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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13>

등록 2005-10-13 16:14수정 2005-10-13 16:14

먼하늘가까운바다 <13>
먼하늘가까운바다 <13>
육체가 정신을 이길 수 있을까,
의지가 환경을 이길 수 있을까,
진심이 편견을 이길 수 있을까

공지영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뛰는 거지, 하고 그도 물었었다. 내가 자주 들르는 카페 호반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란 불빛들이 영롱했다. 이 밤 따뜻한 저 카페 안에서 연인들은 사랑하리라. 사랑한다고 말하고 두 손을 잡고 있으리라. 죽을 때까지 함께 아침을 맞자고 약속을 할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말들이 우리를 버려두고 추억의 페이지 속으로 우루루 사라져 버릴지라도,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영원을 움켜쥔 듯 기쁠 것이다.

평소 같으면 나는 호숫가를 좀 뛰다가 저 카페에 들어가 레몬밤 티에 곁들여 갓 구워낸 따끈한 애플파이를 먹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책을 읽거나 앞으로 기획할 아이템들을 점검하곤 했다. 가끔은 록이랑 엄마와 함께 마르가리타를 마시기도 했었다. 싸락눈 같은 소금이 하얗게 흩어진 칵테일 잔 가에 푸른빛 액체가 출렁이는 그 술을 나는 좋아했었다. 그 푸른빛은 내가 도쿄에서 바라보던 먼 하늘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카페 앞 휘황한 불빛들을 스쳐지나갔다. 입에서는 주전자가 수증기를 내뿜듯이 흰 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얼음보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켠 폐는 얼마 안 가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더구나 습기 찬 호숫가의 달리기는 사실은 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육체가 정신을 이길 수 있을까, 의지가 환경을 이길 수 있을까, 진심이 편견을 이길 수 있을까….

뛴 지 얼마 못 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코가 차가운 공기를 다 데우지 못하고 폐로 보낸 탓인 거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도쿄를 떠올렸다. ‘육첩 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라고 쓴 윤동주의 시집을 끼고 일본으로 떠났던 나는, 학교 선배가 잠시 아이를 낳으러 한국에 간 사이 그 방을 빌려 머물고 있었다.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 옆구리에 끼고’ 아침에 어학원에 가서 초보적인 일본말을 하는 거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어학원에서 일본말을 몇 마디 하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일본어 단어를 외우다가 자주 호숫가로 나갔다. 나는 아케이드의 가장 유명한 집에서 줄을 서서 크로켓을 사다가 그것이 다 식을 때까지 그를 기다리곤 했었다.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 빙하의 단면이 잘려나간 듯한 외로움을 알아보았다고 한 번만 더 그를 보면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어머, 마침 크로켓을 샀는데, 아직 뜨거워요, 하나 드시겠어요? 나는 그것을 일본어로 연습했다. 우연이네요, 또 만나다니… 지난번엔 정말 고마웠어요. 나는 그 말도 연습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내게 그런 우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꽃이 다 지도록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호숫가 벤치에 앉아 혼자서 그것을 다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멀리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가방에 있던 인형을 꺼내 주었던 것은, 내 손에 더 이상 따뜻한 크로켓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연습해 두었던 말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는 그 인형을 받아들고 나를 향해 웃었다. 나도 웃었다. 말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덧니가 살짝 드러나 보이던 그의 미소와 내 웃음… 그건 통역도 연습도 필요없는 언어였으니까.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기도했었다. 하느님, 오늘 본 그 일본 사람 멋있었죠? 외로워 보이던데 외롭지 않게 축복해 주세요… 그리고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나는 속도를 좀 줄였다. 찬바람 때문에 뺨이 얼얼했다. 멀리 요한 성당의 십자가의 불빛이 보였다. 나는 다시 속도를 내보았다. 아까보다는 가슴이 좀 덜 아팠다.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저녁기도를 하고 이제 잠들고 싶었다. 오늘은 아마 그렇게 기도할 거 같았다.

하느님 왜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왜 이렇게 늦게 들어주셨어요, …그러니 이제 들어주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이 보기에 별로 좋지 않을 일이라면 들어주지 마세요. 내가 아무리 한 번만 들어달라고 빌어도 이제는 들어주지 마세요.


나는 성당을 향해 십자가를 긋고 다시 뛰었다. 그러고는 숨이 가쁠 때마다 주문을 외웠다. 오븐에서 막 꺼낸 따끈한 애플파이, 진한 레몬밤 티, 딸기가 그렁그렁 얹힌 하얀 생크림 케이크, 선암사 앞뜰, 연보랏빛 작약꽃 다발, 파초 잎에 내리는 빗방울 소리, 하얀 소금이 고운 푸른 마르가리타, 먼 하늘… 먼, 먼 하늘….


평생 쭉 이렇게 눈을 뜨게 될 거야
누구도 우리 미래를 방해할 순 없을 테니까

쓰지 히토나리

새로 온 통역자는 이연희 씨의 한국어를 일본어로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통역했다. 그 목소리에는 주저함도 후회도 슬픔도 번뇌도 전혀 느낄 수 없다.

카페 테라스의 전날 홍이가 앉아 있던 같은 자리에 그 사람이 앉았다. 때로 홍이의 잔영을 찾듯 통역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거기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이다. 한 순간에 나를 현실로 되돌려 보낸다.

“왜요?”

이연희 씨가 내게 물었다. 얼른 고개를 젓고는 다시 기자의 질문에 응한다. 언제나 말없는 목격자인 남산이 빛 속에 서 있다. 빛의 입자를 걸쳐 입은 남산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투명한 겨울날이다. 난 기분을 바꾸기 위해 몰래 심호흡을 한다.

그날, 나와 홍이는 결혼을 약속했다.

칸나에게 홍이를 새 애인이라 선언하고 얼마 안 있어, 막 동거를 시작했을 때였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이란 단어를 썼던 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가 하나가 될 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역시 눈부신 아침이었다. 행복한 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쭉 이렇게 함께 눈을 뜰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둘 사이에는 한 장의 천도, 둘 사이를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평생 쭉 이렇게 눈을 뜨게 될 거야. 누구도 우리 미래를 방해할 순 없을 테니까.

순간 홍이 얼굴이 밝아졌다.

―윤오, 약속이야!

그 티없이 웃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음을 해방시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배신과 증오와 회한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미소였다.

두려움 따윈 없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장애도 어떠한 적대심도 어떠한 불평등도 없었다. 나는 홍이를 힘껏 끌어안고 행복에 젖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슬픈 인생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홍이와 함께라면 행복해질 수 있다 믿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아침을 맞이하자.

결혼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쓰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칸나와 사귀면서 난 결혼이란 말을 자주 썼다. ―결혼식, 결혼피로연, 웨딩드레스…. 칸나가 떠난 뒤, 나는 그동안 쌓아올린 말이란 꿈의 궁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실어증과도 같은 상태에 빠졌었다. 칸나에게 한번 썼던 말을 홍이에게는 쓰고 싶지 않았다. 홍이와 칸나를 비교하고 싶지도 않았다. 홍이와의 사랑은 그렇게 진부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함께 아침을 맞이하자’란 말은 내게 결혼 이상의 선언과 같았다.

그날 나는 홍이 손을 잡고 기치조지 역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른 시간, 졸린 얼굴을 한 사람들을 앞질러 시합이라도 하듯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젊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사랑보다 뛰어난 것 또한 없고, 마음보다 깊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두 사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원전철 안에 있어도 우리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밀려 두 사람은 당당히 꼭 달라붙어 있을 수 있었으니까. 신주쿠 역에서 헤어질 때도 그날만은 슬픈 얼굴을 하지 않았다. 홍이는 플랫폼에 남아 언제까지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대체 어디에 인생의 함정이 있고, 도대체 어디에 인생의 덫이 놓여 있으며, 도대체 누가 두 사람을 폄하려 한단 말인가.

활짝 갠 하늘은 두 사람을 위해 펼쳐져 있었으며, 상쾌한 바람은 두 사람의 마음을 응원하기 위해 불었고, 공원의 반짝이는 나무들은 두 사람을 위한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합창단 같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기치조지 역에서 만나, 해가 뉘엿뉘엿 지는 공원을 산책한 뒤 단골카페인 <안나>에 들렀다. 주인인 사이토(齊藤) 씨는 홍이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두 사람은 내가 질투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홍이는 그날, 사이토 씨 가족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저기요, 사이토 씨, 이야기 좀 들어줘요. 우리 둘은 언젠가 하나가 될 거예요.

사이토 씨는 얼른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대답했다.

―앞으로 쭉 함께 일어나고, 함께 자고 함께 웃고, 함께 밥을 먹고, 그러기로 약속했어요.

내가 어른을 설득하는 듯한 말로 열변을 토하자, 홍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맞아요. 함께 아이를 키우고, 함께 집을 사고, 함께 노후를 맞이하는 거예요.

잘됐구나 하고 사이토 씨도 기뻐해 주었다. 주방에서 사이토 씨 부인이 얼굴을 내밀고는 축하해 하고 말했다. 달려나온 어린 딸을 사이토 씨가 안아 올렸다. 부모의 특징을 반씩 이어받은 사랑스런 딸을 진심어린 사랑으로 안고 있다.

순간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거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는 없었던 가족의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윤오, 언젠가 저렇게 네 아이를 키우는 게 내 꿈이야.

홍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아래서 홍이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결혼이란 걸 어딘가 두려워했다.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홍이도 일부러 결혼이란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행복과 같은 양만큼의 불안도 있었다. 그 불안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행복의 질에 달려 있다. 그날, 내 곁에서 홍이는 틀림없이 행복했었다. 행복은 평생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날의 우리 두 사람은 믿으려 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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