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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0>

등록 2005-10-13 16:50수정 2005-10-13 16:50

먼하늘가까운바다 <30>
먼하늘가까운바다 <30>

그가 캔커피를 사서 공원에서 마시자고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것도 떠올랐다

공지영

“성공이에요! 광화문에 있는 K문고 계단에서 종로쪽 거리까지 긴 줄이 섰대요.”

얼마 전 입사한 홍대리가 이연희 과장의 전화를 받고 나서 사무실에서 외쳤다. 사무실에는 홍대리와 경리실 직원 둘, 그리고 나만 남아 있었다. 어제 들어온 유명작가의 남미 기행문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잠시 눈을 들었다. 해냈구나, 준고…, 라는 생각이 들자, 실은 마음 한구석이 찡해왔다.

― 왜 말로 표현하지 않아, 왜 그렇게 아무런 대꾸가 없느냐고.

나는 물었었다.

― 그냥 나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힘들 뿐이야.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거라고.


헐거운 청바지를 입고 준고는 씨익 웃었다. 나는 입을 빼물며 언제 쓸 건데, 라고 물었었다. 철부지였던 스물두 살의 베니가 그랬다. 그가 나를 위해 힘겨운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씩이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비싼 것들을 먹으러 가자고 졸랐던 것은 그의 짐작대로 내가 돈 걱정 없이 자라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멋진 남자와 사랑할 때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러니까 좀더 쾌적하고 로맨틱한 장소에서 그와 나의 사랑이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부도 직전의 출판사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자장면만 먹으며 일할 때 나는 준고를 생각했었다. 차비 한 푼이라도 힘겹던 시간이었다. 지희가 남자친구를 데려와 소개를 했었을 때 이차로 마신 생맥주 값을 나보고 내라고 할까봐 잊어버린 일이 있는 듯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준고를 생각했었다. 내가 로맨틱한 카페에 가서 프랑스식 음식을 먹자고 조를 때 그의 눈에 비치던 그 곤혹스러움…, 그가 캔커피를 사서 공원에서 마시자고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것도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철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버린 뒤였다.

― 언니, 나는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해 놓고 하는 후회보다 하지 않고 하는 후회가 더 크대.

록이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제 며칠 후면 준고는 돌아간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다시 만난다 해도 이미 그때는 지금의 그와 나는 아닌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미 삼십대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의 곁에는 아마도 일본인 여자가, 내 곁에는 아마도 민준이 서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 가방을 들고 급히 출판사 앞으로 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광화문 K문고, 라고 말을 해 놓고 나는 멍하니 서울의 겨울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 와 본 적이 없었다고 오늘 아침 기획회의 시간에 이연희 과장이 설명을 했었다. 왜 설명하지 않았을까, 표현을 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날, 그에게 소리치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던 그날 내가 어떤 전화를 한국으로부터 받았는지, 내가 그에게가 아니라 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부끄럽고 비참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나는 설명하지 않았었다.

― 오늘 맛있는 저녁 사줄게. 예쁘게 하고 와. 지난 금요일 네가 회사일 때문에 약속을 어긴 벌이니까 오늘은 어김이 없어야 해.

민준은 어제 보낸 짧은 메일에서 그렇게 말했다. 지난 금요일의 일이었다. 공항에서 마주친 그 어이없는 상봉의 기억이 그와 헤어져 있던 7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나는 K문고로 내려갔다. 준고는 어색한 듯한 정장 재킷을 입고 일일이 사인을 하며 웃고 있었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일부러 몸을 숨기지 않아도 그는 나를 바라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출판사 사람들이 나를 보면 붙들어 둘 것이 뻔했으므로 나는 화장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손을 씻으며 바라본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제 그는 그의 곁에 있는 여자에게 한때 그와 함께 있던 여자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티 아이스 그랏세와 몽블랑케이크를 사줄 수 있을 것이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혼자 그녀를 내버려 두며 나도 피곤하다고, 하며 소리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누가 그의 그녀가 될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맹세코 나는 그런 비싼 음식들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성공의 단추를 일본에 이어서 이곳 한국의 서울 심장부에서 끼우고 있었다. 축하해, 준고. 거울 속의 여자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잠시 멍한 눈빛을 띠었다.

1월 24일.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남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홍이는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쓰지 히토나리

 광화문과 강남, 서울 시내 두 곳에서 사인회가 열리는 날이다. 호텔 스포츠센터에서 오전에 2시간 정도 충분히 땀을 흘린 후, 샤워를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이연희 씨 옆에 고바야시 칸나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아무래도 함께 갈 모양이다.

 “사람들이 없으면 내가 줄 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걱정과는 달리 사인회장인 서점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줄은 건물 밖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사람들 전부 사쿠라 아니야?”

칸나가 놀리듯 말했다. 이연희 씨가 미간을 좁히며 말한다.

 “사쿠라라니 무슨 뜻이에요?”

칸나가 영어로 사전에 미리 짠 거 아니냐고요, 하고 말했다. 설마, 하고 이연희 씨는 얼굴을 붉히며 항의한다.

 “이만큼 사사에 씨 작품이 한국에서 평가받고 있다는 거예요.”

이연희 씨가 단호하게 말하자, 고바야시 칸나는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작품은 내가 찾아 낸 거예요.”

하며 턱을 쳐들고 자랑을 했다. 이연희 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하지만 당신이 쓴 건 아니죠, 하고 입술을 내민다. 두 사람은 마음이 맞는 모양이다. 쭉 내민 입술이 점점 옆으로 벌어지더니, 두 사람이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진지하게 마주보며 서툰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독자의 웃는 얼굴이 내게는 마음의 휴식이 되었다.

사인을 하면서도 가끔 한숨 돌리는 척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어디에선가 홍이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을까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어디엔가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자신이 처량하기만 하다.

 “정말 대단해. 아직도 줄이 한참 남았어.”

늘어선 줄의 끝을 확인하고 온 칸나가 흥분하며 말했다.

 “사사에 씨, 감사합니다.”

한 독자가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얼굴을 보니 대학생 같았다.

 “일본어를 잘 하시는군요.”

내 말에 공부를 하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경쾌하게 대답한다.

 “이 소설의 어디가 좋았습니까?”

 “일본사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어요.”

뜻밖의 대답에 나는 그만 쓴웃음을 짓는다. 여학생은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일본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졌어요.”

하고 덧붙였다. 내가 사인을 마치자 그녀는 책을 빼앗듯 받아들고는 부끄러운 듯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옆에 있던 고바야시 칸나가, 그렇구나, 그게 인기를 끄는 이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연희 씨가 영어로 소설이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하고 의견을 말한다.

 “사사에 씨 작품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독자에게도 반응이 좋은 건, 두 나라의 역사를 정확히 그린데다, 많은 갈등과 고뇌를 안고서도 굳건히 사랑을 키워가려는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주인공 교이치와 인수는 오늘의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냈어요. 문화나 풍습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키워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독자들은 공감하는 거죠. 정치적으로 삐걱거리는 두 나라 관계에 이 소설은 작은 다리를 놓은 거예요.”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거창한 일을 하려고 쓴 게 아니에요.”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 두 사람에게는 닿지 않았다.

단지 내 마음을 홍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일본과 한국,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한 후회와 지울 수 없는 추억 때문에 쓴 것이다….

독자 마음에는 분명히 닿았는데 어째서 최홍에게는 닿지 못한 걸까. 혹시 홍이는 이 책을 안 읽은 게 아닐까.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 이런 작품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홍이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과 그로 인한 후회가 내게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작품 속에 내 마음을 모두 써 내려갔다. 홍이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당시의 괴로웠던 내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담아.

 광화문에서의 사인회가 끝나자, 우리는 강남에 있는 서점으로 이동했다. 한강 남쪽에 위치한, 서울의 새로운 에너지가 넘치는 활기찬 곳이었다. 서점이 고속버스터미널과 연결되어 있는데다 사인회장이 서점 바깥 지하광장에 마련되어 있어 구경꾼을 포함해 한층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시간 반 정도가 지나자 사인회는 막바지로 이어졌고 사람들 흐름도 어느정도 완만해졌다. 옆에 서 있던 칸나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이연희 씨는 서점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때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정장차림이 잘 어울리는 직장인 타입의 청년으로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인 부탁합니다.”

어렸을 때 영국에서 살다 온 칸나보다 더 유창한 영어다. 남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홍이는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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