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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20>

등록 2005-10-13 16:29수정 2005-10-13 16:29

먼하늘가까운바다 <20>
먼하늘가까운바다 <20>
“감정은 변하는 거니까 그건 고마운 거야, 변하니까 우린 사는 거야”

공지영

호숫가의 포장마차에는 때 이른 손님들이 두엇 있었다. 내 잔에 소주를 따라 놓고 민준은 검은색 목도리를 여민 채 두 손을 코트에 찌르고 앉아 있었다. 그에게 고마울 일은 참 많았다. 그에게 미안할 일도 참 많았다. 여기서 가끔 둘이 술을 마시다가 멀리 떨어진 율동공원의 회장실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민준은 화장실까지 따라와 내 백을 들고 여자 화장실 앞에 서 있곤 했다. 나는 소주를 한 입에 털어놓고 그에게 잔을 권했다.

“천천히 마셔.”

민준이 말했다. 그도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일본 술이었고 지금은 한국 술이다. 그때는 그가 옆에 있었고 지금은 민준이 옆에 있다. 그때는 스물둘이었고 지금은 스물아홉이고, 그때는 어떻게든 아직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내가 최홍이고, 내가 한국 사람이고, 여자이며 미혼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그날 준고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며 민준 이야기를 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던 남자친구라고, 멋있고 잘생기고 착하다고…. 준고는 헤어진 칸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준고의 등에 업혀 그의 집으로 갔고 다음날 아침 그 방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그곳이 그의 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내 곁에 없었다. 나는 혼자서 빙그레 웃었던 것 같다. 운명의 문이 열린 것 같았고, 속마음을 말하자면, 이제 무언가 시작이 되는구나 싶었다. 기뻐서 말이다.

“가끔은 말이야. 내가 나쁜 여자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민준은 말이 없이 안경을 잠시 올렸다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딱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또 가끔은 내가 나쁜 여자였으면 좋겠어.”

차가운 바람에 발이 시렸다. 나도 보라색 털 잠바에 손을 찔러 넣었다. 민준이 내 앞으로 어묵 국물을 밀어주었다.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대….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만 더 고통스럽기를…. 오래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너를…”

민준이 내 입에 닭꼬치를 하나 넣어주었다.

“맛있지? 안주 먹으면서 마셔.”

민준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닭꼬치를 겨우 씹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감정이라는 게 말이야.”

민준은 내 손에 자신이 마신 잔을 쥐어주더니 소주를 가득 따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셨다. 민준은 내 입에 김치 한쪽을 집어넣어 주고는 맛있지?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마셔. 맛있게 먹고 마셔. 지금은 그러면 좋아… 춥다 그치?”

민준은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내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야아, 너 왜 내가 모처럼 좋은 말 좀 하려는데 입 속에다 뭘 자꾸 넣어가지고는 못하게 하고 그래?”

민준이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려다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언제 못하게 했어, 먹으면서 천천히 하라구 했지. 말할 시간은 많을 거야. 그러다보면 그 말을 하는 동안, 네가 말하는 그 감정이라는 것도 변해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내가 왜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게 되고… 감정은 변하는 거니까. 그건 고마운 거야. 변하니까 우린 사는 거야.”

그날 내가 무슨 말을 더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춥다는 생각이 들었고, 포장마차의 포장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검은 거울 같은 호수가 보였고, 그럴 때 그날처럼 비가 왔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집 앞에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민준은 돌아섰다. 문득, 지금 민준이 나를 안으면 입을 맞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민준은 내 이마에 흩어져 내린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귀찮더라도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자. 감기 걸리겠다.”

돌아서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하늘엔 별이 후득후득 했다. 내 입에서 하얀 김이 수증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다시 하루가 겨우, 지나갔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갈 날이 이제 나흘 남았다.


“부탁이야,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날 비교하지 말아 줘”

쓰지 히토나리

배가 고팠지만 음식점이 아닌 스타벅스로 발길을 옮겼다. 고바야시 칸나와 나는 차가운 1월의 공기 속을 즐거운 듯 팔짱을 끼고 걷는 사람들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맛이 같아서 좋다.”

양손으로 감싸 안은 종이컵을 들여다보며 칸나가 중얼거린다.

“왠지 좀 차분해진다.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왔거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도쿄 작업실 근처에도 스타벅스가 있다. 늘 주문하는 카푸치노는 서울에서도 같은 맛이다.

“어디를 가든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뭘 초조해하는 건지…. 나답지가 않은 것 같아. 그렇잖아, 결혼해 달라니…. 내가 먼저 말을 꺼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서른이 가까워져서일까. 나이 같은 건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거 정말 싫다.”

나도 카푸치노를 마신다. 몸이 따뜻해지자 갑자기 공복감이 밀려든다.

“준고랑 둘이서 자주 커피 마시러 갔었지. 시모기타자와에 있는 스타벅스로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이나 영화를 본 다음에.”

“그래, 하지만 네가 헤어지잔 이야기를 갑자기 꺼낸 것도 거기서였지.”

칸나가 나를 보며 아, 무덤을 파고 말았네 하더니 웃는다.

“함께 할 수 있음 좋을 텐데….”

웃음을 거둔 칸나가 지난날을 그리듯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준고가 내게 한 말이야. 그 때 준고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기억해. 그 마음을 되찾기가 이렇게 어려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시선을 비낀다. 젊은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커피숍 안을 들여다본다. 그 날의 우리 모습이다.

그 무렵 나는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첫사랑이었고 매일이 꿈만 같았기 때문에. 아직 학생이었음에도 우리는 결혼에 대해 몇 번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늘 나였다. 칸나는 그래, 좋겠다 하고 맞장구는 쳐주었지만, 대부분은 건성이었다.

─ 좋아. 준고가 좋을 대로 해. 준고가 결혼하고 싶다면 난 준고 신부가 돼 줄게. 졸업하고 준고가 유명한 작가가 되면, 바로 결혼식을 올려.

나는 불만이었다.

─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으면,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 그래, 무명작가는 싫어. 그렇잖아, 소설가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존재인데. 준고도 알아? 작가하고 연예인한테는 은행에서 돈도 빌려주지 않는다는 거.

절망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소설가를 목표로 하고 있기는 했지만, 글로 먹고 살 자신은 없었다.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이야기를 쓰는 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칸나의 유명한 작가가 되면 결혼하자는 말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칸나에게 버려진 뒤에는 글을 쓸 아무런 기력도 일지 않았다.

“그렇잖아, 그땐 아직 철이 없었다고. 겨우 스물 고만한 나이에 뭘 알았겠어.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서른을 눈앞에 두고 이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어. 부탁이야,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날 비교하지 말아 줘.”

칸나의 말로 겨우 추억에서 나올 수 있었다. 홍이와 함께했던 그 광적인 열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 년간 나는 칸나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내 안에는 칸나와 함께했던 추억이 있다. 그것들은 희미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어리석고 유치하고 잔인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뿐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유년시절 못지않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색 바랜 청춘의 낙서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홍이와의 추억은 생생하고 쓰라리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뿐이다. 같은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쪽은 마르지 않는 수맥이 흐르고 있는 것같이 살아있는 기억들뿐이다. 앨범 속의 오래된 사진이 아닌 지금도 퇴색하지 않고 움직이는 필름과 같은 선명한 영상인 것이다.

“있잖아, 준고. 조금 전에 내가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겠어요?”

마지막 말의 톤이 낮아진데다 거기만 정중한 말씨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옆에 앉은 칸나를 바라볼 수가 없다.

그녀가 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란 걸 안다.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얼마나 진지한지도 전해온다. 고바야시 칸나는 이미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있고 학생시절의 그녀와 다르다는 것도 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사고나 삶의 방법에 아직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긴 하나, 내가 작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도 그녀이고, 각박한 출판계에서 응원단장 같은 역할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마워.”

나는 칸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불타는 듯한 시선이 내 눈동자에 꽂힌다.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함부로 시선을 비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서로를 응시할 수도 없어 나는 몰래 한숨을 몰아쉰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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