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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18>

등록 2005-10-13 16:24수정 2005-10-13 16:28

먼하늘가까운바다 <18>
먼하늘가까운바다 <18>
“참, 어제 그 일본 작가 접대는 잘 했어? 자식, 일본 녀석치고는 잘 생겼더라”

공지영

호반의 집, 내가 언제나 앉아 있곤 하는 그 집 이층 창가에 민준은 앉아 있었다. 창가를 통해서 내가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이층으로 올라가니까 민준이 언제나처럼 작은 문고판 책을 얼굴 가까이에 들고 읽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시간을 보니 약속한 시간에서 25분이나 지나 있었다. 내 자신이 약간 싫어지는 때가 이런 때이다. 늘 하던 실수를, 늘 하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그리고 심지어 그것에 뻔뻔해지지도 못할 때. 하지만 다음번에 그 순간이 온대도 내가 결국은 그 실수를 또 하고야 말 거라는 걸 알 때….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결심을 하거나, 구호를 한 달쯤 외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거나,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늘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나의 결점들을 그렇게 보게 될 때…. 그리고 내가 고작 거기까지의 인간이라는 걸 그래서 또 깨닫게 될 때.

“…맛있는 케이크 먹자. 내가 낼게, 오늘은.”

나는 미안하다는 표시로 그렇게 말하고 로즈허브티와 애플파이를 하나 시켰다. 민준은 언제나처럼 그냥, 브랜드 커피였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앙증맞은 투명한 유리주전자와 유리잔에는 아기 장미의 꽃봉오리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뜨거운 물속에서 꽃봉오리들이 진자줏빛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는 로즈허브티는 내가 민준과 만나면 자주 마시는 차였다.

그러고 보니 민준은 연회색 줄무늬 양복 차림이었다. 진한 감색 와이셔츠를 입고 그 안에 약간 광택이 있는 연베이지색 실크 넥타이를 맸다. 탁자에 걸쳐져 있는 것은 역시 연회색 홈스펀 외투였다. 토요일 오후 치고는 너무 포멀한 복장이었다. 네가 웬일이야, 멋진데, 하며 웃자, 민준은 으음, 친구 결혼식이 있었어, 하고 말했다.

“아침에 말이야, 넥타이를 매는데 어머니가 누구 결혼식이냐고 물으시잖아. 누구라고 말씀드렸더니… 걔 저번에도 결혼식 하지 않았니, 하시는 거야.”

민준은 커피에 설탕을 넣고 저으면서 말했다. 언제나 그 목소리, 낮은 미의 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네, 이게 두 번째예요, 하니까 어머니가 나를 약간 한심스럽게 쳐다보시더니, 걔는 재주가 많아서 벌써 두 번이나 가는데 넌 도대체 뭐하는 거냐? 하고 잔소리가 시작되기에, 그 자리에서 얼른 도망쳤지. 아마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나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웃기 시작했다. 스물아홉에 재혼이라는 말이었다. 민준은 남들이 하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근자근 재미있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미’ 음 하나로.

“나 그 애 싫어. 걔 전 부인이랑 신혼여행 다녀오자 마자 바람피운 그 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나쁜 거잖아.”

내가 애플파이를 입에 떠 넣고는 뜨거운 사과졸임 때문에 입을 헤벌리고 말했다.

“아니, 지금 결혼한 쪽이 실은 먼저였어. 집안 반대로 결혼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야.”

“그래도 싫은데 억지로 한 건 아니잖아. 약속했으면 지켜야 하잖아. 약속인데.”

민준이 커피잔을 차분하게 내려놓고, 언제나처럼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민준의 태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갑자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민준은 언제나 바르고, 사려 깊고, 배려가 많고, 그리고 신중하니까. 약속에 늦은 적도 없고, 늦는 일이 있으면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실수를 한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갑자기-아니 꼭 갑자기는 아니지만-, 그 애가 그러면 나는 늘 틀리고, 덜렁거리고, 감정적이고, 남 생각 못하고, 실수 투성이 철부지가 되는 그런 느낌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늘 내가 그런 사람인 것도 아닌데, 딱 그런 사람인 것만 같고, 심지어 가끔은, 그런 사람이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사는데, 꼭 나쁘다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더구나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건 말이야,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거, 그냥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니?”

민준은 약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과거, 오늘 그리고 내일… 그 말이 왠지 그냥 예사로이 들리지 않았다. 약간 야단을 맞거나 훈계를 듣는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참, 어제 그 일본 작가 접대는 잘 했어? 자식, 일본 녀석치고는 잘 생겼더라.”


흑요석 같은 요염한 눈동자는 곧바로 나를 향해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쓰지 히토나리

나 왔어, 하고 칸나가 말했다.

“하지만, 일에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고바야시 칸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등 뒤로 시선을 받으며 나는 취재를 계속한다. 아는 분이세요, 하고 이연희 씨가 귀엣말로 물어 할 수 없이 일본의 담당편집자라고 설명을 했다.

취재를 끝내고 보니 칸나가 자리에 없다. 테이블에는 빈 커피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이연희 씨에게 영어로,

“어제 통역하신 분이 실수가 많아 바뀐 건가요?”

하고 물었다. 이연희 씨를 대신하여 새로 통역을 맡은 여성이 아니오, 하고 일본어로 대답한다.

“어제 그분은 처음부터 대타였어요. 무슨 볼일이라도….”

“그 여자 분, 예전에 제가 알던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얼른 둘러댄다.

“소설가란 사람들은 추억을 더듬는 것이 일이어서, 향수를 자극하는 듯한 분을 만나게 되면 금방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지요.”

영감이란 거군요, 하고 통역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본다. 나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영감이 없다면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겁니다.”

하고 덧붙였다.

“저…. 어제 통역해 주신 분은 서울에 사세요?”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아무런 의심의 눈빛도 없이 이연희 씨가 서툰 일본어로 대답한다.

“분당이란 교외에 사세요. 호수 근처에 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 본 적은 없어요.”

설마 영감을 구하러 분당까지 가실 생각은 아니겠죠? 하고 통역이 놀리듯 물었다.

통역자와 이연희 씨가 한국어로 소곤소곤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돌자, 내 상상은 더욱 날개를 단다.

“선생님, 미리 말씀드려 두는데 최홍 실장님은 애인이 계세요. 이야기 해 봐야 아마 소용없을걸요.”

통역자가 빠른 어조로 못을 박는다. 이연희 씨가 웃는다. 함께 웃는 내 얼굴은 아마도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애인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진다.

체크인을 끝낸 고바야시 칸나를 호텔 바로 데려가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지 추궁했다.

“휴가를 냈어. 구도 선생님 강연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고, 서울과 후쿠오카는 엎어지면 코 닿을 데잖아? 잠깐 들렀다 간다고 아무도 뭐랄 사람 없다고.”

앞머리에 가려진 칸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생기를 잃고 있던 칸나의 눈이 나를 흘겨보듯 일자를 그리자 눈가에 깊고 부드러운 한 줄의 주름이 만들어졌다. 흑요석 같은 요염한 눈동자는 곧바로 나를 향해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당신을 데리러 온 거야.”

한 편의 시를 읊는 듯한 칸나의 낮고 힘 있는 목소리에 마음속에 있던 모든 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감정의 호흡마저 멎고 만다.

“당신이 날 한 번 더 사랑하게 되길 7년이나 기다리고 있어.”

“그 이야기라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고, 또 몇 번인가는 다시 되돌리는 시도도 했잖니.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렇게 되질 못했어.”

“나도 알아. 당신한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시선을 비끼며, 그것도 이유이긴 하지, 하고 말끝을 흐렸다.

“넌 작가인 날 좋아할 뿐이야.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네가 자랑할 수 있는 날 좋아할 뿐이라고. 넌 날 만들어 가고 싶은 거야. 날 발굴해 내고 그리고 내 미래를 네 생각대로 그려 가고 싶은 거라고.”

칸나가 웃었지만 그 눈은 웃지 않았다.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깬 것은 안쪽에서 나타난 외국인 뮤지션들이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던지며 헬로, 하고 떠들썩하게 인사를 한다. 바 한쪽에 있는 작은 무대에서 사운드 체크가 시작된다. 꼼꼼한 리허설이 아닌 곡의 전주 혹은 간주의 일부를 확인하는 정도의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연주하는 곡들은 왕년의 재즈와 누구나 알 수 있는 팝이었지만, 탄력적인 연주를 몇 분 들려주고는 다시 악기를 놓고 우르르 잡담을 하며 분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유행가 같은 건 딱 질색이야.”

고바야시 칸나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

“추억에 매달려 사는 사람을 보면 슬퍼져.”

“그건 내 얘기구나.”

칸나는 시선을 피해 뮤지션들이 사라진 무대에 해변의 표류물처럼 남겨진 악기들을 바라본다.

“나한테는 마지막 기회니까.”

마치 예전의 블루스 곡을 흥얼거리듯 그리운 목소리로 칸나가 고백했다. 손목에 찬 카르체 시계가 은빛으로 빛난다. 초침이 없는 시계인데도 왠지 초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시차가 없다니 거짓말 같지,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시차?”

칸나는 쓴웃음 지은 후, 말한다.

“추억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날 봐 줘.”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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