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맨 오른쪽)이 5일 오전 경기 성남 분당구 운중동 연구원에서 ‘신집현전 태학사' 과정에 선정된 소순규(왼쪽), 최윤지 박사와 대화를 하고 있다. 성남/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4월 대학원생들 사이에선 조그만 술렁임이 있었다. 논문 작성이나 연구 과제 수행 같은 조건을 걸지 않고 최대 5년간 매달 500만원의 장학금을 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의 장학생 모집 공고가 떴기 때문이다. 정부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에서 운영하는 ‘신집현전 태학사’ 과정이 그것이었다. 7명의 태학사를 뽑는 과정에 34명이 지원했고, 지난달 2명의 태학사가 선발됐다.
”어떤 교수님은 ‘꿈의 자리’라며 자기도 교수 그만두고 지원해보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시더라고요.“ 5일 경기도 성남시 한중연에서 만난 최윤지(35) 박사는 지원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달했다. 2016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국어학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3년간 대학교 시간강사 일을 하다가 이번에 태학사로 선발됐다. ‘한국어 정보구조의 이론적 체계 및 언어현상 연구’가 그의 태학사 연구 주제다.
역사학 분야에서 선발된 소순규(39) 박사도 태학사의 파격적인 조건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2017년 고려대에서 한국중세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태학사 연구 주제로 “한국 중세 현물 중심 재정의 특징과 동아시아적 배경”을 써냈다. 소 박사는 태학사로 선발돼 가장 달라진 점으로 1000쪽짜리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걸 꼽았다. 그가 지난달부터 손에 잡은 책은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한국 경제사>다. “몇 년째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한 책인데 시도를 못했어요. 연구자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니 일반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연구자들은 자기 연구와 조금 비껴나 있는 책은 읽을 여유가 거의 없습니다. 참여한 연구 사업의 행정 업무를 하고, 시간강사 강의하고, 아르바이트 하고, 논문 쓸 자료를 찾고 읽다 보면 연구에 직결되지 않는 책은 읽을 짬이 안 나는 거죠. 아마 그동안 한국 대학원의 역사에서 3~5년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 공부만 했던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는 “연구자들끼리는 ‘박사 되고 바보 됐다’는 말을 농담처럼 한다”고 덧붙였다. “연구교수를 할 때도 연구가 쌓인다는 느낌보다는 읽은 걸 쥐어짜서 뱉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요. 내 시각 자체를 갈고 닦는 걸 못하는 거죠. 교수 임용할 때 논문 편수로 평가하니, 임용이 걸려 있는 연구자들이 논문 안 쓰고 연구만 1~2년 한다는 것도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인문학계의 위기는 이미 상식이 된 시대다. 인구 급감으로 대학교의 숫자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정부에선 각종 평가로 대학들을 퇴출하기 시작했고, 교수 논문 실적과 신입생 충원률 등 정량적 지표가 중요하게 됐다. 임용이나 호봉 승급이 걸린 교수들은 저술이나 번역은 제쳐놓고 논문에만 매달리고, 대학들은 신입생들이 잘 오지 않는 인문사회계 학과를 축소·폐지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이 5일 오전 경기 성남 분당구 운중동 연구원 원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 원장의 뒤에는 영조가 쓴 '自醒舍(스스로 깨우치는 곳)'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영조는 자신을 스스로 자성옹(自醒翁)이라 부르며, 이를 자신이 머무는 건물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성남/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런 학계 현실이 안병욱 한중연 원장이 태학사 과정을 만들게 된 배경이다. “갓 배출된 연구자들이 젊은 시절에 평생 먹고 살 연구를 해야 하는데 각종 연구 프로젝트에 날품팔이하러 다니느라 그럴 기회가 없다. 대학원생이나 박사의 숫자는 늘었지만,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인 뛰어난 연구를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이유다. 학계의 기둥이자 주춧돌이 될 학자들을 키워내지 않으면 인문학의 명맥이 끊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안 원장은 태학사 선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장래성을 꼽았다. 만 40살 이하의 박사 학위 취득자로 신청 자격에 제한을 둔 이유다. “지원자 중에서 연구계획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연구재단의 개인 연구 과제 사업에 지원하면 된다. 단발로 끝나지 않고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연결돼서 큰 연구로 이어질 확장성 있는 연구계획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야구에 비유하면 1루까지 살아갈 수 있는 안타성 연구계획이 아니라 홈런을 칠 수 있는 연구자에게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채우지 못한 태학사 5명 정원은 다시 2차 선발 과정을 진행 중이다.
논문 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은 마련되어 있다. 분기 단위로 연구 활동 내역을 지도교수에게 제출해야 한다. 태학사 두 명 모두 연구 계획에 논문과 저서 집필 계획을 세워놨다. 하지만 매년 2~3편씩 논문을 쏟아내야 하거나, 자신이 정하지 않은 연구 주제에 참여해야 하는 다른 연구자들에 비해 자신의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태학사로 3~5년간 연구에만 전념한 사람이 태학사 종료 이후에 교수로 임용되는 데는 불리하지 않을까? 소 박사는 “사실 학계에서 처음 해보는 프로그램이라 아직 누구도 알 수 없죠. 하지만 교수 임용이 연구와 교육을 잘하는 사람을 뽑는 거라면, 연구 능력을 신장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되는 태학사 과정을 마친 사람이 임용에서도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최 박사는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제가 활발하게 활동도 하고 좋은 연구 성과를 내야 태학사 같은 제도가 늘어날 거라는 생각에 책임감이 막중해요.”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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