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31>
준고, 나는…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지영 갑자기 기억들이 몰려왔다. 내가 먹어봐도 맛없는 그 음식들을 괜찮아, 하고 씨익 웃으며 먹어주던 그였다. 비를 맞으며 호수공원 한복판에 있는 나에게 다가와 괜찮아요? 하고 묻던 그 사람…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언제나 괜찮아, 하고 말하던 사람…. 그런데 실은 그 자신은 괜찮지 않아서, 빙하가 잘려나간 듯한 고독한 눈빛을 하고 있던 사람. 생일이 되어도 아버지의 간단한 전화 외에는 받지 못했던 사람. 그가 왜 엄마가 없다고 말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 준고, 담번 네 생일에는 내가 정말로 맛있는 오징어볶음을 만들어 줄게. 그 약속을 했던 것은 눈매가 선하고 행동이 느릿하던 그의 아버지 집에서였든가, 아니면 내가 그에게 서로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던 그 엉터리 같은 야키소바를 만들어 주던 날이었던가. 하지만 그 겨울이 시작되기 전, 그의 생일이 오기 훨씬 전에 나는 그의 집을 떠났다. 나는 책들이 있는 매장 뒤로 돌아가 문구코너에서 생일카드를 한 장 샀다. 어떻게 그에게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샀다. 그는 오늘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을까, 아니면 일본에 두고 온 애인의 전화를 받았을까…. 하지만 사랑이 끝나버렸다고 해도, 그가 태어난 이 날을 나는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생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를 만나 함께 웃고, 함께 달리고, 함께 잠들었던 기억들도 없었을 테니까. 달리기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업어주던 그의 등의 땀 냄새도 나는 알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그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곁에서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입을 벌리고 웃던 여자들을 질투했었다. 그것은 그의 농담을 다는, 그 뉘앙스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외국인의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거리로 나와 혜화동 사무실까지 천천히 걸었다. 겨울 볕이 따스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들도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을 했을까, 저들도 어느 날 문득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이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잠시 멍해질까. 아버지는 아직도 교토에 있는 사에키 시즈코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언론사에 있던 아버지가 도쿄에 특파원으로 갔다가 사랑에 빠졌던 그 여자, 할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을 이루지 못했던 그 여자, 아직도 아버지가 일본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아니 가지 않은 그 수많은 날에도 엄마의 가슴을 불안하게 하는 정물처럼 희고 조용하던 사에키 시즈코, 라는 여인을. 나는 천천히 종로를 걸으며 무심히 길을 걷는 모든 타인들에게 이상한 공감과 연민을 느꼈다. ― 저 숯도 한때는 흰 눈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내가 공부하던 하이쿠가 떠올랐다. 365일 모두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날에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서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든 도쿄에서든. 그리고 이런 날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생각해내는 것이다. 오늘이 그 사람의 생일구나…. 그리고 건네지도 못할 카드를 한 장 사서 주머니에 찌르고 이렇게 길을 걷는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공항에서 그를 태웠던 밴이 보였다. 벌써 사인회가 끝난 모양이었다. 출판사 안으로 들어서는데 이상한 활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를 따라 얼결에 내 자리로 가니, 그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책상 위에 아직 내가 치우지 못한 휘파람부는 소년, 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그 소년에 가서 붙박여 있었다. 그가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 그의 집을 서둘러 빠져나오면서 내가 두고 왔던 그 소녀인형을. 처음 만나 사랑이 싹트던 그때 내가 내밀었던 그 소녀인형을… 눈보라처럼 벚꽃이 날리던 이노가시라 공원의 나무다리 위에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존재 깊숙이 떨고 있던 여자의 마음을. “이거 당신 것인가요?” 결국 그가 물었다. 준고, 나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한때, 제가 좋아했던 사람과 추억이 깃든 것입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최대한 억양 없이 대답하고 입술을 물었다. 한때, 였다. 그래 그건 한때, 였던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일부러 사인회장까지 와 자신이 홍이 애인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안다 쓰지 히토나리 나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시간이 멈추고 주변의 소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는 남자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시원스럽게 생긴 눈이다. 적의나 미움 같은 건 느낄 수 없는 눈. 이성으로 그것들을 제어할 수 있는 곧은 정신의 소유자임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남자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 홍이는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눈만 깜박인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사라졌던 소리가 돌아오고, 세상은 다시 색채를 띠었다. 주변의 소음이 고막을 눌러 나는 서둘러 숨을 들이마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연희 씨가 서점직원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고, 칸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제 이름은 김민준입니다. 확신도 없이 여기까지 왔죠. 그렇지만 홍이가 잊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 사사에 히카리 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홍이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알아 두고 싶어서요.” 매끄럽고 부드러운 영어다. 뭘 하는 사람일까 상상해 보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세상에서 온, 혹은 인간세상의 모순을 지켜보기 위해 하늘에서 보낸 천사 같기도 하다. 넥타이는 있어야 할 자리에 마치 인쇄된 듯이 말끔히 매어져 있고, 옷차림이나 서 있는 태도에서는 자신이 계획한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온 사람이란 인상을 갖게 한다. 땀이나 지저분한 것들로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 그렇지만 성실한 노력과 강한 자존심으로 이루어진 엘리트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사람이 홍이 애인이라면, 지금의 행복을 지키려는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일부러 사인회장까지 와 자신이 홍이 애인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안다. 그 미소 뒤에 감추고 있는 흔들리는 마음의 벽을 상상하니 괴로워진다.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가 구입한 책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에 사인을 하고 남자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남자가 책을 받아든다. 내가 할 말을 찾고 있자, 남자는 한 번 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갑자기 찾아와 놀라게 했군요, 하고 말했다. “아니오, 당신과 만날 수 있어 내 마음도 확실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변변치 않은 영어로 내가 말했다.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그 시선의 끝에 얼마간의 힘이 깃든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남자는 잠시 주저한 후,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밤…” 나는 긴장한다. 남자가 다음 말을 찾는 동안, 눈을 깜박이며 기다린다.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는 나는 조바심이 난다. 지하광장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내 몸은 동여매여 있는 것이다. “오늘 밤, 저는 홍이에게 청혼을 할 생각입니다.”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몰아닥친다. 홍이가 내 곁을 달려간다. 몇 명이나 되는 홍이가 바로 내 옆을 달려간다. 나는 온힘을 다해 되돌아 보려 하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강남의 지하광장 의자에 묶인 채, 지나가는 무수한 홍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저는 홍이에게 청혼을 할 겁니다.” 나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김민준이라는 남자를 바라본다. 불과 몇 초밖에 되지 않은 시간을 마치 몇천 년처럼 느끼며. ─ 준고. 홍이 목소리다. ─ 준고. 홍이 미소를 떠올린다. 떠오르는 건 아름다운 계절과 아름다운 시간뿐이다. “준고.” 어느새 돌아온 칸나가 옆으로 와, 다음 사람의 책을 펼쳐 내 앞에 내밀었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남자는 말이 끝나자 발길을 돌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누구? 아는 사람?” 칸나가 그를 돌아본다. 나는 아니, 하고 고개를 젓는다. 이연희 씨도 자리로 돌아오며, 이제 열 명 정도예요, 하고 말했다. 남자가 떠난 후에는 마음을 담을 수가 없어 사인은 기계적인 작업이 되었다. 오늘밤, 저 남자는 청혼을 한다, 저 남자가 홍이에게…. 그들이 쌓아온 긴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그는 일부러 내게 그 사실을 알리러 왔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인회가 끝나고 우리는 서점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투명한 빛이 쏟아지는 지상으로 나왔다. 보이는 건 빛뿐이다. 여기가 어디든 나는 더 이상 상관이 없었다. 쏟아지는 빛을 더듬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빛으로 된 빌로드 커튼을 바라보는 것 같이 눈이 부시다. 빛의 줄기가 나를 향해 한없이 쏟아진다. 나는 의식을 잃을 것만 같다. “사사에 씨, 일단 호텔로 가시죠. 자 타세요.” 이연희 씨 목소리다. 이러한 타이밍이 누구에 의해 마련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늘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하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준비한 것일까. 이 찬 공기로 나는 영혼을 씻어야 한다.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바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빛이 깜박였다. 나는 그 빛이 전하는 뜻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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