우로 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키케로 연설문 선집 ‘설득의 정치’ 등 20권이 넘는 서양 고전과 고전학 연구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2019년부터는 한국연구재단 지원을 받아 로마 정치가 키케로(기원전 106~43)의 철학적 저작 13권을 번역하는 ‘키케로 철학적 선집 번역’의 책임을 맡아 이끌고 있다.
그는 라틴어 강사이기도 하다. 2005년부터 학당에서 시민·학생들을 대상으로 라틴어를 강의해왔다. 그가 지난해 3월 개설한 주 2시간 40주짜리 기초 라틴어 강의에는 모두 100명의 수강생이 등록해 26명이 완주했다. “그간 제 라틴어 강의를 들은 분이 500~600명은 되는 것 같아요. 코로나 전에 대우재단 후원으로 라틴어 시민강좌를 크게 열었을 때는 한해 200여명이 듣기도 했죠.” 지난 2일 서울 방배동 학당 사무실에서 만난 김 연구원의 말이다.
그가 라틴어 강의에 쓰려고 우리말 문법 구조를 염두에 두고 5년 전 집필한 라틴어 교재 ‘파불라 도케트’(아카넷)는 3천부 이상 팔렸단다. “40주짜리 똑같은 강의를 6년 내리 들은 분도 계시죠. 기초 라틴어를 마친 분들 중 일부는 로마 정치인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같은 라틴어 원문을 읽는 강독 프로그램에도 참여합니다.”
로마 시대 언어 라틴어는 중세까지 서구 세계의 공용어이었지만 지금은 사어(죽은 언어)로 분류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다. 동사나 명사의 격 변화도 복잡해 배우기 쉽지 않은 언어로 알려져 있다. “제 강의 모토가 라틴어로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라)’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좋아했던 말이죠. 라틴어 기본 동사 변화가 100종류라고 하지만 다 쓰이는 것도 아니어서 저는 변화 체계를 이해하면 전부를 외우진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최대한 외우는 강박을 줄이려고 하죠.”
그의 라틴어 수업 학생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직장을 다니거나 퇴직한 중장년층이 절반 정도이죠. 80대 의사 선생님도 계시고요. 20대는 10% 정도입니다. 라틴어를 배우고 싶은데 학교에서 강의가 개설되지 않아 학당을 찾아온 친구들이죠. 국내 대학 중 라틴어 강의가 개설된 곳은 5~6곳 정도입니다.”
수강생들은 어떤 생각으로 라틴어를 배우려고 하는지 묻자 그는 “동양 고전 ‘논어’를 읽으려는 마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고 답했다. “논어를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보잖아요. 라틴어 책도 마찬가지죠. 동양과 언어와 환경이 달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공동체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거든요.” 그는 라틴어 책을 읽다 보면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고도 했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도 같은 말이 로마 서사시 ‘아이네이스’(2권 354행, 살길 희망하지 않는 것은 패자의 유일한 살길)에 나옵니다. 라틴어 책을 보면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5백여명 수강…집필 교재 3천부 팔려 지난해 40주 강의 100명 중 26명 완주 후원·지원금 재원으로 수강료 안받아
‘아이네이스’ 등 서양 고전 20여권 번역 현재 키케로 선집 13권 번역 프로젝트 재작년 암 수술 뒤로도 주 7일 출근 “서양 고전문학 연구 토대 닦는 일”
그리스어와 견줘 라틴어 문헌의 번역 비율이 낮은 것도 라틴어 공부의 효용을 높인단다. “서양 고대철학이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그리스 책들은 꽤 번역이 되었어요. 하지만 스토아 철학 등 너무나 많은 로마 문학이 지금도 거의 번역되지 않았어요. 라틴어를 배우면 이런 책들을 원전으로 읽으며 지식을 쌓을 수 있죠. 제 수업을 듣는 시니어 한 분이 매일 아침 라틴어 원전을 읽는 일이 생겨 즐겁다고 하시더군요. 나이 들어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요.”
정암학당의 라틴어 강의는 지금껏 수강료를 받지 않았다. 학당 후원금과 대우재단 혹은 한국연구재단 지원금을 강의 재원으로 활용했다.
연세대 철학과 86학번인 그는 라틴어를 군 제대 후 학부 3학년 때인 1991년에 처음 만났단다. “김상봉 선생님이 연세대에 연 그리스어와 라틴어 강의를 석·박사 과정 선배들과 들은 게 시작이었죠. 그 수업을 들으면서 플라톤 등 고대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서울대 대학원(협동과정 서양고전학 전공)에 진학했어요. 대학원에서 라틴어 문헌을 많이 접하면서 관심 영역이 철학에서 문학으로 바뀌었죠.”
‘카르페 디엠(carpe diem)’(오늘을 즐겨라) 시구로 유명한 호라티우스의 서정시집을 처음으로 완역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라틴어 번역 작업을 이렇게 자평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쓴 ‘에세’를 보세요. 곳곳에 호라티우스 시구를 인용해요. 제 번역은 영어나 불어, 독어로 된 서양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의 연구 토대를 닦는 일이죠.”
그는 재작년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받으며 인생의 위기를 겪었지만 그 뒤로도 주 7일 학당에 출근해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키케로 선집 다음 프로젝트로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철학적 서간 번역(전 6권)을 학당 차원에서 계획하고 있어요. 키케로 연설문 상당수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요. 다 옮기고 싶어요. 국가는 시민을 보호해야 하고 시민은 시민을 도와야 한다는 키케로 사상이 담긴 연설문은 서양 세계가 지난 2천년 동안 공동체를 유지해온 힘의 근원이 뭔지 알 수 있게 해주죠.”
사실 그가 라틴어 강의에 힘을 쏟는 데는 서양 고전 문헌 전문 번역자를 키워보고 싶은 마음도 크단다. “지금 학당 연구원 주축이 80년대 학번 세대입니다. 그다음부터는 깔때기 모양으로 수가 확 줄어요. 외국어 번역자가 갖춰야 할 우리말에 대한 능력도 떨어지고요. 우려가 많이 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서양 고전 문헌을 공부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예전에 배우면서 들었던 고정관념이 깨져나가는 순간이죠.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을 두고 야만의 땅 갈리아를 정복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요. 책을 보면 카이사르가 멀쩡한 나라에 쳐들어가 폭력을 행사하고 망가뜨린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우리나라에선 ‘아이네이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가문을 칭송한 시로 흔히 알려졌지만 실제 보면 권력자들의 잘못된 폭력 행사로 로마 시민들의 인간성이 무너져내렸다는 비판으로도 읽힙니다.” 이런 깨달음은 그의 번역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이네이스’의 첫 행에 나오는 라틴어 ‘vir’는 남성이란 뜻인데요. 기존 번역본에서는 영웅으로 많이 옮깁니다. 저는 독자들이 최대한 고정관념을 갖지 않도록 ‘사내’라는 번역어를 썼어요. 사내란 말에는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어감도 있다고 생각해서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