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시달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맞아 1948년 8월16일 도쿄 황궁 앞 광장 및 히비야 공원에서 우익 및 좌익 쪽의 재일조선인들이 동시에 시위를 열어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관 원본, 국사편찬위원회 보관 자료
미군은 점령기에 일본인들이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총사령부에 보낸 수다한 편지를 여론 조사의 재료로 활용하여 <일본인 편지에 나타난 여론 개요>(Survey of Opinions Expressed in Letters by Japanese to Occupation Authorities)라는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작성했다. 미군은 기획된 여론조사보다 그 내용을 계측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없지 않지만 편지가 일본인들의 생각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민간정보교육국(CI&E)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청산과 민주주의 육성을 목적으로 신문, 방송, 연극·영화, 잡지, 도서의 검열은 물론 여론조사, 선전·홍보 활동에 이르기까지 일본 국민의 재교육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편지들은 최고 권력자를 향한 청원과 진정, 투서와 고발의 성격이 강했고, 식량난, 귀환 등 개인들의 이해관계와 관련한 주제가 전시기에 걸쳐 가장 많이 취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점령통치와 관련된 각종 현안에 관해 민심의 분포나 대중적 관심의 소재를 읽을 수 있는 척도 구실을 했다.
1946년 초부터 여름까지는 식량난이 편지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진 주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식량문제 못지않게 점령군과 그 정책, 일본 정부와 일본 정치, 천황제, 전범 등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보고서 작성자는 “대부분의 편지들이 일본 사회에 대한 불만과 일본 사회에 필요한 개혁을 구체화했고, 이것은 그 시점에서 개혁이 모든 일본인에게 가지는 압도적 중요성 때문이거나 또는 개혁에 대해 개인들이 실망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1946년 여름을 지나면서 편지 주제 가운데 ‘귀환’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하고, 그 후 계속 다른 주제들을 압도했다. 편지 수도 폭증했다. 미군은 전범 처벌이나 개혁 주장이 줄고 송환 청원이 급증하는 것을 지켜보며 편지가 ‘신문 편집자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서한’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귀환 청원이 대부분 소련 점령 지역인 만주, 북한에 있는 일본인에 관한 것이거나 중국, 동남아시아 각지에 있는 일본군 포로, 특히 B·C급 전범 처리와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편지의 폭증은 관련 단체가 발신자들을 조직하고 동원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미군은 추정했다.
1947년 8월15일 도쿄에서 열린 재일조선인들의 광복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입장 전 몸 수색을 받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관 원본, 국사편찬위원회 보관자료
어제의 적국인 미국을 예찬
일본인들의 편지에 나타난 ‘전후’는 어찌 보면 모순에 차 있고 이율배반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패배를 껴안고 점령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어제의 적국이었던 미국을 예찬하고 정서적 일체감까지 표명한다. 또 일본의 지배층, 특히 군인, 관리, 경찰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최고 전쟁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일왕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낸다. 전범 고발과 사회 전반의 개혁 요구가 빗발치는가 하면 전범재판에서 전범들에 대한 심리가 본격화하고, 또 해외 거주 일본인들의 송환 청원이 쇄도하기 시작하면서 지배자는 가해자, 국민은 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이 확산되고 온 사회가 슬그머니 전쟁책임을 부정해 버린다. 그리고 미군의 점령통치가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인들의 의식 또한 미·소간 냉전의 도래라는 전후질서의 새로운 국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간다.
가네자와(金澤)시에 거주하는 한 일본인이 1947년 1월 맥아더 장군에게 13쪽 분량, 9개 항목의 논리 정연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미농지에 등사된 편지를 1947년 3월 맥아더 사령부와 각 정당 의원, 주일 소련·영국·중국 대사, 신문사에 다시 전달했다. 그는 전후 질서 수립 방향을 미국이 원자탄 독점을 유지하면서 영국과 연합하여 소련을 굴복시키는 데 두고, 일본이 이를 위해서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포츠담선언과 카이로선언의 폐기,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이전 상황으로 복귀도 주장한다. 전후 국제정세와 일본의 재건 방향, 식민지 인식과 관련해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 이 편지는 발송 시점과 패전국 일본의 처지, 당시 국제정치 상황을 감안하면 황당한 얘기이나 당시 일본인들이 일본의 부흥과 국제사회 복귀의 조건들을 어떻게 구상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꽤나 의미심장하다. 필자의 주장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냉전이 격화하면서 미국의 대일정책이 일본의 부흥, 단독강화, 군사동맹의 구축으로 나아갔던 것을 감안하면 편지는 이후 미국 정부와 점령당국, 그리고 일본 정부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을 간파하거나 선취한 감이 없지 않다. 어쨌든 패전 후 채 2년도 경과하지 않은 시점, 냉전의 공개적 천명으로 알려진 트루만 독트린이 아직 발표되기도 전에 이러한 주장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조선인 46년 말 ‘생활권 투쟁’ 나서
일본은 되레 외국인등록령 강행
억압과 차별의 무국적 처지 빠져
1948년 10월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5차 대회가 열린 일본 교바시 시민회관에서 참석자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 대회장에 걸려 있는 인공기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일본 경찰이 개회 직후 제거하였다. 미국국립문서관 원본, 국사편찬위원회 보관자료
이 편지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냉전 질서 수립이 일본의 부흥을 필요로 하고, 그 연장선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가 회피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편지는 별도의 절을 할애하여 ‘조선민족에게 고했’다.
“종전 후 독립의 영예를 얻었다고 하지만 진정한 평화가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한 자는 일부일 뿐이고, 일반 인민은 빈곤한 자가 다수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의해서 병합되어 안정을 얻어 살던 때가 행복했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미군 진주 후 맥아더 사령부의 시정방침, 즉, 정의, 관용, 이해 기타로부터 배운 바 많고, 이를 모범으로 하여 종래의 잘못된 정책을 시정해서 진실로 공존공영의 열매를 거둘 필요성을 충분히 깨달았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와타나베 다케오(渡部武雄)의 1947년 3월 편지)
편지는 태평양전쟁은 이기적이고,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말하지만 전범 처벌을 연기해줄 것을 요구했고, 그런 면에서 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죄나 책임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전쟁 이전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부채의식도 전혀 담고 있지 않고, 오히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예찬하는 입장이다.
가네가와시에 거주하는 와타나베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편지 일부. ‘미국은 소련을 굴복시키기 위해 일본을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인은 일본 병합시기가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가네가와시에 거주하는 와타나베의 편지 겉봉. 정용욱 교수 제공
일본 여고생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그는 ‘조선인은 저속한 민족이며, 일본이 미워하는 러시아인과 흡사하다’며 차별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조선인은 일본인의 습관적 공격 대상”
1947년 8월에 한 여학생이 ‘조선인은 문화가 얕은 저속한 민족이고, 우리 일본인이 제일 미워하는 러시아인과 흡사하다’며, 난폭한 조선인을 처벌하고, 세계 평화를 건설해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를 점령군 당국에 보냈다. 나이 어린 소녀의 감정적인 대응으로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그 무렵 조선인을 사회적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나아가 공산주의자이자 정치적 위험요소로 지목하는 편지가 다른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일본 정부가 그러한 현상을 조장하는 태도를 취하며, 점령당국은 그것을 방조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여학생이 조선인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혐오감을 표출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한 조선인 청년이 미8군 감옥에 있는 동지에게 보낸 편지가 점령군 당국의 검열에 포착되었다. 이 청년은 왜 하필이면 해방 2주년 기념일에 감옥 안에 있는 이를 향하여 비감한 심정을 토로했을까? 또 수신인은 어떤 연유로 미군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떤 일이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들에게 일어났는가?
“(전략) 조선인의 생활권을 옹호하기 위해 요시다 내각을 향해 벌인 1946년 12월 집회 사건을 돌아보건대 우리 조선인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습관적인 공격에 의해 탄압 받고 있다. 우리 조선인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당신은 우리 조선인의 생활권을 보장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우리 60만 재일조선인들은 당신들의 재심 또는 사면과 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보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사건을 다룬 일본 관계당국은 우리 청원서를 단 한 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아! 불쌍한 우리 세 동지여.”(윤표원이 김기택에게 보낸 편지, 1947년 8월15일)
<일본인 편지에 나타난 여론 개요>는 재일조선인들의 편지도 자주 언급했는데, 재일조선인 처지의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보여준다. 조선인 공식 귀환이 시작된 1946년 4월 이전 시기에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조선인들을 해방시켜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 일본인들에 의한 조선인 박해와 전범 고발 등이 편지 내용의 주조를 이루었다면 공식 귀환 전후에는 귀국할 때 소지 금액을 1천엔 이상으로 늘려달라거나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모두 가지고 갈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 편지가 많았다. 조선인 편지는 귀환이 일단락된 1946년 여름 이후 뜸해졌다가 1946년 연말부터 다시 증가하여 1947년 전반기에는 조직적 동원의 느낌이 들 정도로 매달 수백통의 편지가 점령군 당국에 전달되었다. 그 시기 편지의 주요 내용을 시계열적으로 요약하면 ‘60만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옹호, 1946년 12월 궁성 앞 시위 중 체포된 교섭위원 석방 청원, 외국인등록령 반대’로 요약할 수 있다. 보고서가 요약한 조선인 편지 내용만으로도 이 시기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의 처지가 점차 악화되고,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 변화에 불안해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946년 12월2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재일조선인생활권옹호 전국대회’의 모습. 정용욱 교수 제공
1946년 12월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옹호 투쟁을 주도하다가 미 8군 감옥에 투옥된 김기택에게 보낸 재일조선인 윤표원의 편지. 미군이 요약한 것으로 ‘일본인이 조선인을 여전히 습관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용욱 교수 제공
일본의 미군총사령부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과 관련된 내용을 분석한 보고서의 일부. 재일조선인은 대부분 외국인등록증 사용에 대해 항의하고 있으며, 일본인은 재일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조선인 생활권 옹호 전국대회 탄압
편지에서 언급되었던 ‘1946년 12월 집회 사건’은 1946년 12월20일 재일조선인생활권옹호위원회가 주최한 ‘조선인 생활권 옹호 전국대회’가 대회를 마친 뒤 수상 관저 앞에서 시위행진을 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였고, 그것을 빌미로 옹호위원회 위원장 등 10명이 폭력 행위 등 위반으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국외 추방된 사건을 말한다. 일본 정부는 시위대가 경찰관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관저로 난입해서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발표했으나 주최 측 조사에 의하면 관저 안에 있던 경관들이 시위대를 향해 불필요한 간섭을 고의로 시도하고 모멸과 조소를 하여 이를 반문하는 청중들을 향해 경관봉을 휘두르고 권총을 난발하면서 혼란상태가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생활권 옹호운동이 성행했던 것은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을 단속 대상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점차 강화되는 등 조선인의 법적 지위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의식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편지 수신인 김기택은 생활권옹호위원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수상 관저에 조선인들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들어갔으나 이 사건으로 관저에서 체포되었다.
1947년 5월2일 일본 정부는 신헌법 시행 전날, 최후의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공포, 시행했다. 조선인이나 대만인 등 구식민지출신자를 외국인으로 취급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외국인등록령은 구식민지출신자의 추방과 식민지 지배의 책임회피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재일조선인을 거류자격조차 갖지 않는, 즉, 국제법상의 외교보호제도와 결부되지 않은 ‘무국적’ 상당의 ‘외국인’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재일조선인의 거주권과 법적 지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1946년 말부터 시작하여 1947년 전반기 내내 점령군 당국에 배달된 조선인들의 편지는 자신들의 생활권과 거주권 보호, 외국인으로서 법적 지위의 보장을 점령군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재일조선인의 권리 투쟁과 운동을 공산주의 세력의 획책으로 간주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동조했다. 재일조선인은 전전에는 포섭과 동화를 포함하는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었다면, 전후에는 배제와 관리를 수반하는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갔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