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듬해인 1946년 초부터 전국에서 식량난이 심각하게 발생했다. 이에 미국은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을 식량조사관으로 임명해 점령지역에 보냈다. 1946년 5월4일 서울의 미 군정청에서 후버 전 대통령이 미군정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오른쪽)과 함께 서 있다. 왼쪽은 하지 중장의 통역을 맡았던 이묘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
시 ‘불놀이’의 작가 주요한이 해방된 지 두어 달 뒤인 1945년 10월23일 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미군 정보당국은 이 편지를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전문을 미 육군 제24군단의 1945년 11월6일자 ‘일일정보보고서’ 57호에 별첨했다.
“며칠 전 한 미군 장교가 왜 한국인들은 모두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다투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이 잠시 정치를 접고 동포들을 먹이고 입혀서 이번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서 일해야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현실적이고 시의적절한 문제 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가 기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안정되지 않으면 산업의 번영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외국 군대의 후견하에 있는 이 땅의 혼란과 불안은 시정(施政)이 어느 정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만 진정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태가 수습될 수 있을까요? 단순히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잘해야 했습니다. 다만 우호적인 해방자들에게 세상 대부분의 신생국 사정이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고 싶을 뿐입니다. 인도, 중국, 발칸 제국, 폴란드, 심지어 프랑스조차 정쟁과 감정적 갈등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
미국인들이 오로지 이 나라를 해방시키겠다는 목표에 충실하고, 또 각 부서장들과 도지사, 시장의 자리에 앉아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군정의 시정은 선의에 입각해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첫째, 미국인들은 한국어로 얘기하지 못합니다. 통역의 도움이 있어야 행정 업무를 펼 수 있지만 그들의 역량으로는 그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장교들은 한국인 관리들을 모릅니다. 적당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임명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중략)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충언은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집을 돌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군정장관 아널드를 대신하여 조선인 지도자들 중 어느 누구라도 임시민정장관으로 임명하십시오. 이승만 박사도 좋고, 임정의 김구, 인민위원회의 여운형, 한민당의 송진우, 국민당의 안재홍, 미국에 있는 서재필, 김규식 박사 어느 누구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고, 그들 중 누구라도 적임자입니다. (중략)
물론 우리는 매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정당과 파벌 간의 투쟁은 물론 이합집산이 계속될 것입니다. 다툼과 심지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끝내 한 차례 또는 수차례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결국에는 일군의 인사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겠지요. (…) 중요한 것은 조선인 민간행정이 지금 이 순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 나라에 10년간 주둔할 겁니까? 아닐 테지요. 그렇다면 그 대안은 위에서 제시한 대로입니다. 외국 군대의 시정이 계속되는 한 인민의 통합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도가 그 좋은 사례입니다. (…) 우리는 요람 속에서 무한정 보호를 받는 대신 비틀거리고 다치더라도 혼자 걷기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략)”
시인인 주요한은 1945년 10월 하지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군의 직접 통치 실패를 비판하면서 “한국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돌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한의 편지를 번역한 미군정청의 내부 문서. 정용욱 교수 제공
주요한이 하지 중장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한 미군정청의 내부 문서. 정용욱 교수 제공
“민생보다 정치가 기본”
점령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정중한 편지이고, 예의를 갖추어 완곡하게 썼지만 의외로 주장은 단호하다. 편지는 미군정의 ‘통역정치’와 조선인 관리 등용의 실패를 에둘러 비판하며 민정장관을 미군 장성 대신 한국인으로 교체할 것을 직설적으로 요청한다. 그리고 주저 없이 민생보다는 정치가 기본이고 외국군 주둔 아래서 인민의 통합은 없다고 얘기하며, 영국 통치하의 인도를 생생한 증거로 들이댄다.
편지의 논조와 내용은 당시 주요한의 처지와 전반적인 정치상황을 고려하면 약간 의외이고, 음미할 만하다. 일찌감치 근대문학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주요한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경력은 언론인, 정치가, 경제인 등 다양했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일제 말 전시체제 아래서 문인 대표, 언론인 대표로 부일협력활동을 했다.
미군 사령관 하지는 진주한 지 일주일 만에 자신은 ‘언제 터질지 모를 화산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고, 남한 정세는 ‘불만 댕기면 폭발할 화약통’이라고 묘사하는 수선스러운 전문을 본국에 타전했다. 그는 독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정치적 열기에 매우 당황했고, 우후죽순 격으로 정당 단체들이 난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모들에게 한국인은 아일랜드인보다 더 정치적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군은 점령을 전후하여 38도선 이남의 영토와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이 미군에게 있음을 선포한 바 있지만, 아치볼드 아널드 군정장관이 1945년 10월10일 조선인민공화국(1945년 9월6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선포한 국가)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의 유일한 정부임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미군정이 단호한 태도로 재차 직접 통치를 천명하던 시점에서 주요한은 그러한 방침을 비판하며 한국인 지도자라면 이승만이든 김구든 여운형이든 그 누구라도 좋으니 그에게 민정장관직을 맡기라고 호소한다. 그는 정당과 정파 간의 정쟁은 불가피하고, 앞날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이 내전의 발발까지 거론하며 그러한 자체 정화 과정은 수십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리를 잡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 편지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지 불과 한 달 보름 뒤에 작성되었다. 미군정은 진주 이후 한국인들의 자치활동과 자생적인 국가건설 노력, 특히 진보세력이 주도하는 활동을 무력화시켰고, 그 무렵 귀국한 이승만 등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 중심의 정계통합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편지는 주요한의 정치적 성향을 다소 반영하지만 그가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서 편지를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일제 식민통치 기구의 계승, 부일(附日) 전력이 있는 조선인 관리와 경찰의 중용, 미군정이 보여준 비현실적 경제정책들과 그로부터 빚어진 혼란 등 출발선에서부터 삐걱거리는 미군정 점령통치의 난맥상을 수습하기 위한 비판과 제언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해방 직후 한민당의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고, 조선상공회의소 특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8년에는 대한무역협회 회장이 되었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점령기에는 정치와 다소 거리를 두었다. 과거 부일협력 경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 그는 1949년 4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45년 9월 한국을 접수한 미군은 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 등 한국인이 결성한 모든 정치결사체를 부정하고, 미군이 직접 다스리는 직접통치를 시작했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다 오락가락한 정책으로 미군정은 1946년 최악의 식량난 사태를 초래했다. 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선글라스 쓴 사람)이 1945년 10월20일 서울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회에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하지 오른쪽은 통역 이묘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
쌀을 달라고 서울시청으로 몰려가서 애원하는 공장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소식을 전하는 <중앙신문> 1946년 3월30일치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
군정, 쌀 배급 민간위임 거부
위 편지에서 음미해야 할 것은 민생과 정치의 관계이다. 식량위기에 대처하는 한국 사회와 미군정의 서로 다른 태도와 대응은 점령기에 양자의 관계가 가지는 성격과 의미를 잘 보여준다.
식량위기가 고조되던 1946년 3월말 4월초에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에서 ‘쌀 요구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을 주도한 것은 주민 자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정회(町會)와 그 연합조직인 정연합회였다. 정회와 그 하부 조직인 애국반은 일제하 전시체제부터 양곡 배급은 물론 인적·물적 동원기구 역할을 했는데, 해방 직후에는 자생적으로 조직된 청년단, 자위단, 치안대 등의 조직과 함께 치안 유지, 식량 배급, 식량 창고와 적산 관리 등의 기능을 수행했다. 정회와 애국반은 해방 이전 일제 통치기구의 말단에서 주민 통제와 전시동원, 식민지 수탈 기구로 기능했지만, 해방 이후에는 주민자치의 성격을 강화해 가면서 그 이전부터 해오던 양곡 배급은 물론 건국사업에 주민을 동원하는 구실을 했다. 당시 정당, 사회단체 등이 허다하게 조직되었지만 대중들의 참가율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고, 또 취업자보다 실업자가 더 많은 상황에서 정회는 주민과의 접촉면이 가장 넓은 강력한 동원조직이었다.
1946년 3월에 들어서면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크고 작은 모든 도시들과 직장 또는 학교 단위로 긴급식량대책회의가 연일 개최되었다. 서울에서는 3월28일 시내 각 정총대(町總代)와 대중단체 대표 50명이 모여서 식량대책긴급협의회를 개최하고, 서울시청과 군정당국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이 회의에서 군정청과 생필품영단이 소지한 쌀을 즉시 배급할 것, 서울 외부에서 소량의 쌀 반입을 인정할 것, 식량 수집과 배급을 민주주의적 대중단체에 맡길 것 등 4개의 결의사항을 채택해서 당국에 전달했다. 이날부터 주부들을 다수 포함한 군중들이 시청에 쇄도하여 ‘쌀을 달라’며 연일 시위를 벌였고, 4월1일에는 쌀을 요구하는 군중 3천명이 시청을 포위했다.
시위가 점차 격화하고 시민들의 압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미군정을 대표하여 아처 러치 군정장관과 서울시 식량대책협의회 대표자 김기도 외 4인이 4월3일 회동하였고, 그 자리에서 군정당국은 1인당 하루 1홉씩의 배급 실시를 약속하고, 자가용으로 소비할 소량의 미곡 반입을 허락했으나, 수집과 배급을 민간에 위임하는 것은 끝내 거절했다. 식량위기의 주원인이 모리배의 매점매석인 만큼 식량대책협의회는 민간 차원에서 그것을 감시하고, 쌀 수집과 배급에 주민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그에 대한 군정당국의 태도는 단호했다.
1946년 식량 부족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대구의 식량대책시민대회를 전하는 <영남일보>의 1946년 4월4일치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
식량위기가 정쟁 때문?
부산에서도 경남신문기자회 주최로 3월9일 식량긴급대책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총대들, 정당 대표, 노동조합 등 대중단체 대표들은 식량긴급대책회를 결성하고, 미곡 최고가격제 철폐, 쌀의 도내 반입 허용, 식량 창고와 양조장에 보관된 쌀의 배급을 군정당국에 탄원했다. 식량위기가 격화하자 미군정은 쌀 밀수출과 밀반출을 금지한다며 쌀의 군외 또는 도외 반출을 금지했다. 부산의 경우 한꺼번에 많은 귀환동포들이 들이닥치자 식량의 도외로부터의 반입이나 도내 유통이 절실했다. 서울의 경우 군정당국이 소량의 미곡 반입을 허용했으나, 경남의 경우는 그마저 금지했다. 경남 군정장관은 12일 관내 모든 정치·사회단체 대표들을 소집하여 이들 단체가 배급에 개입하는 것과 식량 배급을 위해 협동조합을 결성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식량위기가 계속되자 경남 인민위원회는 자체적으로 4월3일 도내에서 쌀의 유통과 판매를 허가한다고 발표했고, 군정당국은 인민위원장 윤일 등 식량긴급대책회 주도자들을 군정법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주요한과 접촉했던 미군 장교들은 한국인들이 민생을 돌보지 않고 정쟁에 분주하다며 힐난조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편지가 전달될 무렵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식량위기는 한국인들의 정쟁 때문이 아니라 미군정 식량정책의 실패로부터 비롯되었고, 막상 한국인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자 미군정은 주동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미군정의 식량정책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은 식량 부족 그 자체보다 그것이 초래할 정치적 위기였다. 식량위기는 미군정 점령통치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안이었고,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쌀값이 급등할 때마다 미군정에 대한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식량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인들이었고, 그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던 만큼 수수방관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자체적 해결 노력이 미군정이 원치 않는 정치·사회 세력과 대중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