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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22>

등록 2005-10-13 16:33

먼하늘가까운바다 <22>
먼하늘가까운바다 <22>

결혼이라는 것만큼 이미 해본 사람은 하지 말라 하고,
하지않은 사람은 기어이 하고 마려는 그런 것이 또 있을까
공지영

어젯밤 술을 과하게 마신 탓인지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어젯밤 그의 영혼은 나와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줄은 알지만 갑자기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서운했다. 일요일 아침 집 안이 조용한 것을 보니까 모두들 성당에 간 모양이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일어나 두 팔을 쭉 펴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층 내 방 창 앞에 매달아둔 바람종이 작게 땡그랑거린다. 오디오 앞에 앉아 시디장에서 로라 피기의 <아이 러브 유 포 센티멘털 리즌>을 찾으려고 하는데 문득 비창 소나타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저 하나의 시디였을 뿐인데 준고라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쿵하고 내려뛰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 나는 저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듣지 않아도 그 선율이 언제나 내 귓가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 슬픈 귀가 열린다, 라고 그제 밤 록이는 그가 쓴 구절을 내게 읽어주었다. 그 그리운 사람이라는 게, 설마 나니? 하고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당에 못 갔으니까 호숫가로 나가 달리기라도 하려고 했는데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창백한 겨울 햇살은 커튼 너머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술 좀 깼니? 해장국으로는 북어를 넣은 콩나물국이 제격이야. 나는 어제 집으로 오는 길에 혼자 단골 바에서 한잔 더 마셨어. 그래 나쁜 여자가 돼 봐.^^* 홍, 그래야 네가 행복하다면

민준의 메시지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응, 그럴게 하고 문자를 보내고 커피를 한잔 더 마시려고 하는데 다시 민준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 콩나물국 잘 끓인다. 아아, 매일 콩나물국 끓여주고 싶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을 읽었다. 어제 민준은 해가 지는 시간이면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결혼, …엄마는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친구들은 꽃잎이 지듯 하나둘씩 미혼 딱지를 떼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것만큼 이미 해본 사람은 하지 말라 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기어이 하고 마려는 그런 것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면 그토록 꼼꼼히 리뷰들을 챙기면서 결혼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의 리뷰도 신경 쓰려고 하지 않는다.

마당이 떠들썩하면서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록이가 아빠에게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아빠 서재 앞을 지나가는데 내 싸이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야, 이상한 생각에 아빠, 하고 부르니까 음악이 뚝 그쳤지…. 내가 올리는 글 몰래 보는 거 싫단 말이야.”

록이는 아빠가 가끔 그녀의 싸이에 들어가 검색을 하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싸이라는 거 남 보라고 글 올리는 거 아니냐?”

아빠가 여유 있게 되받았다.

“아빠는 남이 아니잖아.”

엄마는 식구들이 점심으로 먹을 국수를 삶는 것 같았다. 나는 정원으로 나왔다. 번개가 어젯밤 일을 기억하는지 벌떡 일어나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준고를 위해 요리를 한 적이 있었다. 어학원 친구에게 야키소바 만드는 것을 배워 와서 열심히 볶았다. 올리브유를 넣어 볶으라는 대목에서 나는 마가린을 넣었다. 버터를 넣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비쌌기 때문이었다. 바짝 마른 그를 위해 더 영양가 많은 걸 넣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만 너무 볶았기 때문인지 그가 한 젓가락을 드는 순간 접시에 담긴 국숫발들이 서로 붙어서 통째로 들어 올려지고 말았다. 무참한 내 표정을 본 준고가 말했다.

─ 맛… 있겠다… 고는 못 하지만 괜찮아.

그는 부엌으로 가서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다가 스테이크를 썰 듯이 야키소바를 썰어 입에 넣었다.

─ 괜찮아 베니, 이 세상에 이런 특이한 야키소바를 먹는 행복한 남자는 나뿐일 거야.


칸나가 가방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꺼냈다
“비행기에서 읽었어 당신이 권해 준 시집이야”

쓰지 히토나리

자꾸만 물김치로 젓가락이 간다. 내가 두 번이나 물김치를 더 달라고 하자 고바야시 칸나가 히죽히죽 웃는다.

“그거 정말 맛있지?”

나는 응, 하고 대답한다.

“준고는 워낙이 말이 없는데 먹기 시작하면 더 과묵해 져.”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또 응, 하고 대답한다. 칸나가 가방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꺼냈다.

“비행기에서 읽었어. 당신이 권해 준 시집이야.”

나는 좋아하는 책을 사서 사람들에게 권하는 습관이 있다.

“<아우의 인상화>란 시가 좋았어.”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김치로 손을 뻗는다.

“준고,? 응 하고 그래 밖에 안 할 생각이야? 그리고 아까부터 물김치만 먹고 있잖아.”

칸나가 책갈피를 끼워두었던 페이지를 펼쳐 조용히 읽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멈추어 /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 ‘사람이 되지’ /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나한테 나이 차이가 있는 남동생이 있었던 거 알고 있었어?”

나는 얼굴을 들었다.

“어렸을 때 사고로 죽었어. 늘 내가 돌봤기 때문에 그 아이가 죽은 게 내 탓이란 생각을 했었어. 항상 함께 있었는데 그 날만은 함께 있어주지 못했거든. 그게 제일 후회스러워.”

나는 다시 잔을 들었다. 달지만 센 술이다. 위와 영혼을 함께 씻어주는 것 같다. 나는 칸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그녀에게 주었다.

“동생을 위해 마시자.”

칸나의 잔에 술을 따르고 가볍게 부딪친다.

“준고가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를 가지고 왔을 때, 난 솔직히 싫었어. 그 소설에 나오는 한국인 여성이 당신이 잊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에 관한 소설을 왜 내가 편집해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 준고 작품을 통해 나도 그 사람하고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리고 윤동주 시 덕분에 온화한 마음으로 서울에 올 수 있었어. 죽은 남동생의 혼과도 하늘에서 만났던 것 같고. 저기, 좀 이상한 일이지만, 비행기에서 이 시를 읽고 창밖을 보는데 동그란 무지개가 보이지 뭐야. 마치 거기에 동생이 있는 것 같았어.”

“원형의 무지개라….”

“본 적 있어? 구름 위에 말이야, 마치 튜브처럼 둥근 무지개가 나타난 거야….”

평소에는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는 그녀가 잔을 모두 비웠다.

“이 술 마시면 위가 깨끗해지는 것 같지 않아?”

고바야시 칸나는 응,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날, 헤어지잔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칸나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보였다.

─ 나하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거야?

─ 응.

─ 하지만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어째서 갑자기 얘기가 이렇게 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그 때 칸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생각이 난 듯한 조금은 멍한 미소였다.

─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난 앞으로 살기 힘들 거야.

내 간절한 호소에 칸나는 잘라 말했다.

─ 널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뿐이야. 더 이상의 이유는 없어.

어째서 사랑할 수 없게 됐냐고 추궁했다. 칸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

─ 이유는 나도 몰라. 갑자기 식어 버렸어. 더 이상 널 사랑할 수 없단 느낌이 든 것뿐이야. 이 느낌은 진실한 것이고.

─ 그건 말이 안 돼.

─ 그래, 준고. 말이 안 돼, 이런 건 이유가 없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세상의 부조리하고 일그러진 숨은 모습을 본 그날 밤부터, 번민의 밤과 우울한 낮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물어 보고 싶었다.

“그때, 넌 어째서 날 사랑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됐니?”

칸나가 고개를 들고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눈동자 속에 기억의 빛이 겹겹이 교차하며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빛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모르겠어. 그땐 갑자기 당신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 당신을 언제까지고 사랑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칸나가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어리고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했을 때 일이야. 부탁이야. 사람이란 변하는 거야.”

순간 나는 최홍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 웃는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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