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11>
방금 이 차에서 내린 그의 슬픈 얼굴이
발신자 표시를 읽으려는 내 눈을 방해하고 있었다 공지영 안녕히 가세요, 한국말로 그가 힘없이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차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산에서 내려온 지 10분도 안 되어 차는 강물 옆을 달린다. 검은 강은 멀리서 볼 때보다 아름답게 모든 다리와 모든 차와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안아 너그러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리꽂힌 빛들은 오색빛의 막대사탕처럼 달콤하게도 보인다. 그 빛들을 끌어안고 그 빛을 빛이게 하는 어두운 하늘도 끌어안고 강은 천천히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도달하는 그 곳에. ―바다는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낮은 곳이야. 모든 물들이 그리로 온다. 그래서 바다는 세상에서 제일 넓은 거야.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는 할아버지가 요양하고 계시는 서귀포로 내려갔다. 노을이 지는 선선한 저녁에 나는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바닷가로 갔었다. 서귀포의 푸른 바다는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내가 잠든 밤에도 내가 깨어난 아침에도 내가 할아버지와 산책하는 이 노을 무렵에도. 내가 밥을 먹고 있을 때나, 내가 이빨을 닦고 있을 때나, 가끔씩 아주 가끔씩이지만 내가 일본에 두고 온 그를 잊고 있었던 그 찰나에도 바다는 잠시도 쉬지 않고 뒤척이고 있었다. ―잘못은 사람들이 하는데 벌은 바다가 받는 거 같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홍이야, 나이가 들면, 자신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러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단다. 할아버지가 건강했을 때라면 나는 입술을 빼물고 혀를 낼름 내밀었을 것이었다. 추리 소설의 끝 장면을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그건 내게 재미없는 일이야, 내가 겪을 거야. 내가 겪어서 내가 깨달을 거야, 하고. 그러나 그날 서귀포, 먼 바다 배들이 들어와 쉬고 있는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는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이 지나도록 언제나 할머니의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있는 거야? 하고. 그러나 나는 묻지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바다처럼 주름지고 바다처럼 오래 뒤척인 사람의 그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묻고 싶었다. 왜 할아버지들은 그렇게 약했어? 왜 나라를 빼앗겼어? 왜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멋지게 그 사람들을 때려눕히지 못했어? 그 사슴같이 생긴 시인이 그렇게 슬프게 죽어가도록 모두 쳐다만 봤어? 휴대폰이 울린다. 내 가슴은 다시 내려앉았다. 방금 이 차에서 내린 그의 슬픈 얼굴이 발신자 표시를 읽으려는 내 눈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 그의 냄새가 아직도 배어 있었다. 뭐랄까, 나만이 아는 그의 냄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김민준이라는 글자가 휴대폰에 떠올랐다. 나는 휴대폰을 백 속으로 던져 넣고 라디오를 틀었다. 아침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나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도 머리도 좀 더 예쁘게 하고 옷도 좀 더 화사하게 입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반짝거림도 없이 그저 시들어가는 노처녀처럼 그에게 보여졌던 것은 아닐까, 내 자신이 싫어졌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가 가슴 아플 만큼만, 그가 후회할 만큼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이건 민준을 만나면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지희가 옳았다. 이런 거무튀튀한 상복 같은 것은 벗어버리고 화사한 캐리어 우먼으로 그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전화는 내 백 속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민준에게 언제나처럼 응, 나야,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는 물을 것이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구나, 왜 또 어떤 친구가 결혼했니, 라든가, 왜? 또 어떤 애가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예뻐졌니, 라든가… 그리고 하하, 웃으며 홍, 차를 돌려, 내가 맛있는 술 사줄게, 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를 따라 하하 웃으며, 그래, 나 화났어. 걔네들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나보다 뚱뚱했는데 무슨 시집을 그렇게 잘 간대니? 하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집요하게 말하면 나는 말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민준아 그 사람이 왔어, 그 사람… 하며 민준의 실크 양복에 콧물을 묻혀가며 엉엉 울지도 몰랐다. 그러면 민준이가 말했을 것이었다. 말하지 말지 그랬니, 그렇게 솔직하게는 말하지 말지 그랬니, 하고.
“칸나, 넌 내 편집자지 애인이 아니잖니
내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쓰지 히토나리 트렁크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다. 칸나임이 틀림없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선 냉장고에서 작은 위스키 병을 커내 뚜껑을 열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이노가시라 공원을 달리는 흰옷의 최홍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트렁크를 열고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에 갔었어 하는 칸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왔어.” “누구랑?” 창가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며 위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꾸로 발바닥에서부터 서서히 피로가 올라온다. 그대로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아 본다. “혼자.” “그 사람 만났던 거 아니야?”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시 빛의 샤워 속을 달려가는 홍이가 보인다. 최홍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헤어진 그날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쫓기던 사이에도 묵묵히 쉬지 않고 달렸다. 언젠가 왜 그렇게 열심히 달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홍이는 그냥,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저 그것뿐이었는데, 나는 왠지 그 다음을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달리는 이유를 아는 것이 두려웠다. 둘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다음부터 홍이는 더욱 길게 훨씬 멀리 달렸다. 달리기를 할 때의 홍이는 내 손에 닿지 않는 존재였다. 달리는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였다. 위에서 아래까지 새하얀 차림으로 최홍은 한결같이 달렸다. 긴 손발은 마치 야생의 영양 같았다. 땅을 차고 오르는 발과 허공을 휘젓는 팔, 그 조화롭고 멋진 탄력과 밸런스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누구랑 남산에 갔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혼자라니까 하고 투덜거리듯 대답을 한다. “어떻게 혼자서 갔어?”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칸나, 넌 내 편집자지 애인이 아니잖니. 내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너무 야속하게 자른 것 같아 가엾은 생각도 들어, 갑갑한 가슴을 씻어 내리기 위해 남은 위스키를 마셔버렸다. “애인이 아니야?” 칸나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것보다 이제 후쿠오카에 가야 되지 않나?” 눈가를 손으로 꾹 누르며, 가능한 한 부드럽게 화제를 바꿨다. “맞아. 쿠도 선생님 강연회로 후쿠오카에 가. 선생님이 당신 작품을 높이 평가해 주셨어. 선생님께 할 말이 있으면 내가 대신 전해줄게.”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앉은 곳에선 서울의 야경이 보이지 않았다. 남산 꼭대기를 가리키는 불빛만이 어두운 유리창 안에서 용의 눈처럼 깜빡이고 있다. “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빨간 별이 호흡을 하고 있다. 그건 홍이다. 달리기를 마친 홍이는 언제나 안에서부터 힘차게 깜빡였다. 아파트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 땀이 식기를 기다리는 홍이. 42.195킬로미터를 달려온 마라톤 선수처럼 에너지를 모두 발산해낸 개운한 얼굴이었지만, 내게는 왠지 그 무수한 땀방울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 같았다. 칸나의 목소리가 온화하게 울린다. 그건 마치 지금부터 외출 같은 거 하지 마, 라는 주문을 받은 기분이다. “그래, 이제 곧 잘 거야.” 공항에서 최홍과 재회한 것을 칸나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해야 할지 어떨지. “그럼 어서 자. 잠을 방해하면 안 되지.” 나는 그래 하고 끄덕인 다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하고 덧붙였다. “만약에 말인데, 있을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재회에 갑자기 맞닥뜨린다면 넌 거기서 운명을 느끼겠니?” 질문의 의도를 나도 알 수가 없다. 의식을 하고 말했다기보다 무의식중에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자 칸나는 한순간의 지체함도 없이 단호한 어조로 아니, 하고 기선을 잡았다.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어서 그런 우연에 좌우되진 않아.” 피로한 탓에 귀 안쪽에서 어렴풋한 저주파 진동이 느껴진다. 우주에서 도착한 전자신호처럼 뇌리를 떨게 한다. 사고가 정지된 끝에 깜빡이는 빨간 별이 있었다. 알았어, 이제 자야겠다 하고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중얼거렸다. 칸나가 작은 소리로 푹 쉬어 하면서 드물게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 놓고 무릎에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오른쪽 저편에 펼쳐진 빛의 보석을 바라본다. 남산 위에서 홍이와 함께 내려다 본 서울의 야경과 다시 대면했다. “홍, 넌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렸니….” 한숨에 창이 뿌예졌다.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홍이란 한자를 적어 본다. 글씨가 점점 엷어지더니 우주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발신자 표시를 읽으려는 내 눈을 방해하고 있었다 공지영 안녕히 가세요, 한국말로 그가 힘없이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차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산에서 내려온 지 10분도 안 되어 차는 강물 옆을 달린다. 검은 강은 멀리서 볼 때보다 아름답게 모든 다리와 모든 차와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안아 너그러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리꽂힌 빛들은 오색빛의 막대사탕처럼 달콤하게도 보인다. 그 빛들을 끌어안고 그 빛을 빛이게 하는 어두운 하늘도 끌어안고 강은 천천히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도달하는 그 곳에. ―바다는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낮은 곳이야. 모든 물들이 그리로 온다. 그래서 바다는 세상에서 제일 넓은 거야.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는 할아버지가 요양하고 계시는 서귀포로 내려갔다. 노을이 지는 선선한 저녁에 나는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바닷가로 갔었다. 서귀포의 푸른 바다는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내가 잠든 밤에도 내가 깨어난 아침에도 내가 할아버지와 산책하는 이 노을 무렵에도. 내가 밥을 먹고 있을 때나, 내가 이빨을 닦고 있을 때나, 가끔씩 아주 가끔씩이지만 내가 일본에 두고 온 그를 잊고 있었던 그 찰나에도 바다는 잠시도 쉬지 않고 뒤척이고 있었다. ―잘못은 사람들이 하는데 벌은 바다가 받는 거 같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홍이야, 나이가 들면, 자신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러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단다. 할아버지가 건강했을 때라면 나는 입술을 빼물고 혀를 낼름 내밀었을 것이었다. 추리 소설의 끝 장면을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그건 내게 재미없는 일이야, 내가 겪을 거야. 내가 겪어서 내가 깨달을 거야, 하고. 그러나 그날 서귀포, 먼 바다 배들이 들어와 쉬고 있는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는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이 지나도록 언제나 할머니의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있는 거야? 하고. 그러나 나는 묻지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바다처럼 주름지고 바다처럼 오래 뒤척인 사람의 그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묻고 싶었다. 왜 할아버지들은 그렇게 약했어? 왜 나라를 빼앗겼어? 왜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멋지게 그 사람들을 때려눕히지 못했어? 그 사슴같이 생긴 시인이 그렇게 슬프게 죽어가도록 모두 쳐다만 봤어? 휴대폰이 울린다. 내 가슴은 다시 내려앉았다. 방금 이 차에서 내린 그의 슬픈 얼굴이 발신자 표시를 읽으려는 내 눈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 그의 냄새가 아직도 배어 있었다. 뭐랄까, 나만이 아는 그의 냄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김민준이라는 글자가 휴대폰에 떠올랐다. 나는 휴대폰을 백 속으로 던져 넣고 라디오를 틀었다. 아침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나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도 머리도 좀 더 예쁘게 하고 옷도 좀 더 화사하게 입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반짝거림도 없이 그저 시들어가는 노처녀처럼 그에게 보여졌던 것은 아닐까, 내 자신이 싫어졌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가 가슴 아플 만큼만, 그가 후회할 만큼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이건 민준을 만나면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지희가 옳았다. 이런 거무튀튀한 상복 같은 것은 벗어버리고 화사한 캐리어 우먼으로 그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전화는 내 백 속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민준에게 언제나처럼 응, 나야,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는 물을 것이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구나, 왜 또 어떤 친구가 결혼했니, 라든가, 왜? 또 어떤 애가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예뻐졌니, 라든가… 그리고 하하, 웃으며 홍, 차를 돌려, 내가 맛있는 술 사줄게, 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를 따라 하하 웃으며, 그래, 나 화났어. 걔네들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나보다 뚱뚱했는데 무슨 시집을 그렇게 잘 간대니? 하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집요하게 말하면 나는 말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민준아 그 사람이 왔어, 그 사람… 하며 민준의 실크 양복에 콧물을 묻혀가며 엉엉 울지도 몰랐다. 그러면 민준이가 말했을 것이었다. 말하지 말지 그랬니, 그렇게 솔직하게는 말하지 말지 그랬니, 하고.
“칸나, 넌 내 편집자지 애인이 아니잖니
내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쓰지 히토나리 트렁크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다. 칸나임이 틀림없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선 냉장고에서 작은 위스키 병을 커내 뚜껑을 열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이노가시라 공원을 달리는 흰옷의 최홍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트렁크를 열고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에 갔었어 하는 칸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왔어.” “누구랑?” 창가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며 위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꾸로 발바닥에서부터 서서히 피로가 올라온다. 그대로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아 본다. “혼자.” “그 사람 만났던 거 아니야?”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시 빛의 샤워 속을 달려가는 홍이가 보인다. 최홍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헤어진 그날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쫓기던 사이에도 묵묵히 쉬지 않고 달렸다. 언젠가 왜 그렇게 열심히 달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홍이는 그냥,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저 그것뿐이었는데, 나는 왠지 그 다음을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달리는 이유를 아는 것이 두려웠다. 둘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다음부터 홍이는 더욱 길게 훨씬 멀리 달렸다. 달리기를 할 때의 홍이는 내 손에 닿지 않는 존재였다. 달리는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였다. 위에서 아래까지 새하얀 차림으로 최홍은 한결같이 달렸다. 긴 손발은 마치 야생의 영양 같았다. 땅을 차고 오르는 발과 허공을 휘젓는 팔, 그 조화롭고 멋진 탄력과 밸런스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누구랑 남산에 갔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혼자라니까 하고 투덜거리듯 대답을 한다. “어떻게 혼자서 갔어?”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칸나, 넌 내 편집자지 애인이 아니잖니. 내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너무 야속하게 자른 것 같아 가엾은 생각도 들어, 갑갑한 가슴을 씻어 내리기 위해 남은 위스키를 마셔버렸다. “애인이 아니야?” 칸나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것보다 이제 후쿠오카에 가야 되지 않나?” 눈가를 손으로 꾹 누르며, 가능한 한 부드럽게 화제를 바꿨다. “맞아. 쿠도 선생님 강연회로 후쿠오카에 가. 선생님이 당신 작품을 높이 평가해 주셨어. 선생님께 할 말이 있으면 내가 대신 전해줄게.”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앉은 곳에선 서울의 야경이 보이지 않았다. 남산 꼭대기를 가리키는 불빛만이 어두운 유리창 안에서 용의 눈처럼 깜빡이고 있다. “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빨간 별이 호흡을 하고 있다. 그건 홍이다. 달리기를 마친 홍이는 언제나 안에서부터 힘차게 깜빡였다. 아파트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 땀이 식기를 기다리는 홍이. 42.195킬로미터를 달려온 마라톤 선수처럼 에너지를 모두 발산해낸 개운한 얼굴이었지만, 내게는 왠지 그 무수한 땀방울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 같았다. 칸나의 목소리가 온화하게 울린다. 그건 마치 지금부터 외출 같은 거 하지 마, 라는 주문을 받은 기분이다. “그래, 이제 곧 잘 거야.” 공항에서 최홍과 재회한 것을 칸나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해야 할지 어떨지. “그럼 어서 자. 잠을 방해하면 안 되지.” 나는 그래 하고 끄덕인 다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하고 덧붙였다. “만약에 말인데, 있을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재회에 갑자기 맞닥뜨린다면 넌 거기서 운명을 느끼겠니?” 질문의 의도를 나도 알 수가 없다. 의식을 하고 말했다기보다 무의식중에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자 칸나는 한순간의 지체함도 없이 단호한 어조로 아니, 하고 기선을 잡았다.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어서 그런 우연에 좌우되진 않아.” 피로한 탓에 귀 안쪽에서 어렴풋한 저주파 진동이 느껴진다. 우주에서 도착한 전자신호처럼 뇌리를 떨게 한다. 사고가 정지된 끝에 깜빡이는 빨간 별이 있었다. 알았어, 이제 자야겠다 하고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중얼거렸다. 칸나가 작은 소리로 푹 쉬어 하면서 드물게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 놓고 무릎에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오른쪽 저편에 펼쳐진 빛의 보석을 바라본다. 남산 위에서 홍이와 함께 내려다 본 서울의 야경과 다시 대면했다. “홍, 넌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렸니….” 한숨에 창이 뿌예졌다.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홍이란 한자를 적어 본다. 글씨가 점점 엷어지더니 우주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