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24>
다시 돌아와 이렇게 호숫가를 뛸 때마다 나는 저 쪽에서 준고가 서 있는 환영을 보기도 했었다
공지영
나는 엄마의 만류도 듣지 않고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운동화끈을 바짝 조이고 집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카키색 파커 주머니에서 검은 털모자를 꺼내 뒤집어쓰고 장갑도 끼었다. 그리고 조금씩 보폭을 빠르게 걸었다. 호숫가에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사람들이 몇 명 서 있었을 뿐, 일요일인데도 아주 한산했다. 호반의 집 앞에서부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 왜 그렇게 뛰는 거야?
준고는 가끔 내게 물었다. 아마도 내가 날마다 호숫가를 돌기 시작했고 점차 거리를 늘려 한 바퀴에서 두 바퀴, 드디어 네 바퀴까지 뛸 무렵이었을 것이다.
─ 그냥, 뛸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니까.
나는 윤동주의 시집을 끼고 젊은 윤동주처럼 일본으로 떠났었다. 할아버지처럼 한글학자가 되거나 아니면 윤동주를 연구하는 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동그랗고 고풍스러운 안경을 끼고 있는 만주 용정 출신의 이 젊은 시인은 얼굴까지 해사한 것이 너무도 내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시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사내. 나는 일본인인 준고에게 시인 윤동주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에게 가지는 복잡한 감정이 이 시인의 삶과 죽음으로 인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왔는지. 할아버지가 일본에 대해 가졌던 분노를, 사랑했던 여자랑 결혼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슬픔을. 그런데 나는 윤동주도 잃어버리고 할아버지의 분노도 잃어버리고 그냥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건 계산하지 못했었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때문에 포기했던 사랑을 나는 엄마와의 연락도 끊고 해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죽어 갔던 것은 적어도 준고의 잘못은 아니었다. 함께 찾아갔던 집에서 첼로의 연주를 들려주던 선량해 보이던 준고 아버지의 잘못도 분명 아니었다. 화사했던 준고 엄마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온 우주의 풍요로움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문제는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배반하는 일 같은 것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사랑의 속성이었을 뿐, 우리는 영원할 거라고, 우리를 믿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의 빛이 내 마음 속에서 밝아지면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만큼 더 짙게 드리운다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나만은 다를 거라고, 우리들의 사랑만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 그것 자체도 사랑이 우리를 속이는 방식이라고 지희는 분석하곤 했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둘, 유학생이 되면 공부를 하는 게 제일 힘들 줄 알았는데 실은 외로움이라는 제일 큰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도, 게다가 누군가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되면 몸살처럼 늘 신열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과연 누군가를,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한 사람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바보가 또 있을까.
이제 호수 건너 번지점프대가 있는 곳까지 가면 아마도 추위가 좀 가실 것이었다. 이노가시라 공원, 준고는 어떤 겨울날에는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뛰어온 나를 업어주기도 했고 어떤 날은 베니, 힘내, 하고 손을 흔들기도 했었다. 다시 돌아와 이렇게 호숫가를 뛸 때마다 나는 저 쪽에서 준고가 서 있는 환영을 보기도 했었다. 어떤 시인이었지, 순이를 사랑하던 그날부터 거리에 수만 명의 순이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멀리 검은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그 위에 방한복을 걸치고 서 있었다. 왜 이런 겨울 호숫가에 혼자 서 있을까, 준고 같다, 내가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과 함께 내 시선이 누군가의 포충망에 걸리듯 걸려버렸다. 그물을 뒤집어쓴 짐승처럼 나는 그의 시선에 빨려 들어갔다. 처음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 베이비파우더처럼 하얀 벚꽃잎이 지고 있던 그날처럼 그의 확대된 동공이 내게로 확 다가와 꽂혔다. 강력한 자석 앞에 선 작은 쇠처럼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흰 벚꽃들이 일제히 지는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부드러운 눈보라. 화이트 아웃, 이라고 누군가는 표현했던가, 극지방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고 거기에 선 사람은 방향감각을 상실한다고. 화이트 아웃과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거기 준고의 짙은 갈색 눈동자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난 거기서 나타날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쓰지 히토나리 호텔 엘리베이터 안, 고바야시 칸나가 내게 안긴다. 억지스럽지 않게 살짝 다가오듯, 머뭇거리는듯한 다정한 포옹이다. “내가 싫은 거야?” 칸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칸나가 내릴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스르르 내게 멀어지듯 내려 손을 흔든다. “잘 자고 내일 만나.” 나도 잘 자라고 인사를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칸나가 나를 노려본다. 그 강렬한 시선이 강철 문으로 겨우 가려지자, 몸에 힘이 빠지고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튿날, 창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당이란 지명이 언제까지고 목에 걸려있을 뿐이다. 눈을 부비며 햇살에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분당이란 지명을 반복해 본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렌터카를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 마치 처음부터 오늘 일정에 들어있는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일요일이어서 취재가 없는 대신 일본인 모임의 호의로 오후부터 시내관광이 예정되어 있었다. 분당이란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점심시간까지는 호텔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오. 도로사정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서울시내에서는 1시간 정도는 걸립니다.” 나를 맞은 운전기사가 노련한 일본어로 분당이 교외에 있는 신도시라고 설명한다. 일본어를 잘 하시네요, 내 말에 운전기사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미묘하지만 목소리의 톤에 그늘이 있는 것 같아, 더 이상은 묻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 책을 일본어로 읽었습니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어요. 감사합니다.” 운전기사의 낮은 목소리가 내 마음을 두드린다. 분당은 낮은 산들을 깎아 개발된 베드타운일까. ─ 2, 30층의 고층아파트가 쭉쭉 솟아있는 인공적인 도시였다. 일요일 오전이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상점셔터는 아직 내려진 채고, 거리에는 운동 삼아 산책을 하는 듯한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일과일까,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어째서 홍이는 이곳을 선택했을까. 분당은 가족 단위의 도시로 도쿄의 하치오지나 다마시와 닮아 있다. 여기서 그 애인이란 사람과 함께 사는 걸까. “주소 같은 건 없습니까?” 거울에 운전기사 얼굴이 살짝 비쳤다. 목소리로 받은 인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다. “아니오, 주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근처에 호수가 있는데, 내가 찾는 사람이 그 호수 주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호수요?”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운전기사는 지도를 꺼내 살펴보기 시작한다.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차 바로 곁을 달려 지나간다. 혹시 홍이가 아닐까, 얼른 뒤돌아보았지만 아니었다. 여자는 횡단보도를 건너 고층아파트 사이에 있는 어린이놀이터를 지나 숲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있군요. 이 근처에 큰 저수지가 있어요.”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조금은 생기가 돈다. “그럼 거기로 부탁합니다.” “꽤 넓은 저수지인데 어느 쪽으로 갈까요?”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거기서 홍이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운전기사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난 거기서 나타날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 사람은 7년간 매일 달리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 호수 주변을 달리는 것이 일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사님 짐작으로 그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곳에 차를 세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지만, 젊은 기사는 알겠습니다, 하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는 자세한 것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달리자 운전기사가, 왼쪽을 보세요, 하고 말했다 햇빛을 받은 호수면이 반짝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마른 겨울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집들이 보인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무성했지만, 다른 주변은 최근에야 공원으로 조성된 듯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 호수입구에 있는 카페 앞에서 차가 섰다. 일단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개점 준비로 바쁜 카페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는 돌아왔다. “달린다면 역시 저 길이라는군요.” 운전기사는 호숫가로 난 작은 길을 가리키며 말한다. “한 바퀴 도는 데 4킬로 정도랍니다. 이 근처 사람들이 조깅코스로 자주 이용한다는군요. 조금 더 가면 전망이 좋은 곳이 있다는데 거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부탁합니다, 나는 힘주어 대답한다.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해,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내리다 호수를 반쯤 돈 다음에 멈춰 섰다. 전망시설이 있는 작은 언덕 같은 곳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쉬거나 가져온 도시락 등을 먹으며 한가롭게 보내지 않을까. 낮은 비탈이 호수 주변까지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밖은 추울 텐데요.” 운전기사가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이제 호수 건너 번지점프대가 있는 곳까지 가면 아마도 추위가 좀 가실 것이었다. 이노가시라 공원, 준고는 어떤 겨울날에는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뛰어온 나를 업어주기도 했고 어떤 날은 베니, 힘내, 하고 손을 흔들기도 했었다. 다시 돌아와 이렇게 호숫가를 뛸 때마다 나는 저 쪽에서 준고가 서 있는 환영을 보기도 했었다. 어떤 시인이었지, 순이를 사랑하던 그날부터 거리에 수만 명의 순이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멀리 검은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그 위에 방한복을 걸치고 서 있었다. 왜 이런 겨울 호숫가에 혼자 서 있을까, 준고 같다, 내가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과 함께 내 시선이 누군가의 포충망에 걸리듯 걸려버렸다. 그물을 뒤집어쓴 짐승처럼 나는 그의 시선에 빨려 들어갔다. 처음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 베이비파우더처럼 하얀 벚꽃잎이 지고 있던 그날처럼 그의 확대된 동공이 내게로 확 다가와 꽂혔다. 강력한 자석 앞에 선 작은 쇠처럼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흰 벚꽃들이 일제히 지는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부드러운 눈보라. 화이트 아웃, 이라고 누군가는 표현했던가, 극지방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고 거기에 선 사람은 방향감각을 상실한다고. 화이트 아웃과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거기 준고의 짙은 갈색 눈동자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난 거기서 나타날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쓰지 히토나리 호텔 엘리베이터 안, 고바야시 칸나가 내게 안긴다. 억지스럽지 않게 살짝 다가오듯, 머뭇거리는듯한 다정한 포옹이다. “내가 싫은 거야?” 칸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칸나가 내릴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스르르 내게 멀어지듯 내려 손을 흔든다. “잘 자고 내일 만나.” 나도 잘 자라고 인사를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칸나가 나를 노려본다. 그 강렬한 시선이 강철 문으로 겨우 가려지자, 몸에 힘이 빠지고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튿날, 창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당이란 지명이 언제까지고 목에 걸려있을 뿐이다. 눈을 부비며 햇살에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분당이란 지명을 반복해 본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렌터카를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 마치 처음부터 오늘 일정에 들어있는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일요일이어서 취재가 없는 대신 일본인 모임의 호의로 오후부터 시내관광이 예정되어 있었다. 분당이란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점심시간까지는 호텔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오. 도로사정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서울시내에서는 1시간 정도는 걸립니다.” 나를 맞은 운전기사가 노련한 일본어로 분당이 교외에 있는 신도시라고 설명한다. 일본어를 잘 하시네요, 내 말에 운전기사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미묘하지만 목소리의 톤에 그늘이 있는 것 같아, 더 이상은 묻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 책을 일본어로 읽었습니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어요. 감사합니다.” 운전기사의 낮은 목소리가 내 마음을 두드린다. 분당은 낮은 산들을 깎아 개발된 베드타운일까. ─ 2, 30층의 고층아파트가 쭉쭉 솟아있는 인공적인 도시였다. 일요일 오전이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상점셔터는 아직 내려진 채고, 거리에는 운동 삼아 산책을 하는 듯한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일과일까,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어째서 홍이는 이곳을 선택했을까. 분당은 가족 단위의 도시로 도쿄의 하치오지나 다마시와 닮아 있다. 여기서 그 애인이란 사람과 함께 사는 걸까. “주소 같은 건 없습니까?” 거울에 운전기사 얼굴이 살짝 비쳤다. 목소리로 받은 인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다. “아니오, 주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근처에 호수가 있는데, 내가 찾는 사람이 그 호수 주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호수요?”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운전기사는 지도를 꺼내 살펴보기 시작한다.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차 바로 곁을 달려 지나간다. 혹시 홍이가 아닐까, 얼른 뒤돌아보았지만 아니었다. 여자는 횡단보도를 건너 고층아파트 사이에 있는 어린이놀이터를 지나 숲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있군요. 이 근처에 큰 저수지가 있어요.”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조금은 생기가 돈다. “그럼 거기로 부탁합니다.” “꽤 넓은 저수지인데 어느 쪽으로 갈까요?”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거기서 홍이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운전기사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난 거기서 나타날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 사람은 7년간 매일 달리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 호수 주변을 달리는 것이 일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사님 짐작으로 그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곳에 차를 세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지만, 젊은 기사는 알겠습니다, 하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는 자세한 것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달리자 운전기사가, 왼쪽을 보세요, 하고 말했다 햇빛을 받은 호수면이 반짝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마른 겨울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집들이 보인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무성했지만, 다른 주변은 최근에야 공원으로 조성된 듯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 호수입구에 있는 카페 앞에서 차가 섰다. 일단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개점 준비로 바쁜 카페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는 돌아왔다. “달린다면 역시 저 길이라는군요.” 운전기사는 호숫가로 난 작은 길을 가리키며 말한다. “한 바퀴 도는 데 4킬로 정도랍니다. 이 근처 사람들이 조깅코스로 자주 이용한다는군요. 조금 더 가면 전망이 좋은 곳이 있다는데 거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부탁합니다, 나는 힘주어 대답한다.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해,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내리다 호수를 반쯤 돈 다음에 멈춰 섰다. 전망시설이 있는 작은 언덕 같은 곳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쉬거나 가져온 도시락 등을 먹으며 한가롭게 보내지 않을까. 낮은 비탈이 호수 주변까지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밖은 추울 텐데요.” 운전기사가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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