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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역사학계 “문재인 정부 ‘임정 정통론’은 냉전의식 강화” 비판

등록 2019-04-14 14:52수정 2019-04-15 16:51

진보 역사3단체, ‘임정 법통론’ 비판
‘역사전쟁으로 임정 법통론 강화’ 지적
“임정 법통론은 남북 대결의식 고취”
“역사학이 국가주의의 도구로 전락해”
임종명 전남대 교수(사학과)가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근대 정통론과 기원·계보의 정치’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임종명 전남대 교수(사학과)가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근대 정통론과 기원·계보의 정치’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보수, 개혁 집단 모두 집권 세력이 과도하게 역사인식에 개입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한 역사학자가 말한 ‘선한 정치권력이라도 역사 오용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을 고민해봐야 한다.”(이용기 한국교원대 교수)

진보적 역사 3단체가 문재인 정부의 국가·민족주의적 역사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문 대통령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두고 “건국 백년”이라 말하고,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1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 다른 ‘임시정부 신성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주최 단체들은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취지문에서, 우파의 반공주의적 1948년 건국설과 문재인 정부 및 일부 ‘진보’학계의 ‘임시정부 법통론'에 기반을 둔 1919년 건국설 모두를 두고 “서로 다른 기원을 근거로 양자가 벌이는 정통성 경쟁은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역사전쟁”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우리는 임정 수립 100주년을 기점으로 ‘건국 백년'이 운위되는 것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낀다. 이는 학계를 포함해 공론장의 충분한 논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인 것이 분명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3·1운동의 마땅한 계승자들인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이주 노동자들이 국가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역사가 현실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한 해방의 계기가 아니라 그 합리화와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학)의 종말이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진행 중인 상설 전시관 개편이 학계와의 소통이 없이 진행되고, 해방 이후 한국군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심으로 출범한 사실을 외면하고 “육군사관학교의 역사적 뿌리도 100여년 전 ‘신흥무관학교’에 이른다”(문 대통령)고 한 역사 인식도 문제 삼았다.

주제발표자로 나온 이용기 한국교원대 교수(역사문제연구소 소장)는 “과거 ‘진보’ 역사학계는 임정 법통론을 비판해왔다. 하지만 건국절 논쟁이 진행되면서 ‘진보’ 역사학계는 침묵 속에 방관하거나 1919년설에 동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임정이 국가로서 갖추어야 하는 요소와 실천에선 제한적”이었다며 “1923년 국민 대표 회의 이후에는 대표성에도 한계를 나타내 전체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아우르는 독립운동의 최고지도기관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애초에 임정 법통론은 해방 이후 이승만 등 우익진영이 주도적으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만든 정치 논리”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사회주의 세력 등 다른 독립운동을 배제하고 임정만이 유일하며 배타적인 정통성을 가진다는 논리는 “남북 대결의식을 고취하는 냉전적 논리를 강화”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사학과)는 역사교과서 논쟁으로 정사·정통론이 강화된 상황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국사학계의 일제 식민지 시대 연구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탈근대주의적 역사인식 등이 대두하며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화되는 추세에 있었다”고 짚었다. 하지만 “역사논쟁이 과잉정치화되면서 오히려 역사 논의가 더 협소해지고 단순해지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면서 “역사학계가 보수세력의 공세에 방어적으로 대응하며 민족주의의 방패 뒤로 숨는 모습을 보여왔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다원적인 국가에서 ‘단일한’ 역사서술, ‘올바른’ 역사서술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1999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연방수상이 “독일인 모두가 통일적 역사상을 지니는 것은,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한 개방된 민주사회에 전혀 적합한 일이 아니다”라고 한 연설을 인용했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사학과)가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학술회의에서 “‘역사전쟁’을 성찰하며”란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사학과)가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학술회의에서 “‘역사전쟁’을 성찰하며”란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종합토론에선 주제발표를 두고 다양한 지적이 나왔다. 특히 국가가 역사에서 정통성을 찾고, 이를 다수 국민이 지지하는 상황을 두고 역사가들은 비판만 하는 것이 옳으냐는 반론이 제기됐다. 토론자로 나온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20여년 동안 ‘임시정부 법통론’을 극복해내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왔음에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내몰려 어느 순간 스스로가 소위 ‘임시정부주의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나 자신은 상황 논리 하에서 정말 비겁했다”며 ‘자아비판’을 했다. 하지만 윤 교수는 “국가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정통론을 내세울 텐데, 역사학자들이 ‘정통론은 틀렸다고’만 말한다고 무슨 문제가 풀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다시 역사학자들이 비겁하게 행동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정일영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도 “왜 대중이 정부의 역사 드라이브를 지지하고, 역사 정통론에 매료되고, 기꺼이 역사전쟁에 참전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칫하면 대안 없이 비판만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병욱 고려대학교 교수(민족문화연구원)는 “시민·대중이 국가의 역사 정통론을 선호하는 이유는 역사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정통론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자존감을 주는 역사 서술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족주의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에 관해서도 토론이 벌어졌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는 “역사 3단체가 (단체 설립 정신인) 민중사학, 실천적 역사학이란 민중·통일 민족주의를 지금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누구 마음대로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반박했다. 그는 덧붙여 “극우 세력과 역사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5·18 관련 망언을 해도 제지할 수 없고, 친일 문제 대응도 무기력한 상황이다. 여전히 수구적 역사로 퇴행하려는 기도는 의회와 언론을 거점으로 강력하게 이뤄지고 있다. 칼끝을 돌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등 일부 보수 언론은 이번 학회를 두고 ‘임정법통론에 10년간 편승한 좌파 역사학계가 임정 100주년 다음날 임정을 비판했다’며 진보 역사학계가 ‘돌변했다’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학계에선 이번 행사가 진보적 역사학계와 문재인 정부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학자들의 세대별 인식 차이를 드러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뉴라이트 학자들과 연합해 건국절을 공식화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역사전쟁’ 국면에서는 소장 진보 역사학자들이 임정 정통론을 비판하면 자칫 정부 쪽에 힘을 실어주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치열한 ‘역사전쟁’이 잦아들면서 학문적 논의를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고 보는 게 맞다는 것이다. 학회를 기획한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선배 역사학자들은 민족주의적 역사학을 추구했지만, 이번 학회의 주축이 된 역사학자들은 탈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세대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역사학이 국가·민족주의에 회의적인 흐름으로 바뀌었기에, 국내 역사학계에도 세대 간 관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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