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12일 부산항에서 미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 일본군 한명이 소지한 현금을 점검하고 있다. 일본으로 송환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은 민간인은 1000엔, 군 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이 상한선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사본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전직 농업기술원이 1946년 5월 맥아더 장군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우리 일가는 조선으로부터 귀환했으나, 집도 없고, 토지도 없고, 재산도 없어 완전히 거지가 된데다 암거래에 의한 물가고 때문에 고생스럽게 그날그날을 살아가야 할 형편입니다. … 아사지경에 있으니 각하께옵서 농사를 영농할 수 있는 개간지를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외국에 있는 재외자산을 담보로 해서 구호금을 융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직이 농업기술원인 이 일본인은 당장의 생활고로 연명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조선에 있는 동안 얼마간 재산을 모았는지 그것을 담보로 구호금을 융자받기를 원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인양자’나 조선으로 돌아온 귀환자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많은 경우 하루하루가 고단한 생활난과 굶주림이었지만, 그 배경과 원인이 달랐고, 대응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접수하고 이어서 병사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일본인 민간인들의 경우 이미 미군 진주 이전부터 부산을 통해 하루 4천명에서 6천명이 귀국했고, 점령군 당국이 일본인 송환을 책임지게 되는 9월 말까지 약 16만명 이상이 송환되었다. 패전에 따라 해외의 군인·군속과 일반인을 일본으로 귀국시킨 것을 일본어로 ‘히키아게’(引揚·인양)라고 하는데, 1945년 연말까지 남한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 인양자는 약 47만여명이다. 1945년 9월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을 약 66만명으로 추산한다. 43만5천명이 미군 점령지역, 나머지 22만5천명이 소련군 점령 지역에 거주했다. 이것은 약 17만9천명에 이르는 군인들을 제외한 숫자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세화회(世話?)와 함께 꽤나 신속하게 민간인 송환을 조직했고, 업무가 미군으로 이관된 뒤에는 미군이 세화회와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송환을 실시했다. 세화회는 재조(在朝)일본인들이 송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구호단체였으나 사실상 관민 합동으로 운영되었다. 1945년 연말까지 남한 거주 일본인들은 대부분 송환되었다.
1945년 10월12일 본국으로 송환되기 위해 부산항에 집결한 일본 군인들. 미 육군 병사들이 비허가 물품의 소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사본
1945년 10월12일 부산역 역사 안에서 일본으로 가는 귀환선을 기다리는 일본 민간인들의 모습.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인양) 민간인은 47만여명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사본
1946년 여름, 소련군은 북한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대거 남한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콜레라가 발생한 상태여서 미군은 이들 일본인을 주문진 임시수용소에서 6일간 머물게 하면서 이상이 없는 사람은 일본으로 송환했다. 강원도 주문진의 일본인 임시수용소 모습. 미국 국립문서관, 정용욱 교수 제공
“여성 속옷 속에 돈 감춰”
한 미군 장교는 부산항 1번 부두 출입문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면서 “조용하고 피동적이며, 항상 명령에 복종하고 굴종적인 일본인들이 공터에 걸터앉거나 엉성한 창고 건물에 들어가 생선, 밥, 콩, 그리고 보잘것없는 음식을 말없이 먹으면서 송환절차를 기다리다 일본으로 후송되었다”고 상황을 묘사했다. 굴종적인 태도로 송환절차를 묵묵히 따르던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배자의 위치에서 조선인들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누렸다. 그들은 갑자기 찾아온 상황 변화에 당황했지만 모든 수단을 다해서 식민지에서 모은 재산을 가지고 돌아가려고 했다.
“일본인 여성들은 일본으로 갈 때 소지품 검사에서 헌병에게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돈을 속옷이나 수통 속에 감춥니다.”
“부산에는 밀항선 회사가 많이 있습니다. 요금은 게시판에 붙여놓았는데 통상 1인당 150엔입니다. 밀항선을 탄다면 미군 헌병과 조선인 여성에 의한 검사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 세화회가 어느 선박회사가 비밀리에 출항할 것인가를 알려줄 것입니다. 세화회는 부산역 앞에 있습니다. 밀항선은 이달 16일과 17일, 그리고 18일에 각각 출발합니다. 추신: 지혜가 있으면 많은 돈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미군의 현금 소지 제한을 피하기 위해 밀항선을 많이 이용했다. 밀항선 이용 요금은 한 사람당 150엔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밀항선이 운영되는 사실을 미군은 일본인 편지 검열을 통해 파악했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년 11월3일에 작성한 <정보일지>(G-2 Periodic Report) 54호. 정용욱 교수 제공
“(일본)송환자가 1000엔보다 많은 돈과 소지품을 가지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밀항선이다. 어선들이 많아 그것을 해상이나 공중에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해변에서 육군이 그러한 밀행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미 해군 5함대가 수신한 1945년 11월12일자 무선 전신문. 정용욱 교수 제공
두 편지는 각각 부산에 사는 일본인이 서울에 사는 다른 일본인에게 보낸 것으로 미군의 서신검열에 포착되었다. 어느 편지나 어떻게 하면 많은 액수의 현금을 소지한 채 귀국할 수 있는지 그 수단과 방법을 알려준다. 모두 10월 중순 발송되었는데 그 시점에는 송환 업무가 전부 미군으로 이관된 뒤인데도 선박회사들이 요금을 게시해서 밀항자를 모집하고, 일본인 세화회가 밀항을 주선해준다. 밀항이 꽤나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가옥과 토지, 의류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서 현금화하려고 했고, 현금과 귀중품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가지고 갈 방법을 찾았다. 밀항은 미군의 검문검색을 받지 않고 많은 돈을 지닌 채 귀국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리로 세화회 일에도 관여했던 모리타 요시오는 종전 이후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황급히 가재를 팔아 귀환할 준비를 하는 일본인들의 추태를 ‘힘의 지배에 의지하여 조선을 상대했던 현실의 생활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고, 중일전쟁도 대동아전쟁도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패전의 주원인’이라고 탄식조로 술회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에게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대만인, 중국인 등 과거 식민지 출신자들과 외국인의 송환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임무 중 하나였다. 종전 전후 일본 거주 조선인 수를 대체로 200만명 안팎으로 추산한다. 일본 정부의 1940년 국세조사에서 일본 거주 조선인은 124만여명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노무동원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8년보다 약 45만명 증가한 것이다. 전쟁이 확대되고 징용으로 노무동원이 본격화하면서 종전 직전 7~8년 사이에 그 수가 두 배 이상 급증했다. 그들의 직업은 탄광·광산노동자, 공장노동자, 토건노동자, 일용직 인부 등이 가장 많았다. 점령당국과 일본 정부에 의해 조선인 공식 송환이 시작된 것이 1946년 4월이지만, 일본 정부는 그 이전인 3월 말까지 귀환한 조선인을 130만명으로 추산했고,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은 99만3천여명으로 집계했다. 주한미군은 1946년 1월 말까지 약 90만명이 귀환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미 공식 귀환 이전에 많은 조선인 징용자들이 자발적으로 귀환했다. 주일미군 민간통신첩보대가 검열한 나카가와기선회사의 1946년 11월16일자 편지는 그들의 당면한 사정을 잘 드러낸다.
“전쟁 중 사망한 조선인 선원들을 위한 배상금 지불에 관해 우리와 조련 오미야지부 사이에 계속되어온 협상이 중단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지부는 최후 수단으로 생존 가족들의 서류가 준비되면 자신들을 위해 본부가 소송에 나서줄 것을 위임했다. 그들은 이 사안을 연합군사령부 공보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면 우리는 엄격히 지시받은 대로 다시 협상을 시작할 것이다. 협상의 타결은 매우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우리의 지주회사인 오사카 상선회사도 이 문제에 대해 같은 의견이다.”
46년 조선인의 일본 밀항이 늘어난 까닭
조련은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 일본 거주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재일본조선인연맹이다. 이 단체는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권리 옹호를 내걸고 창설한 대중단체로, 일본인 세화회와 비슷하게 초기에는 조선인들의 귀환을 돕거나 잔류한 사람들의 생활권을 옹호하는 활동 등을 했다. 오미야지부는 아마 전쟁 중 사망한 조선인 선원 가족을 대신해서 나카가와기선 도쿄사무소와 배상금 협상을 했던 모양이고, 도쿄사무소는 이것이 선례가 될 것을 두려워해서 협상에서 완강한 태도를 유지하겠다는 취지를 본사와 지주회사 쪽에 거듭 확인해준다. 그들이 치른 노동과 희생에 대한 보상과 배상은 정당한 요구였고, 고국으로 돌아가든 일본에 남든 선원들과 그들의 가족이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귀국 동포들이 부두에서 맨 처음 맞닥뜨린 것은 미군의 방역작업이었다. 사진은 1946년 6월 인천항에서 귀환 동포들에게 미군이 디디티 방역을 하고 있는 모습. 미국 국립문서관, 정용욱 교수 제공
중국 베이징에서 배편으로 인천항으로 들어온 귀환 동포들이 1946년 6월5일 임시수용소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관, 정용욱 교수 제공
1945년 12월 점령군 당국은 홋카이도와 규슈에서 석탄을 채굴하던 조선인 탄부들이 그곳에 남아 계속 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두 곳에 각각 6만명씩 12만명의 조선인 탄부가 있었는데 그들이 작업을 중단하자 일본의 석탄 생산량이 6분의 1로 급감했고, 그곳에서 생산된 석탄은 남한 점령군에게도 필요했다. 조선인 탄부들은 조속히 고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고, 특히 그들이 그동안 종사했던 노예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지만 일본인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전까지 점령군 당국은 점령통치에 필요한 자원의 확보를 위해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 정부가 집계한 조선인 밀입국자 수치를 보면 공식적으로 귀환이 시작된 1946년 4월 이후 오히려 가파르게 증가했다. 1946년 4월만 해도 조선인 밀입국자 수가 600명 미만이었는데 5월 이후 급증해서 7월에 추산치 9580명을 기록했다. 월별 통계를 보면 대부분 5월에서 8월 사이에 일어났는데 밀항이 계절적으로 여름에 가장 많이 일어났고, 또 그해 여름 남한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던 사정을 고려해야겠지만 이른 시점부터 일본으로 환류하는 조선인이 많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고국에 생활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 사회경제적 혼란이 일본 못지않았던 조선에서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귀환자 상당수가 조선으로 돌아온 지 몇달도 되지 않아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1946년 4~6월은 식량사정이 가장 악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 정부 통계에 의하면 1946년 가장 많은 수의 조선인이 밀입국했고, 1947년에 대폭 감소했다가 1948년에는 다시 조금 증가했다. 1946~1947년의 밀항은 경제적 동기와 배경에 의한 것이 많았고, 1948년 이후는 경제적 동기와 함께 정치적 동기가 가세했다. 특히 194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은 많은 피난민을 낳았고, 피난민이나 항쟁 참가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본행 밀항을 택했다. 제주도는 식민지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던 지역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점령군 당국은 조선인들의 밀항을 ‘점령군에 유해한 행동’으로 파악하고 엄중히 통제했다.
일본에서 귀환하는 조선인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나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 또는 배상을 대부분 받지 못했다. 사진은 나카가와기선회사가 귀환 조선인들의 임금 지불 요구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내용으로, 재일미군 민간통신첩보대가 편지 검열을 토대로 작성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해방 직후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일본으로 다시 밀항하는 조선인들의 수가 1946년 4월부터 대폭 늘어났다. 일본 경찰의 통계자료에 입각해서 미 육군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공안과(PSD)가 작성한 도표. 정용욱 교수 제공
‘적산’ 대 ‘정당한 대가’
일본인 인양자와 조선인 귀환자들이 송환 과정에서 마주한 것은 점령군 당국에 의한 인원·물자의 이동과 통제였다. 점령군은 그 임무를 점령의 ‘필요’와 ‘편의’에서 바라보았지만 그 흐름 뒤에는 다 나름의 전사(前史)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인 인양자들이 현금화하기 위해 팔아치운 재산은 대부분 이른바 적산 또는 귀속재산으로 분류되는 것이고 일제의 오랜 식민지 지배와 착취의 결과물이었다. 반면 일제의 강제 노무동원으로 탄광과 공장으로 끌려가거나 남태평양으로 끌려가서 노예노동에 종사했던 조선인 귀환자들은 그들이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노동과 희생의 정당한 대가에 대해서 일본 정부, 기업들과 정산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어느 것이나 이후 일제 식민지배의 청산 과정에서 한국인들에게 이관되어 새 나라, 새 사회 건설의 자원으로 활용되거나 억압과 착취에 대한 배상으로 개인들이 돌려받아야 할 몫이었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그것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을 때 귀환자와 인양자들은 암시장, 밀항선과 밀수선이라는 또 다른 생활전선에 서 있는 자신들을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또 미래 세대는 이후 그것들을 역사적 과제 또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점령의 ‘필요’와 ‘편의’가 점차 짙어지는 전후 질서의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정치색을 띠기 시작하자 미군 점령하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것에 동승하거나, 적응하거나, 또는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