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학술

“지금도 50년대 최익한 수준의 다산 연구물 찾기 힘들죠”

등록 2020-12-13 18:04수정 2020-12-13 21:21

【짬】 방송통신대 송찬섭 교수

“대학 4학년이던 77년에 휴학까지 하고 경남 산청군에서 면우 선생의 제자인 중재 김황 선생한테 한문을 배웠어요. 그때 중재 선생과 최익한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걸 알았다면 더 많은 일화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아요.”  송찬섭 교수는 전집이 어느 정도 나갔냐는 질문에 “많이 팔리지 않았다. <실학파와 정다산>을 조금 고치고 싶은데 초판이 다 나가지 않아 아직 못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성만 선임기자
“대학 4학년이던 77년에 휴학까지 하고 경남 산청군에서 면우 선생의 제자인 중재 김황 선생한테 한문을 배웠어요. 그때 중재 선생과 최익한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걸 알았다면 더 많은 일화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아요.” 송찬섭 교수는 전집이 어느 정도 나갔냐는 질문에 “많이 팔리지 않았다. <실학파와 정다산>을 조금 고치고 싶은데 초판이 다 나가지 않아 아직 못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성만 선임기자

“최익한(1897~?) 선생은 처음으로 <여유당전서>를 완독한 분이죠. 이 책을 전부 다 읽은 사람은 지금도 없을 겁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4~38년에 <신조선사>는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저술 154권 76책을 정리해 <여유당전서>를 펴냈다. 여유당은 다산의 당호다. 최익한은 이 문집이 나오고 1938년 12월부터 6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했다. 저자는 이 연재물에서 정약용이 살았던 집까지 답사하는 공을 들이며 다산 학문의 뿌리와 의미, 한계를 체계적으로 짚었다. 1948년에 월북한 그가 한국전쟁 2년 뒤인 55년에 펴낸 <실학파와 정다산>은 지금도 ‘다산 연구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실학파와 정다산> 표지.
<실학파와 정다산> 표지.
내년 2월이 정년인 송찬섭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2011년부터 출판사 서해문집에서 ‘최익한 전집’을 펴내고 있다. 최근 5권 <조선명장전2-을지문덕·연개소문·김유신·강감찬·곽재우>를 출간했다. 사실 그와 ‘학자 최익한’과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올라간다. 노태우 정부 초기인 89년에 <실학파와 정다산>을 엮어냈으나 바로 판금 조처를 당했다. 지난 9일 대학 연구실에서 송 교수를 만났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최익한은 일본 강점기에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년 옥고를 치렀다. 임시정부 군자금을 조달하다 2년, 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8년을 옥에 갇혔다. 그가 투옥 중에 두 아들(재소, 학소)도 항일 농민운동을 하다 일경에 붙들려 삼부자가 옥살이를 하는 기막힌 일도 있었다. 최익한이 장남 재소의 옥사(1937년) 소식을 듣고 비탄에 잠겨 지은 시 25수는 <조선일보>에 실렸다. 불과 23살에 일경 고문으로 세상을 뜬 아들의 일생을 그린 시였다. 최익한은 해방 공간에서 ‘장안파 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재건파’ 박헌영과 대립하다 월북해 김일성대 어문학부 교수를 지냈다. 연안파와 소련파가 실각한 이른바 ‘8월종파 사건’(56년)으로 숙청당했으며 그 뒤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송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 과정이던 88년에 북에서 나온 <실학파와 정다산>을 처음으로 봤단다.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사건’의 주역인 면우 곽종석 선생의 손자인 곽진(상지대 명예교수) 선생을 통해 책을 빌려 보았죠. 책이 당시 경남 거창의 면우 선생 집안 서재에 있었거든요. 최익한은 16살부터 3년 동안 거창에서 면우 선생에게 배웠어요. 그 인연으로 누군가 일본에서 책을 구해 면우 집안에 전한 것 같아요.”

송 교수가 1989년에 낸 <실학파와 정다산>.                      송찬섭 교수 제공
송 교수가 1989년에 낸 <실학파와 정다산>. 송찬섭 교수 제공
그는 이 책을 만나고 1년도 안 돼 문장만 조금 다듬어 출간했다. “제가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에서 역사 학술운동을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당시 학계에서는 일제 시절부터 해서 가장 뛰어난 다산 연구 성과가 최익한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죠. 다산의 개혁적 성향이 높이 평가되는 시점이기도 했고요.” 노태우 정부 들어 사회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 괜찮을 것 같았지만, 오산이었단다. 초판이 나오고 바로 금서가 됐다. “책 본문보다 ‘오늘 미제를 괴수로 한 식인족들은’으로 시작하는 서문이 문제였던 것 같아요. 여기에는 한국전쟁 2년 뒤 시점에서 미국을 바라보는 최익한의 시각이 담겼죠.”

전집 4권인 <조선명장전1-이순신>과 최근 낸 5권은 한국근현대사 자료수집가인 박현철씨가 고서점에서 찾은 자료 덕을 봤다. “박 선생이 최익한이 56년에 낸 <조선명장전>을 일산 고서점에서 찾아 알려주었죠. 그 전에는 이 책의 존재 자체도 몰랐어요.” 지금 교정 중인 6권 <림제의 재판받는 쥐>도 박씨가 중국 옌볜 고서점에서 찾았단다. “최익한은 16세기 문인 임제가 조선 사회의 부패를 고발하는 소설 <서옥설>을 토대로 자기 생각을 많이 넣어 이 책을 썼죠. 덕분에 이야기가 풍부해졌어요. 재판관이 쌀을 훔친 쥐에게 누가 도왔냐고 추궁합니다. 이 과정에서 동물 80종 정도가 나오는데 최익한은 중국 고전에서 이 동물들 이야기를 많이 찾아 넣었어요.”

최익한 책을 북한에서 바로 구할 길은 없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곽진 교수가 노무현 정부 때 방북해 북한 학자들에게 최익한 선생에 관해 묻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해요.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전집은 7~8권 분량으로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했다. “최익한이 일제, 해방 공간, 북에서 신문과 잡지에 쓴 글을 다 모았더니 4~5권 분량이더군요. 그가 다산과 연암 글을 간추려 펴낸 선집도 각각 1권입니다. 다산의 사회시를 높이 평가해 번역한 첫 학자가 바로 최익한입니다. 이 번역은 국내 학계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벽초 자제인 홍기문과 함께 쓴 <조선봉건말기 선진학자들>도 있죠.”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최익한이 북에서 낸 ‘실학파와 정다산’
89년에 엮어내고 바로 판금당해
9년 전부터 다시 내고 전집 출간 중

최익한 일제 10년 옥고, 장남은 옥사
월북해 김일성대 교수하다 ‘숙청’당해

<조선명장전2> 표지
<조선명장전2> 표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6년 전에 낸 <다산 정약용 평전>에서 이렇게 썼다. “<실학파와 정다산>은 유물론적 입장이라는 점과, 불확실한 증거 자료로 비본 <경세유포>가 농민 혁명의 이념서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관해 비판을 받는 것 이외에는 매우 훌륭한 노작임을 인정해야 한다.”

송 교수의 평가는 어떨까? “최익한이 다산 연구에 불을 붙였다는 게 가장 중요하죠. <여유당전서>가 나올 때 이 책 교정위원인 위당 정인보 선생이 최익한에게 전질을 숙독하고 글을 써보라고 권했죠. 최익한의 사회과학 지식과 한문학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죠. 최익한도 출옥하고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운 때라 관심이 있었던 국학 쪽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최익한은 반계와 성호, 다산으로 이어지는 실학자들의 체계를 세웠어요. 중국 고전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조선 사회와 서구를 비교해 다산 사상을 설명한 점도 눈에 띕니다. 그에게 다산은 시대적 한계에 발목이 잡혀 있으면서도 서구의 보편적 사상과 학문으로서 서학을 수용하려고 한 인물이었죠. 이 책에는 또 다산이 다룬 주제가 다 들어 있어요. 지금도 아마 이런 작업이 있을까 싶어요.”

최익한이 쓴 <조선명장전> 장군 여섯 중에는 다소 의외의 인물이 있다. 삼국통일의 영웅인 신라 김유신이다. “북한 체제에서 김유신을 포함한 것은 힘든 결정일 수 있어요. 하지만 최익한은 신라가 동족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침해했다고 하는 것은 ‘봉건적 명분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삼국이 (통일 이전에) 한나라 의식을 가진 적이 없다는 거죠. 그는 신라가 당나라의 삼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자국의 삼국통일 전쟁으로 이용한 것은 조선 민족 발달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봤어요.” 최익한은 ‘김유신 전’ 서문에서 ‘신라는 견실하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당나라 세력을 이용해 삼국통일을 이뤘지만, 갑신정변 김옥균 일파는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자주적인 역량과 물질적 기초도 준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고 썼다. 북한 역사학계가 56년에 낸 <조선통사>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했지만 최익한이 학계에서 사라진 60년대 이후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고 있다.

고서수집가 박현철씨가 고서점에서 발굴한 최익한 <조선명장전>.    송찬섭 교수 제공
고서수집가 박현철씨가 고서점에서 발굴한 최익한 <조선명장전>. 송찬섭 교수 제공
그는 최익한 인물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인물을 시대의 객관적 정세와 국제 상황에 대한 설명과 연계해 서술한 점”을 들었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전을 보면 수·당과 삼국 사이의 외교 정책이 자세히 나옵니다.”

내년이면 대학을 떠나는 송 교수의 바람 중 하나는 최익한에 대한 학제간 연구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74학번인 송 교수는 ‘조선 후기 개간’과 ‘환곡’을 주제로 모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가 부지런했으면 연구재단에 신청해 국문학, 한국철학 연구자들과 함께 팀을 꾸려 최익한 책도 내고 연구 성과도 바로바로 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다행히 전집 6권은 국문학 전공자가 해제를 쓰기로 했어요. 최익한 한시도 50수나 됩니다. 문학 전공자와 같이 우리말로 옮기면 좋을 것 같아요.”

그가 ‘최익한’을 알린 지도 10년 가까이 됐다. 이런 노력은 어느 정도나 국내 학계에 수용됐을까. “지난 몇 년간 최익한의 다산 및 실학 연구와, 한시를 주제로 몇 편씩 논문이 나왔어요. 하지만 최익한이 사상가로서 다산의 전체적 면모를 어떻게 봤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해요. 앞으로 이 주제로 학술회의도 가능할 것 같아요.”

퇴임 뒤 계획은? “본래 제 관심 분야가 농민 항쟁입니다. 이 주제로 책을 내려고 준비 중입니다. 최익한 평전도 생각하고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속보] 뉴진스 오늘 저녁 긴급 기자회견…어도어 떠나나? 1.

[속보] 뉴진스 오늘 저녁 긴급 기자회견…어도어 떠나나?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2.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뉴진스 “민희진 전 대표 25일까지 복귀시켜라”…하이브에 최후통첩 3.

뉴진스 “민희진 전 대표 25일까지 복귀시켜라”…하이브에 최후통첩

“어도어 사내이사 사임” 민희진 따라…뉴진스 ‘탈 하이브’ 가능성 커져 4.

“어도어 사내이사 사임” 민희진 따라…뉴진스 ‘탈 하이브’ 가능성 커져

사기·다단계·야반도주…도박판인지 미술판인지 5.

사기·다단계·야반도주…도박판인지 미술판인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