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미군정 사령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존 하지 중장을 위한 성대한 송별연이 1948년 8월2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송별식에서 이범석 국무총리(앞줄 오른쪽)가 선물로 준 700년 된 일본도를 하지 중장이 만져보고 있다. 이 칼은 이범석 장군이 청산리전투 때도 지녔던 그의 애장품이었다. 하지의 왼쪽 옆에 통역 겸 정치고문인 이묘묵이 서 있다. 뒷자리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모습도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서울 관수동 44번지에 사는 오병철이 점령군 사령관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저는 조선건설치안총본부의 오병철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선은 이런 경사를 맞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해방된 바로 그날 나는 조선의 치안을 담당할 기구를 조직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자치기구이고, 치안 유지가 목적이며 정치적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전 조선이 우리 조직의 활동을 반겨주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근면하고 성실하게 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내 조직은 서울에 4천여명의 대원이 있습니다. 나는 서울 서부에 있는 대원들로부터 미군이 우리의 막중한 활동을 인정했다고 들었고, 그들은 당신 군대와 손을 마주 잡고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용맹하고 애국심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무어라고 얘기하든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삶이 곧 투쟁이라고 합니다. 나는 게으르게 잠을 자거나 망상을 좇지 않고 참으로 고귀한 정신으로 싸울 겁니다. 장군님, 나는 당신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 뵐 수 있을지요? 사정이 허락한다면 서신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해방 직후 우익단체인 ‘조선건설치안총본부’의 본부장 오병철이 하지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 1945년 9월13일자로 보낸 편지는 ‘미군을 도와 치안을 맡겠다’며 ‘장군님의 지도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일제시대, 해방 정국 지나며 ‘변신’ 계속
오병철은 존 하지 장군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을까? 편지는 용맹하다 못해 무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직선적이다. 그는 조선건설치안총본부(건설치안대)의 본부장이었고, 이 단체는 치안 유지 활동을 내걸고 창립한 첫번째 우익진영 단체였다. 그는 그 단체의 후신인 조선건국청년회(건청) 초대 부회장을 지냈다.
미군정은 9월13일 치안 유지 명목으로 창설된 단체들에 경찰력 행사를 중지하도록 명령했는데, 그 지시에 따라 건설치안대는 건청으로 개명했다. 전자의 창립일은 1945년 8월16일이고, 후자의 창립일은 1945년 9월29일이다. 편지는 미군정이 명령을 내린 날 발송되었고,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와 면담하는 것이 오병철과 건설치안대의 첫번째 주요 활동 목표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편지에서 이 단체가 미군과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오병철은 건청 2대 회장이 되었고 그때부터 오정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의 과거는 불투명하다. 건청은 1947년 중반에 내홍을 겪는데 그의 반대파들은 그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경무국과 헌병대 촉탁으로 항일혁명가 밀고, 고문 등을 자행했고 일진회 회원으로 강제 징용, 징병 등 일제의 전시동원에 적극 호응했다며 그를 비난하는 광고를 일간지에 실었다. 그 광고에 의하면 해방 직후 건설치안대를 조직한 것도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의 사주로 귀국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해방 이후 적산 불하 등 각종 이권 개입과 사기행각으로 재산을 모았다.
해방 직후 첫 우익단체인 조선건설치안총본부(이후 조선건국청년회로 개칭)를 만든 주역 중 한명인 오병철(오정방)이 일제 때 행한 친일행적을 고발하는 내용의 신문(현대일보 1947년6월15일) 광고. 정용욱 교수 제공
해방 직후 치안 확보를 내걸고 만들어진 우익단체 ‘조선건국청년회’가 당시에 뿌린 전단지. 정용욱 교수 제공
반면 해방 직후 남한 정치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몽양 여운형은 1946년 6월 한 기자회견 석상에서 그에 대해 다소 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자신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가 함경남도 회령 지국장을 했으며, ‘비밀조사를 부탁하면 결사적으로 대모험을 감행하던 용감하고 열렬한 애국청년이었으나 해방 이후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건설치안대를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일보 전진한다고 건국청년회로 변하는 동시, 타력의 오도(誤導)를 받아 파괴적 운동을 했던 것이 사실이나, 최근 과거를 반성하며 과오를 청산하고 국내 통일과 건국의 촉진을 위하여 건설적인 정당한 노선에 다시 서려는 용감한 자기 수정’을 했다는 것이다.
반대파의 얘기와 몽양의 평가가 상반되어 어느 것이 그의 정체인지 헷갈리지만 진실은 어중간에 있거나 또는 두 주장 모두 사실이었을 것이다. 몽양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하던 때가 1933년부터 1936년 사이니 그 무렵엔 조선중앙일보 회령 지국장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뒤의 행적은 반대파의 주장대로였을 가능성이 많다. 일제하 36년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개인의 신상이 천변만화를 겪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해방 이후와 관련해서는 몽양도 그가 건청 결성 시점부터 ‘타력의 오도’를 받아 파괴적 운동을 했다고 했고, 몽양의 발언을 전후한 시점에 무언가 노선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괴적 운동’은 건청이 결성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던 것을 가리킨다. 건청은 1945년 11월 조선인민공화국이 주최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습격을 주도하는 등 해방 직후 가장 적극적으로 좌익을 공격했다. 이 사건은 우익진영이 정치노선의 차이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고자 한 시도이자 우익 청년단이 그 행동대로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오정방은 남한 정계에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46년 중반 이후 민족통일과 좌우합작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고, 그로부터 우익 청년단체가 그에게 협박장을 보내는 등 극우진영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몽양의 기자회견은 오정방의 그러한 노선 변화를 지지한 셈이고, 1947년 건청의 내홍은 그 뒤끝으로 그와 노선을 달리하는 세력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본색이 무엇이었든 간에 편지에서 표현한 대로 해방 정국에서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한민당과 미군정 연결고리 역할
그의 편지는 주한미군사령부가 <주한미군사>를 편찬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를 모아놓은 주한미군사령부 군사실(軍史室) 문서군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편지가 들어 있는 서류철은 <주한미군사> 1부 3장 ‘막간극: 1945년 8월’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들을 철해놓았다.
이 서류철에 들어 있는 문서들은 미군 진주 직후 방첩대 등 미군 정보기구들이 각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첩보들을 수집한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특히 미군 진주 이전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과 그 정치적 성격 규명에 초점을 맞추어 첩보를 수집했음을 보여준다. 이 서류철에서 오병철의 편지보다 더 눈길을 끄는 영문 연설 원고 한편을 발견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이묘묵이 1945년 9월10일 음식점 명월관에서 미군 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에게 행한 연설문. 그는 이 연설에서 건준 지도부에 대해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왜곡했다. 이묘묵은 그 뒤 하지 사령관의 통역 겸 정치고문으로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정용욱 교수 제공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이 된 이묘묵이 1945년 9월10일 미군 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에게 해방 후 남한 정세를 왜곡해 브리핑한 연설문의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이 연설문은 서두에 양심을 걸고 ‘공평하고 편견 없는 자료’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1면 상단에 ‘연희전문학교’라는 머리말이 타자되어 있는 타자지 8장 분량의 글이다. 전체적으로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8월15일 이후의 사태 전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당면 현안’ ‘조선인이 두려워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연설은 전체의 절반가량을 일본 패망 이후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 법과 질서의 유지, 식량 및 연료 확보, 일본인 귀환과 그들의 조선 내 재산 처리, 통화량 증발과 인플레, 재일 조선인 귀환 등 일제의 패망과 총독부의 종전대책으로 빚어진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할애했지만 연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글의 둘째 부분인 ‘건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글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연설은 이 부분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총독부의 2인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이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여운형과 교섭한 사실 등 건준이 조직된 과정을 전달하고 있지만,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건준을 지도했던 위원장 여운형과 부위원장 안재홍을 친일파, 공산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인이 두려워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라는 제목의 넷째 부분은 연설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고는 현재 조선의 사고 경향을 우익과 좌익으로 나눈 뒤 좌익은 잘 조직되어 있고, 선전에 능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면에 민족주의자들은 이성적이고, 신중하게 사태 발전을 지켜보고 있다고 정리한다. 이어서 북에서 내려온 군대가 조선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고, 조선인들은 빨갱이의 영향력이 새로 태어난 국가에 해를 끼칠 것을 두려워한다고 적고 있다. 그는 조선인들이 해방자 미국인의 도착을 기다렸고, 기꺼이 미국인에게 협조할 것이라며 조선인들이 ‘인민을 위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기를 갈망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고 있다. 소련을 직접 지칭하는 대신 ‘북에서 도래한 군대’라는 완곡어법으로 표현했지만 연설을 듣는 사람들이 그것이 소련군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다.
작성일이 9월1일로 잘못 기재되어 있고 ‘Dear Sir’로 시작하는 이 영문 원고는 언뜻 보면 연설문인지 편지인지 헷갈리지만 이 문서 상단에 연필로 1945년 9월10일 명월관에서 외국인 기자들을 상대로 한 연설문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 시점만 해도 아직 간행된 한국어 신문이 없어서 이 연설이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는지 당시 한국 사회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미 육군 24군단 군사관이 수기로 기록한 9월10일자 ‘사관기장’(Corps Staff Journal)은 합동통신사가 주최한 명월관 모임에서 ‘이 박사’가 미군 장교들과 미국인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연설했다는 것을 밝혀놓았다. ‘이 박사’는 이묘묵이고, 그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적극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한민당과 미군정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연설 원고 끝에 자신을 <코리아 타임스> 발행인으로 소개했으며, 해방 이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지만 전향 후 풀려났고, 그 뒤 각종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다.
1946년 12월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존 하지 중장. 하지 중장의 왼쪽은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인 이묘묵, 뒤쪽에 의장 김규식의 모습이 조금 보인다. 앉은 사람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인 브라운 소장(왼쪽)과 아처 러치 군정장관을 대신해 참석한 찰스 헬믹 준장이다. 앞쪽은 전규홍 사무총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본군의 악의적 공격을 반복
미·소 양군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을 공포한 연합군사령부의 일반명령 1호는 일본군 무장해제와 치안 확보를 주된 점령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진주하기 이전부터 미군은 자신들의 임무가 그것에 한정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조선총독부,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와의 교신은 물론 오키나와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조선인 포로들을 통해서 남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 남진할 가능성과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치안 유지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는 악의적 중상을 반복적으로 전하며 미군의 소련군에 대한 경계의식과 남한 정세에 대한 의구심을 한껏 증폭시켰다. 일본군은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활발하게 전개한 새 국가, 새 사회 건설을 위한 자생적인 노력들을 소련의 사주와 일부 공산주의자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몰아갔다.
이묘묵의 연설은 그러한 인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주 이전에 미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을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조선인 교육자가 확인해준 셈이 되었다. 그가 이후 점령군 사령관 하지 장군의 통역이자 정치고문으로 발탁되었다는 점은 미군정의 ‘통역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막간극’이라는 문학적 표현으로 제목을 단 <주한미군사>의 해당 부분 서술은 미군 진주 이전 건준과 각지에 설치된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등 각종 조직이 자생적으로 펼친 정치 활동과 치안 유지 활동을 소개하는 데 할애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평가할 때 반복적으로 이묘묵의 연설문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의미심장하게도 그 부분을 서술하기 위해 모아놓은 자료들은 ‘막간극’이 그 뒤 전개될 통역정치와 테러정치의 서막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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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