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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19>

등록 2005-10-13 16:26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게 아니야. 그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지”

공지영

나도 모르게 얼른 창밖을 내다보고 말았다. 이럴 때 응, 하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면 이야기를 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면 민준아… 있잖아, 그 사람이 그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 그도 아니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걸까. 창밖에는 하얗게 얼어버린 호수에 엊그제 내린 눈이 아직 쌓여 있었다. 그 한 귀퉁이 아직은 얼지 않은 청동빛 물 위로 오리들이 꽁지를 쫑긋쫑긋 세우고 헤엄을 치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배를 대고 사는데 춥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일찍 어둠은 내리기 시작해서 멀리 요한 성당에 불빛들이 어둑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난 이 시간이 참 좋아. 이렇게 어둑해지고, 멀리 불빛들이 노랗고….”

내가 말을 돌리자 민준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난 이런 시간에는 오늘은 무슨 술을 마실까, 생각해, 그도 아니면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일본에서 보낸 일 년 육 개월 때문에 나보다 먼저 졸업을 하게 된 민준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이 공원은 저수지였다. 이 카페 자리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조그만 간이식당이 있었다. 이 앞을 걸으면서 눈길에 내가 미끄러지려고 하니까 내 손을 잡다가 그가 말했었다.

─ 같이 미국으로 가자. 이 미끄러운 도시에 널 놔두고 가는 건, 꼭 우물가에 어린 아이를 놔두고 가는 것만 같아서…

어색하게 손을 빼면서 내가 말했었다.

─ 야아, 그런 말은 뭐라도 좀 하고 나서 하는 말이지.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뭐라는 건…

민준이 웃으며 말했었다.

─ 결혼하고 하면 되잖아. 하나씩, 하나씩… 그럼 지금 우리 그 하나부터 해 볼까?

집 앞으로 날 데려다 주면서 민준이 나를 우리 집 담 밑으로 가볍게 밀었다. 하필이면 내가 돌아와 집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늘 울던 그 담 밑, 그 자리였다. 결혼을 해 버리려던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엄마는 말이 없어진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지. 결혼은 좋은 사람하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했던 그 사람말고 민준이랑, 착하고 예의바르고 믿음직하고 좋은 민준이랑, 무엇보다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인 민준이랑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아이를 안고 공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민준이 날 안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결혼은 할 수 있는데 입은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던 거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가볍게 밀었다. 가볍게 밀었다 해도 거절의 뜻은 그에게 분명히 전달된 것 같았다.

─ 미안해 민준아, 그냥… 내 말은… 그냥 못하겠어. …미안해 나 너무 촌스러운 거 같아…

호숫가를 스쳐온 차가운 바람이 그와 내가 서 있는 틈으로 맹렬하게 불어갔다. 그날이었을 것이다. 민준이 물었었다. ‘너, 일본에서 무슨 일 있었니?’

─ 말야, 무슨 이런 이상한 운명이 있니? 일본으로 가기 전에는 민준이가 있어서 다른 남자랑 데이트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 일본에서 돌아와서는 그놈의… 추억 땜에 민준이랑 데이트도 못하겠어.

나는 친구 지희에게 말하곤 했었다. 지희는 예의 내 말을 분석하느라 머리를 많이 쓰는 표정으로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런 이상한 운명이 확실히 있긴 있지, 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들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준고가 서 있었다. 결국은 또 그가 서 있는 것이다. 호숫가에서 뛰어오는 나를 녹음 아래서 바라보던 그가. 이곳에 돌아온 그가. 지금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서 걷고 있을 그가. 이렇게 해지는 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갈래? 나 술 먹고 싶어.”

내가 말했다. 민준은 아무 말 없이 코트를 집어 들었다.


“날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이제 결혼해 줘 이래봬도 아직 청혼하는 남자들이 많다구”

쓰지 히토나리

일본과 한국이 같은 표준시간을 공유하는 시간의 쌍둥이라는 것을 나는 바다를 건너올 때까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국과 일본은 어째서 이렇게 다른 걸까, 위도 때문일까?”

얼어붙은 인사동 거리에서 침묵을 메우기 위해 나는 하얀 입김으로 싼 말을 토해냈다.

“그렇게 다르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고바야시 칸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흥미로운 듯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말한다. 폭 10미터 정도의 번화한 거리에는 잡화상, 선물가게, 도자기점, 카페 등 다양한 상점들이 처마를 나란히하고 있으며,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활기에 넘친다. 스스키노나 우에노의 아메요코, 하라주쿠의 다케시타 거리, 나하의 국제 거리와도 통하는 아시아적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다. 홍이 차를 타고 바라보았던 명동 밤거리의 현대적인 광경과는 대조적이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 뺨이 아프다. 칸나가 내게 팔짱을 낀다.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척하며 슬며시 그 손을 뿌리친다.

그 때, 낯익은 인형이 내 눈에 들어왔다. 크기나 모양은 여러 가지지만, 홍이가 준 닥종이 인형이 틀림없다. 그 속에는 휘파람 부는 소년도 있었다. 그 곁에서 다정히 웃고 있는 소녀인형도. 오래 전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무심코 유리에 손을 대고 들여다본다.

홍이에게 받은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였는데, 쇼윈도 안의 인형은 그보다 몇 배는 크다.

“귀여운 걸. 전부 커플인형이야.”

칸나가 뿜은 숨이 쇼윈도에 부딪혀 주변을 하얗게 흐려 놓는다.

“어머! 저 인형은 본 적 있는 거네.”

칸나가 유리에 얼굴을 대며 말한다. 나는 발길을 돌려 얼른 그곳을 떠난다. 뒤쫓아 온 칸나가 추궁하는 투로 말한다.

“저 인형하고 똑같은 게 준고 방에 있지 않았어? 휘파람 부는 사내아이 인형을 본 기억이 있는 걸.”

나는 발을 멈추고 칸나를 돌아본다. 종종걸음으로 쫓아 온 칸나와 부딪칠 뻔 한다. 또다시 시간이 멈춘다. 두 사람이 토해내는 하얀 입김이 서로 얽히고 섞여, 그곳에 안개처럼 그리운 시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고바야시 칸나의 갈색을 띤 눈동자가 곧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7년이란 세월의 물결이 여기서도 밀려온다. 천진난만했던 여대생은 불과 7년 만에 장래가 촉망되는 편집자로 성장했다. 길었던 머리를 싹둑 자르고 어떤 남자들 못지않게 일을 처리해 내는 모습에는 커리어우먼이라는 말이 제격이다. 신진작가부터 대작가까지를 두루 담당해왔으며,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에서 대중적 베스트셀러까지 폭넓은 책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학창시절의 칸나는 늘 남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숲 속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우아하게 춤추는 아름다운 나비와 같았으며,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꽃과 같은 존재였다. 그 화려한 존재감 때문에 사람들 입에 늘 오르내리는 것은 편집자가 되고 나서도 여전하여 남성작가들과 염문이 도는 일도 자주 있었다. 대부분은 여성편집자들의 시기로 만들어진 창작물이었지만, 고바야시 칸나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소문의 상대가 된 작가와 운명을 함께할 것을 자처해 보다 강고한 신뢰 관계를 쌓아갔다. 탐욕스럽고 너무 계산적인 탓에 하나하나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수법은 학창시절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대담하고 보다 야심적이라 할까. 그러나 문학의 종말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작가들에게 고바야시 칸나만큼 명석하고 의지할 수 있는 편집자도 드물어 결과적으로는 우수한 작가들이 그녀 주위로 모이게 되었다.

“무슨 생각 해?”

홍이와 같은 질문에 나는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만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알고 있잖아.”

칸나가 반 발짝 내게 다가오더니,

“아니, 늘 몰랐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준고만은 모르겠어. 아마도 그래서 준고한테 더 마음이 쓰이는지 몰라.”

억양이 없는 말투로 칸나가 말했다.

“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알아.”

“그럼, 나하고 결혼해.”

칸나는 어째서 이렇게 얼어붙을 듯한 바람 속에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 대해 뭐든지 다 안다면 날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이제 결혼해 줘. 이래봬도 아직 청혼하는 남자들이 많다구.”

애처로운 말에 마음이 흔들린다. 농담을 할 생각으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했을 뿐이다. 뭔데 하고 물으면, 배고프지 하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심각한 분위기를 다소 여유롭고 가볍게 바꿔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접근하지 못할 예리한 칼날을 세우고 회피하려고만 하는 내 눈을 뜨게 한다.

고바야시 칸나의 입에서 결혼이란 말이 나온 건 처음이다. 그만 당황해 무심코 그녀 눈동자를 바라보고 만다. 흔들리지 않는 강고한 안광이 눈동자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다.

“나하고 결혼해.”

칸나의 눈이 점점 젖어 간다. 야심가의 눈동자가 젖어 가는 것 또한 처음 보는 일이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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