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가을 풍년을 기록했으나, 이듬해 초부터 전국에서 쌀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식량위기가 발생했다. 미군정이 도입한 ‘미곡 자유시장’제와 최고가격제에 편승한 모리배들의 매점매석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사진은 1946년 7월6일 밤 굶주린 군중들이 부산의 식량배급소에 난입한 장면.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
1946년 봄에 식량부족 사태의 책임을 물어 해당 부서 관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편지 한 통이 미군 정보당국의 서신 검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내용은 서울 욱정(旭町), 현재의 회현동1가에 살던 강철봉이 서울시 군정청 농상공부 부장에게 부친 3월26일자 편지의 일부다.
“식량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오. 당신은 쌀 부족으로 인해 서울 시민들이 일주일 이내에 전부 굶어죽게 생겼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 당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최고가격제를 철폐하고, 쌀을 매점매석한 자들이 감춰둔 쌀을 내놓게 하시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일주일 안에 자유롭게 쌀을 얻게 될 것이오. 당신의 결정을 라디오 방송으로 알리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나는 당신 주소를 잘 알고 있소.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우리 삼천만 동포는 하나같이 나처럼 쌀을 배급받기를 원하고 있소. 심지어 일제 치하에서도 최고가격제가 발효되자마자 나는 1939년 4월 하순 이래 매일 정량의 쌀을 배급받았소.”
서울 회현동에 사는 강철봉이 미군정청 농상공부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요약한 미군의 첩보보고서. 그는 “쌀 배급이 이뤄지지 않으면 당신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협박조로 편지를 썼다. 정용욱 교수 제공
1946년 3~4월 식량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전국 각지에서 점령 당국을 향해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시·도별로 각 동 동회장(일제 때의 정총대(町總代))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식량긴급대책회의를 조직하는가 하면 심지어 굶주린 사람들이 직접 식량창고를 습격하는 사태가 빈발하는 등 그야말로 민심이 흉흉했다. 흉흉한 민심을 고려하더라도 위 편지는 한편으론 험악하고 다른 한편으론 절박하다. 편지는 담당 관리에게 목숨 내놓고 일하라고 공공연하게 협박하고 동시에 식량위기로 아사자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또 조속한 쌀 배급을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삼천만 동포 모두가 원하고 있다며 절박함을 감추지 않는다.
미군정 직원도 쌀 못 구해 이직 고려
식량부족 사태는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었고, 점령군 당국도 사태를 잘 알고 있다. 편지 검열을 담당한 미군 민간통신첩보대의 2월 하순 보고서는 쌀 부족 현상에 대한 불만이 계속되고 있으며, 보통 사람이 생존하기에 충분한 쌀을 얻을 수 없음을 불평하고 많은 사람이 기아 상태에 있음을 말해주는 여러 통의 편지를 검열했다고 적었다. 서울 신설정에 사는 이상호가 2월18일 자유신문사에 보낸 아래 편지는 그 전형적인 사례다.
“심지어 일제 통치하에 있을 때도 우리는 하루에 1파인트의 쌀을 배급받았다. 그러나 이제 조선은 해방되었다. 작년에 충분한 쌀을 수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쌀을 구할 수가 없고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다.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려면 최소한 일본인이 우리에게 배급하던 쌀의 절반은 주어야 한다. 정치가들은 이 상황에 도대체 무관심하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어떻게 식량을 확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서울 신설동에 사는 이상호가 <자유신문>에 보내는 독자 편지를 검열해 그 내용을 요약한 미군정의 첩보보고서. 그는 “일제 때보다 배급이 적어 기아선상에 있다”고 적고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1파인트는 두 홉 반 정도의 분량이다. 이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미군정 정보보고들은 이미 2월 초부터 서울의 쌀 부족 사태가 심각하며 모든 신문이 군정의 우유부단한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연일 경고음을 냈다. 앞의 편지는 식량위기가 실무 담당자 때문에 초래된 것처럼 쓰고 있지만 아마 편지 작성자도 그것이 실무자의 태만과 부주의로 빚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식량부족 사태의 원인으로 쌀의 매점매석을 꼽고, 사재기로 사라진 쌀이 풀린다면 당장이라도 식량부족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편지들은 식량부족 사태와 관련해 점령군이 취한 대책 또는 무대책에 대해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두 편지 모두 미군의 점령통치가 일제 때보다 못하다고 야유한다. 뒤의 편지는 정치가들의 무관심을 힐난한다. 심지어 민간통신첩보대의 보고서는 편지 검열 업무에 필수적인 한국인 직원들조차 쌀을 구할 수 없는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2월26일 첩보대장에게 편지를 보내 월말까지 쌀을 구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는 사실을 적었다. 쌀 문제가 군정기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고, 미군의 점령통치는 남한 진주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위의 편지에도 나오지만 필자가 젊었을 때 조모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자면 해방된 해는 대풍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들도 한결같이 전해가 풍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귀환동포의 귀국으로 인구가 갑자기 크게 늘어난 것을 고려하더라도 식량의 절대적 부족 때문에 기아 사태가 초래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식량부족 사태가 자연재해나 생산량 부족으로 초래된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쌀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식량위기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고, 당시의 조건과 맥락에서 어떤 현실적 타개책이 가능했을까?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 여운형의 주도로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식량문제에 대해 나름의 뚜렷한 대책과 전망을 가지고 식량배급을 준비했고, 또 그 정책을 유지했다. 여운형은 8월15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와 회담하면서 정치·경제범 석방과 함께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해줄 것을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으로 제출했다. 건준은 미군정이 수립된 뒤에도 군정청 농림부장에게 식량대책안을 건의했다. 건준의 식량대책은 성공적이었으며, 미군정이 1945년 10월 식량 배급통제 체제를 해제하기 전까지 식량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급되었고 쌀값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배급제 부활했으나 나눠줄 쌀 없어
그런데 미군이 진주한 지 한 달 뒤인 1945년 10월5일 일반고시 1호로 ‘미곡의 자유시장’ 건을 공포했다. 이 법은 일제가 1942년 이후 실시하던 식량통제정책과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던 식량배급제를 폐지함을 의미했다. 이 조치는 가뜩이나 심상찮던 물가등귀 현상을 가속화시켰고, 시장에서 쌀 품귀 현상을 초래했다. 해방 직후 물자 유통은 급격한 생산의 위축 속에서 전시 비축물자의 방출에 의지했다. 그런데 해방 전후 조선총독부의 조선은행권 남발, 해방 이후 미군정의 통화팽창 정책으로 통화량이 급증하여 물자는 급속히 고갈되는 한편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그 과정에서 지주와 상인들이 쌀을 매점매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에서 쌀이 사라지자 소비자들은 돈이 있어도 쌀을 살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부딪혔다.
“식량의 밀수와 밀매를 고발하자”는 미군정청의 식량 포스터(1945~6년 제작).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
쌀값이 치솟자 미군정은 1946년 1월1일부터 쌀 한 말에 38원을 넘지 못하도록 최고가격제를 실시했다. 이 조치는 쌀값을 잡기보다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시장에서는 쌀이 사라지고 불법거래만 부추기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당시 신문들은 애국심을 환기하는 것으로 쌀의 사재기를 막지는 못할 것이라며 당국의 조치를 비웃었다. 식량배급제가 폐지된 뒤 11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식량부족 사태와 식량위기 현상은 1946년 1월부터 본격화해서 3월에는 주민들을 일상생활 자체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렸다. 1946년 초 도매 쌀값은 한 가마니당 1월 1800원, 2월 3천원, 3월 5800원이었고, 소매 쌀값 역시 한 말에 1월 180원, 2월 320원, 3월 600원으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미군정은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월부터 배급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수집미가 없는 상황에서 예정된 배급을 할 수 없었다. 1월8일 서울 시청 앞에 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쌀 시위를 하는 등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마침내 미군정은 1946년 1월25일 법령 45호로 ‘미곡수집령’을 공포했다. 스스로 자유시장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뒤늦게 1945년산 추곡의 공출을 시도했으나 공출 목표량 550만여 석의 12.4%를 겨우 수집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식량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대지주, 모리배의 매점매석과 함께 일본으로의 쌀 밀수출을 꼽고 있다. 사실 두 현상은 서로 연결된 것이기도 했다. 최근 연구 가운데 당시 식량위기의 원인으로 한국인들이 해방의 기쁨에 취해 쌀로 술과 떡을 너무 많이 빚어 먹어서 그런 사태가 초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대인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고, 옆에 앉아 있었다면 따귀라도 한 대 맞을 소리다. 경상도에서 쌀 기근이 특히 심했던 지역은 귀환동포가 쇄도한 부산 외에 경주, 포항, 울산 등 동남 해안 지대였으나, 이들 지역은 쌀 일본 밀수출이 활발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쌀 쌀 쌀을 달라는 함성’이라는 제목으로 전날 부산에서 있었던 군중 수만명의 식량난 항의 집회 소식을 전하는 1946년 7월7일치 <부산신문>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미군 병사까지 동원한 강제 공출
쌀의 일본 밀수출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심지어 일본의 재일조선인연맹 오사카 지부가 1946년 1월23~24일 양일간 개최한 회의에서 고국의 굶주리는 동포들을 위해 조선으로부터 쌀 밀반입을 막을 것을 당면한 활동 목표의 하나로 제시할 정도였다. 미군정은 식량위기가 격화하자 쌀의 지역 외 반출을 금지하는 등 공출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으나 그러한 조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점령기 내내 미군정 정보보고서들은 쌀의 밀반출을 빈번하게 보고했고,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49년, 1950년까지도 쌀 밀수출은 계속되었다. 해마다 햅쌀이 나오는 가을이 되면 쌀 밀반출을 방지하기 위해 해안경비대는 해안 순찰과 경계를 강화해야 했다.
한마디로 그 당시 쌀은 일본, 중국, 조선 3국 사이에 진행된 밀무역에서 조선산 상품으로는 가장 경쟁력이 있고, 수요도 많았다. 또 일본이나 중국에서 쌀을 팔아 다른 필수품 또는 사치품을 밀수입해 오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모험적인 선주나 생계형 밀수업자가 쌀 밀반출에 나섰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식량위기에 주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쌀 밀수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보는 자는 출하할 수 있는 쌀을 넉넉하게 가진 대지주나 농민들이 등으로 져다 파는 쌀을 사서 긁어모을 수 있는 매집상들, 즉 당시 표현대로라면 모리배들이었고, 여론의 지탄 대상이 되었던 것도 그들이었다.
1945년산 추곡 수집에서 낭패를 본 미군정은 1946년산 하곡 수집부터는 지방행정기관뿐만 아니라 경찰, 우익단체, 때로는 무장한 미군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가택수색과 검문, 검색과 처벌 등의 강압적 방법을 사용하여 곡물을 공출했다. 하곡은 일제도 공출을 삼갔던 만큼 하곡 수집과 공출에 동원된 강압적 방법은 점령군과 농민 사이에 긴장감만 높여갔고, 농민들은 10월항쟁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미군은 10월항쟁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서 사후에 대구지역 저명인사 19명을 개별적으로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군정의 양곡수집정책, 비효율적인 쌀 배급, 공출 과정에서 경찰이 보여준 임의적이고 잔인한 수법, 배급 과정에서 경찰과 관리의 부정과 부패 등 미군정 식량정책의 실패를 우선적으로 지적했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