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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2>

등록 2005-10-13 16:54수정 2005-10-13 16:54

먼하늘가까운바다 <32>
먼하늘가까운바다 <32>

그는 슬픈 눈빛이었다. 베니, 오해를 풀고 싶다, 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공지영

“오늘 사사에 씨와 함께 회식이 있다.”

아버지는 내게 가만히 말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점 <예가()>에 대해 이연희 과장이 준고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 출판사가 회식 장소나 중요한 손님 접대로 자주 이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를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 남산 하얏트 호텔, 테라스. 7시. 네가 좋아하는 한강의 야경이 잘 보이는 자리를 예약해 두었음.

민준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읽다 만 원고를 들었다. 컴퓨터에서는 아까 쓰다 만 기획서가 기획서, 라는 이름만 빼고 텅 빈 채 놓여 있었다.

― 사랑이 깨어지는 방식은 이래. 남자와 여자가 첫눈에 반한다. 대개는 남자가 그런다, 그러다가 여자가 그 마음을 받아들인다. 사랑이 익숙해질수록 여자는 사랑을 조금씩 더 많이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남자는 슬슬 여자가 익숙해지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 집착한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 떠나가고 싶어하고, 그럴수록 여자는 더 집착한다. …그리고 끝, 속편은 이거야. 여자는 친구를 붙들고 나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어. 남자들은 다 똑같아… 마지막은 긴 눈물과 중무장한 분노, 그리고 냉소지. 하지만 어느 날인가는 또다시 여자를 흥미있어 하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고 끝은, 이렇게 끝도 없이 다시 시작되는 거야.


지희의 강의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예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주방장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주머니에는 여전히 백지로 남은 생일카드를 넣은 채였다.

나는 거의 6시 반이 다 되어서 음식점에 도착했다. 마침 그때 종업원이 오징어볶음을 들고 들어섰다. 실은 좀 당황스러웠다. 하필이면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 음식이 나올 줄은 나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우린 좀 일찍 와서 식사가 얼추 끝나 가는데….”

아버지가 준고에게 음식을 너무 많이 권했던지, 조금 무안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그가 기억하든 안 하든 그건 상관없었다. 내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야, 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때 오징어볶음으로 젓가락을 뻗던 준고가 멈칫, 했다. 내 가슴이 그의 손동작에 따라 함께 멈칫, 했다. 우리의 추억이,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이, 우리의 이 이상한 마주침이 함께 멈칫, 했다. 어쩌면 그때 자전하던 지구도 멈칫, 하는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끝난 거야. 그건 한때, 였던 거라구,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고맙습니다. 실은…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 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멈칫, 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슬픈 눈빛이었다. 베니, 오해를 풀고 싶다, 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어머, 그래서 이 소설이 그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졌나 봐, 이연희 과장이 동료와 수군거리는 소리도, 아버지가 내 낯을 살피는 것도 그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슬픈 눈빛이, 서른 살이 되도록 차가운 북극의 바다를 떠돌다 온 빙하처럼 내게 와서 박혔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 과거형도 함께 그 빙하를 타고 있었다. 좋아했었던, 좋아했었던, 한때, 청춘의 어느 한때… 그 한때, 라는 단어가, 이 자리에서 그가 손을 내밀면, 그게 북극이든 남극이든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어디로든 가고 싶어 하는 터무니없는 내 망상을 잠재워주었다. 주머니 속에서 문자메시지를 알리는 진동이 드르르르, 울렸다. 그 진동을 따라 현실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내 곁에 있어주었던 것은 민준이었다. 내가 그를 두고 유학을 가서 일본 사람과 사랑에 빠졌었다는 것을 다 알고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내 곁을 떠나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 호사한 호텔의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한강의 야경이 반짝거리는 그곳에서.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거군요.”

꼭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 입은 마치 그와 헤어지던 그 날처럼 심한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너희 일본 사람들은… 다 그러니? 그의 눈빛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했다. 그래 본 적은 없지만 누군가의 선한 눈동자에 내가 비수를 꽂는다면 그런 비명이 소리 없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것을 나는 순간 느꼈다. 일본에서 보았던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사무라이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마, 화해를 할 때면 반드시 그런 약속을 하게 했다

쓰지 히토나리

세상은 하루하루, 아니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모래산 위에 꽂은 깃발처럼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이 아닐까.

나와 홍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 둘의 행복에는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 생긴 것인지, 그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인지 두 사람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한마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그 틈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을 모른다. 병을 앓는 것과 닮아 있다고 해야 할까. 통증을 느낄 때는 이미 병이 몸 속 깊숙이 퍼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날도 우리는 베토벤의 <비창>을 듣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별의 발자국 소리는 그 부드러운 멜로디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젊은 남녀의 이별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 하는 동거였고, 부모의 반대로 인한 도피행이었으며, 무엇보다 홍이에게 일본은 외국이었다. 젊다고는 하나 넘어야 할 벽들이 많았다. 그리고 때로는 젊음이 화가 될 수도 있다. 일단 아니라고 생각되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다시 생각해 보는 유연함을 잃기가 쉽다. 젊기 때문이다.

나도 젊었다. 어떻게든 되리라는 낙천적인 생각만으로 미래를 바라보았다. 홍이 안에 쌓여가는 불만을 좀 더 빨리 깨닫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잘못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고 있음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줄줄이 이어져 있는 아르바이트에 쫓겨 시간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그렇지만 실은 내 다정함이 부족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홍이 입장이 되어,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대학 친구들에게 홍이를 소개시킨 적이 있었다. 모두들 의기투합한 탓에 몇 곳이고 술집을 옮겨 다니며 마셨다. 마지막엔 모두 취하고 말았을 정도로. 홍이의 서툰 일본어를 누군가가 흉내냈다. 다른 누군가가 하지 말라며 흉내를 낸 녀석의 머리를 때렸다. 모두들 사랑스런 눈빛으로 홍이에게 미소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홍이가 친구들이 생각이 없다며 화를 냈다.

─ 아니, 그것보다 다른 친구들하고 같이 그냥 웃어넘기는 준고가 용서가 안 돼.

손을 뻗어 시선을 피하는 홍이 턱을 올려 마주 보게 했다. 강아지들이 서로를 물며 장난치는 것과 같은, 젊은 치기로 한 순진한 장난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참기 힘든 차별처럼 비쳤던 것이다.

─ 그렇다면, 네 친구들도 한국말로 하라고 해. 여기가 외국이니까 일부러 너희들 말로 이야기하는 거잖아.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는 거라고.

─ 홍, 저 친구들은 그럴 생각으로 한 게 아니야. 모두 너를 좋아한다구. 그건 막역한 사이가 됐다는 증거야. 너도 재미있어 했잖니? 차별이라니, 너무 듣기 거북한 말이다. 다들 널 베니, 베니 하고 여동생처럼 불렀잖아.

나는 열심히 달래보았지만, 결국 홍이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잤다. 그리고 그날 이후, 홍이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자는 일이 많아졌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홍이는 금전적인 면에서도 아무런 구애됨이 없었다. 마치 공주님처럼 너무도 세상물정을 몰랐다. 돈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만큼 아르바이트가 늘어났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홍이는 카페 <안나>에 가자고 날 졸라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 거기 티 아이스 그랏세가 마시고 싶어. 그리고 몽블랑케이크도 먹고 싶고.

종일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어디든 데려가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카페 <안나>는 역 앞에 있는 싸구려 커피숍과는 달랐다. 학생들이 드나들기에는 사치스러운 곳이었고, 홍차나 커피라면 몰라도 홍이가 주문하는 건 하나같이 프랑스식 스페셜 음료나 과자여서 가난한 학생의 주머니사정으로는 만만치가 않았다. 홍이에게 송금이 있었을 때면 몰라도 내가 버는 아르바이트비가 수입의 전부인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 캔커피 사가지고 공원 벤치에서 마시자.

그런 날은 늘 크게 싸움이 났다. 발단은 언제나 사소한 것이었지만, 잘못 채운 단추처럼 좀처럼 되돌릴 수가 없었다.

─ 준고가 분명히 그랬어.

─ 아니, 내가 그랬을 리 없어.

─ 아니, 그랬어.

했다 안 했다란 싸움이 끝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관대하게 양보하는 여유와 배려가 필요했다.

─ 준고, 어째서 한마디로 사과를 못하는 거야.

─ 내가 사과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그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을 뿐이라구. 어째서 내가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 날 혼자 내버려 뒀잖아.

홍이는 늘 그렇게 말했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마, 화해를 할 때면 반드시 그런 약속을 하게 했다.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혼자 두지 마, 하고 부탁한 적도 있다.

홍이를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홍이가 스스로 내 아파트에 온 다음엔 항상 같은 침대에서 품에 안고 잠이 들었으며 함께 아침을 맞이했으니까.

홍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홍이가 말하는 혼자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떠난 다음이었다.

우리는 행복의 절정에서부터 이렇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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