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7>
7년 동안 한번도 잊은 일이 없다는 말을 내입으로 통역할 때, 내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지영 비창 소나타가 멈추고 취재가 끝났을 때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 왜 아침이면 꼭 이 음악이야? 나는 그에게 물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메이커에 물을 올려놓고 아직 커피를 마시기도 전에 이 음악부터 틀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는 아직도 졸리운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따뜻한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은 내게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가끔 나는 그런 그를 침대로 끌어당기며 애원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그냥 이렇게… 그러면 그는 가끔은 내 볼을 꼬집기도 했다. 그는 부지런했다. 그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한 일이지만 그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슬픔이라는 점령군에게 마음의 영토를 다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있던 것도 같았다. ― 음악은 좋은데 제목이 싫어… 비창이라는 일본어는 우리말로 하면 슬프다는 거잖아. 나는 우리들의 아침이 슬픈 음악으로 시작되는 게 싫다고. 나는 하필이면 오늘 그런 음악을 튼 신라 호텔 음향 담당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대체 저 빌어먹을 피아노 곡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그는 도무지 모를 것이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나는 거였다. 바로 그가 자기 자신이 갈라놓은 딸의 연인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를 초청한 아버지의 무심함에도 화가 났고, 소설가가 된 그에게도 화가 났다. 적어도 그는 한국으로 올 때 나를 만날 확률이 몇만분의 일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나뿐인 것 같아 통역을 하는 일이 몹시도 힘이 들었다. 7년 동안 한번도 그 한국 친구를 잊은 일이 없다는 말을 내 입으로 통역할 때, 내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그런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사에 히카리가 나라는 걸 아느냐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을 때 나는 결국 더 참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지만, 내일출판사의 창업자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세요, 라고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네가 사사에 히카리라는 소설가가 되어 한국에 오는데 내가 너를 마중하러 방실거리며 공항으로 나올 거 같니? 그렇게도 날 몰랐니?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말다툼은 나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나 버릴 것이 분명했다. 말이라는 것은 부질없다고, 그래서 글을 쓴다고 그는 대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박 기사에게 부탁해 출판사에서 내 차를 가져오도록 부탁해 놓았으므로 나는 벨보이가 가져다주는 차에 올라탔다. 오늘만이야, 라는 그 오늘은 이제 끝났으므로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그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도감을 주는 일이 7년 전에 일어났더라면, 내가 더 혼자 있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가 조금만 더 나를 이해하려고 했었더라면, 그날 내가 그에게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우리는 오늘 이렇게 마주 앉아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밤은 일찍 이 남산에 내려앉아서 사위는 어두웠다. 호텔 쪽 건너편 면세점 쪽에 불빛들이 영롱한 것을 보며 나는 시동을 걸었다 그때 내 시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차를 가로막았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그는 얼핏 커다란 사슴 같이도 보였다. 제발, 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제는 혼자 있는 법을 알아, 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아무리 7년이라는 세월이 우리들 마음 속에서 종이처럼 접혀져서 그와 나와의 시간들이 어제의 불빛처럼 영롱해도 나는 이제는 어제의 홍이가 아니었다. 사랑한다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수많은 인연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라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로 맺어지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시간들이 마치 쥐라기의 바다처럼 그 사이를 가르고 있다는 것도 안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건 그냥 두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 라고도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준고, 준고! 하고 나는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후회에 등이 떠밀리듯, 7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쓰지 히토나리 신라 호텔 라운지에 베토벤의 <비창>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기자는 인내심 있게 대답을 기다리고, 홍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추억이 넘쳐흘러 말로 토해낼 수가 없다. 한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자라고 말았다.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안타깝고, 내 마음을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분한 마음에 어금니를 깨물고 만다. ― 미안하다고 한마디 사과하면 되잖아. 갑자기 7년 전 홍이의 말이 뇌리에서 되살아난다. 후회에 등이 떠밀리듯, 7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커다란 한숨에 실려 나온 말은 너무도 가냘프다. 뒤를 쫓아 한국에 가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홍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자신에게 이 같은 변명이 허락될 리는 없다. 관계를 회복하려 하는 이 말들이 홍이의 마음을 위로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반감을 사, 그녀를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까. 말을 직업으로 하고 있으면서 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지친 건 아닌지 기자가 걱정해 취재는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 피곤하세요? 하고 이연희 씨가 마음을 쓴다. 홍이는 저는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기자와 함께 자리를 떴다. 이연희 씨가 일정표를 꺼내 취재 스케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자와 함께 호텔 회전문을 빠져나가는 홍이의 뒷모습을 좇으며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어느 날, 홍이는 우리 관계가 어떤 거라 생각하느냐고 조금은 말을 돌려 물었다. 우리는 아직 확실히 사랑을 속삭이는 관계는 아니었다. 말로 설명을 해야 하냐는 대답이 홍이를 곤혹스럽게 했다. ―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처음에 네가 그랬잖아. 심술궂은 말에 홍이는 입술을 내밀고 분해했다. 하지만 나는 홍이가 너무도 좋았다. 고바야시 칸나와 헤어지고 이렇게 빨리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것도 홍이의 다정함과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때부터, 나는 진실한 사랑만을 찾아 헤맸다. 때문에 한번 칸나에게 속삭인 사랑의 말들을 홍이에게 다시 쓰고 싶지 않았다. 칸나의 요구로 입술에 담았던 모든 단순하고 천진하며 죄 많은 말들과 겉으로만 한 약속들을 순진한 홍이에게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이미 더렵혀진 것 같았다. 다른 말로 혹은 다른 태도로 나는 홍이와 마주하고 싶었다. 어느 구름이 낮게 드리운 저녁 무렵, 갑자기 나타난 칸나와 돌아갈 차비를 하던 홍이가 아파트 현관에서 마주쳤다. 어떻게 왔냐고 칸나에게 물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하고 홍이가 있는 앞에서 칸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 네가 헤어지자고 했잖아? 고바야시 칸나는 홍이를 한번 보더니, 응, 하지만 진짜 내 마음이 어떤지 이제야 알았어 하고 말했다. ― 난 역시 네가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는 홍이를 가리키며 나는 말했다. ― 미안하지만, 난 이미 멋진 애인이 생겼다. 칸나는 애인, 하고 중얼거리더니, 입술을 꽉 물고 홍이를 노려보았다. ― 아오키, 이제야 알았어.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뭐가 중요한지 이제야 알았다구. 내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줘. 내 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해대는 칸나에게 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세 사람을 싸안았다. 시선만이 뒤엉킨 채 시간이 정지됐다. 그 사이 나도 홍이도 칸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밤, 홍이는 내 아파트에 묵었다. 그녀가 내 방에서 묵는 건 술에 만취한 밤에 이어 두 번째였다. 우리는 아침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창을 열고 숲 위에서 흔들리는 달을 바라보았다. 홍이가 기뻐하는 것이 나도 기뻤다. 나는 홍이를 뒤에서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 안에서 얌전히 아침을 기다렸다. 심장소리를 들으려 했던 걸까, 가끔 어린아이처럼 빙글 몸을 돌려 내 가슴에 귀를 대기도 했다. 손가락 끝으로 내 고동에 맞춰 톡톡 하고 리듬을 새겼다. 지금 나는 그 때의 고동을 느끼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듯한 여행객들과는 거꾸로 홍이가 사라진 회전문을 향해 간다. 숨조차 얼어붙을 것 같은 서울의 밤이다. 호텔 앞 주차장에 서 있는 홍이를 발견했다. 나를 기다리나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파란 승용차가 어디선가 나타나 그녀 앞에 섰다. 벨보이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니 맡겨 놓은 차였나 보다. 이연희 씨와 여기서 만나 회사 왜건을 타고 공항으로 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차 앞으로 뛰어나갔다. 홍이가 노려본다. 내 팔을 잡으려는 벨보이를 뿌리치고 그대로 조수석 쪽으로 돌아 억지로 올라탔다. 홍이는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도 눈 앞에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볼 뿐이다.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차창 맞은편에서 나는 홍이와 함께 지내던 행복한 시간을 찾으려 하고 있다. 뒤에서 경적이 들리자, 벨 보이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차를 빼달라고 재촉했다. 홍이는 아무 말 없이 액셀을 밟았다. 홍이가 운전하는 파란색 줄리엣이 조용히 밤의 서울로 미끄러져 나왔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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