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한국역사연구회·한국학중앙연구원·한겨레신문사가 공동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주제 중 하나가 ‘고종 독살설’이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3·1운동의 ‘정서적 기폭제’가 되었던 고종 독살설이 확산된 과정과 이유, 독살설의 진위 여부, 당시 민중들이 바라본 조선 왕실의 위상 등에 대해 발표한다.
만세 날짜가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운집하는 고종 인산일(3월3일)을 염두에 두고 계획됐으며, 3월1일 새벽 서울 일대에 뿌려진 격문이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오호 통재라. 우리 이천만 동포여, 우리 대행태상황제(고종) 폐하 붕어의 원인을 아는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격문은 친일파인 윤덕영·한상학이 궁녀들에게 고종의 식혜에 독약을 타도록 사주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식혜 독살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일제 당국은 친일 신문들에 장문의 기사를 실어 식혜를 마신 다른 나인들은 멀쩡하며 고종의 사인은 뇌일혈이라고 해명했다.
당시 독살설이 번진 데는 조선총독부가 고종의 사망 사실을 즉각 공표하지 않은데다 서거 날짜도 하루 더 늦춘 1월22일로 발표했으며, 이후 염하는 자리(1월24일)에 있었던 한 상궁이 고종 시신이 심하게 부풀어 있었다는 등의 진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 고종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서술했으며,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2009년 독살이 확실하다는 논문을 발표해 논란이 일었다.
윤 학술연구부장은 정황상 독살로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 짚으면서도, 당시 일본·한국의 언론 보도를 근거로 독살설을 반박한다.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영친왕의 혼례(1월25일)가 목전에 있던 상황에서 일본 당국이 결혼식 연기 여부를 놓고 우왕좌왕하다 서거 공표 시기를 놓쳤고, 그러다 보니 사망 날짜도 정확히 밝힐 수 없었으며, 시신 수습이 늦어지면서 부패·피하출혈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고종의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민족적 저항감을 고취시킨 측면은 있지만, 시위에 나선 이들이 고종에 대한 충성심에만 머무르진 않았음을 역설한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잃게 만든 고종의 무능한 정치에 대해 비판적 정서도 강했다는 것이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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