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⑦ 귀환동포들의 주거권 투쟁
1947년 7월 신당동 일대 주민
“주택 강탈 결사반대” 내걸고
미 헌병·경찰 맞서 집단 저항
원래 일본인 살았던 적산가옥
주로 국외 귀환동포들이 거주
“미군숙소 위해 퇴거” 통보에 반발
⑦ 귀환동포들의 주거권 투쟁
1947년 7월 신당동 일대 주민
“주택 강탈 결사반대” 내걸고
미 헌병·경찰 맞서 집단 저항
원래 일본인 살았던 적산가옥
주로 국외 귀환동포들이 거주
“미군숙소 위해 퇴거” 통보에 반발
해방 이후 국외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은 주택과 식량난 등 민생고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은 1948년 5월28일 만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한국인 소녀 한명이 인천에 세워진 귀환민 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에 소독을 당하는 모습이다. 귀환선은 엄격한 방역절차를 밟고서야 상륙할 수 있었고, 귀환자들은 방역사업의 일차 대상이 되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사본
1946년 9월 신당동과 청구동 등 일대 주민들이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보낸 탄원서. 미군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이 일대의 적산가옥을 미군 숙소로 삼겠다면서 이미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미군이 이듬해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으려 하자, 이듬해 7월 주민들은 이를 거부한 채 미군과 경찰에 집단으로 저항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서울 신당동 일대 주민들이 하지 중장에게 보낸 탄원서에 첨부했던 서명원부. 정용욱 교수 제공
북한, 만주, 동중국 등에서 38선을 통해 남쪽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개성에 마련한 난민촌에 들어오고(1947년 5월25일)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몸수색과 예방주사 접종 등 방역을 마친 뒤 주거지가 마련될 때까지 텐트에서 생활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사본
미군의 명도령을 거부하고 농성을 벌인 서울 신당동 일대 주민들의 시위 소식을 사진과 함께 전한 한성일보(1947년 1월17일)의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미군 오락가락 적산가옥 정책에
민생고·부정부패 등 사회혼란 가중 적산가옥 불하 서울에만 6만호 주민들의 명도 거부 이유로는 거주권의 자유를 침범할 뿐 아니라 이미 합법적으로 모든 수속을 하고 입주한데다 자녀 교육을 위하여 부근에 학교, 유치원, 교회 등을 부설하고 근 2년을 생활해왔는데 돌연 명도하라 함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근처 신당중앙시장과 같이 암시장을 생활의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지역에 주거를 갖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라는 것은 거주권뿐만 아니라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치였다. 7월16일자 <독립신문>은 농성에 참가했던 한 주민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조선의 소위 적산이라는 것은 일제가 36년간 조선 민족의 고혈을 착취한 유물(遺物)인 만치 적국이 아닌 조선에 있어서 일인이 남기고 간 재산을 조선의 입장에서는 적산이라고 보는 것은 정당할 것이나 연합국에서 이것을 적산으로 취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 해방의 은인인 미국 군인의 주택에 대하여는 우리가 힘 자라는 대로는 협력하는 것이 당연하나 들은 바에 의하면 금번 미군의 주택 1호에 150만원의 예산과 동민이 이주할 가옥 건축비로 매호에 수만 원씩을 계상하였다 하니 이 금액으로 적당한 장소에 미군 주택을 신축하였으면 우리의 주택을 뺏지 아니하더라도 넉넉히 될 수 있을 것이며 양쪽이 편할 일인데 기어이 민중의 원성을 사가면서 무모한 일을 감행하는 정책은 이해할 수 없다. 하여튼 수천 명의 사활 문제인 만큼 만일 타당한 해결이 없는 때에는 일대 불상사가 일어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수천 명의 주민이 운집하여 퇴거 명령을 집행하러 온 미군 헌병과 경찰을 쫓아낸데다 16일에는 양측의 충돌로 부녀자를 포함해 주민들 50여 명이 부상당하는 일까지 일어나자 이 사태는 남한 사회의 여론에 불을 지폈다. 맹렬한 반대운동과 이를 동정하는 인근 적산가옥 주민들의 호응으로 동정 여론이 점차 확대되자 공보부는 17일 재조사를 위해 명도령 ‘집행’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이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한국 사회의 여론이 들끓자 18~19일 한독당, 근민당, 한민당, 사민당, 조선공화당, 천도교청우당, 신진당, 독촉, 신한국민당, 민주한독당, 민주독립전선 등 16개 정당 사회단체가 회의를 거듭하였고 20일 “일개 국지적 사건이지만 현재 소위 적산가옥에 입주한 빈민이 기십만에 달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주거의 안정감을 주지 않고 반면 항상 철거의 철퇴가 위협하고 있다. 최근의 적산불하 문제로 서울 시내 6만 호를 비롯한 남조선의 무수한 세궁민이 강제철거의 운명에 당면하고 있는 이때 미군 및 군정당국은 전면적으로 이를 신중 고려하여 이러한 민족적 사회적 불상사가 발생치 않도록 절실히 요청한다”는 취지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해방 이후 일본, 중국 관내지역과 만주 등 국외에서 귀환동포들이 쇄도하고, 또 38도선 이북에서 내려오는 월남민도 점차 늘어가자 남한 사회는 민간 차원에서 각종 원호단체들을 조직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구호와 원조를 제공하기도 했으나 쏟아져 들어오는 이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동포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가장 긴급한 것이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 문제였고, 다음으로 그들 스스로 호구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 가운데 다행히 돌아갈 고향이 있거나 부쳐먹을 땅덩이라도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서울 등 대처에 집거하며 생활수단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큰 도시마다 넘쳐났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에 그들을 수용하여 귀환동포와 전재민, 실업자의 주택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미군정도 그러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서울 남산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신식의 ‘문화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식당과 욕실, 화장실을 실내에 설치한 문화주택은 당시 최고급 주택이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남산 아래 회현동 부근의 주택단지. <일제 침략 아래에서의 서울>
일제강점기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산기슭이나 하천변 등에 임시로 지은 토막에서 비참하게 지내야 했다. 가마니로 둘러친 토막의 모습. <일제 침략 아래에서의 서울>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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