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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3>

등록 2005-10-13 16:56수정 2005-10-13 17:03

먼하늘가까운바다 <33>
먼하늘가까운바다 <33>

…교토 대나무숲을 산책하다가 그가 내게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공지영

“아직 끝난 게 아니지요. 사사에 선생, 그렇죠? 당신은 분명히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제 성당에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가 록이의 싸이 홈페이지를 몰래 보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기억났다. 록이가 거기에 언니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올려놓았던가, 아니면 아버지는 자신과 사에키 시즈코의 회한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언제나 흰 정물처럼 고요하던 그녀. 그녀는 교토에 살았다. 내가 그의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갔을 그 무렵 준고가 교토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적어준 그녀의 주소로 꼭 연락을 할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윤동주가 한때 유학했던 동지사() 대학을 볼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나중에 그녀가 경영하는 찻집으로 가게 된 것은 그저 경비를 아끼고 싶어서였고 우리는 뜻밖에 거기에 묵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와 아버지가 한때, 그 깊이야 알 수 없지만 얼마만큼 사랑했던 연인이었는지 알지 못했었고, 아마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일본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도 사실은 교토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첫사랑, 아직도 독신인 그 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때도 사랑이든 전쟁이든 혹은 혁명이든,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은 젊은 사람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면 나는 이미 늙어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분명 그때의 나는 젊었다. 나는 그와 나의 조국을 똑같이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버지가 얼핏 사에키 시즈코를 연상시키는 말을 꺼내면 나는 하는 수없이 교토를 떠올렸다. 교토, 준고와 함께 가보았던 유일한 여행… 처음 타보던 신간선, 분홍빛 연어살과 연어알에 노란 달걀지단을 얹어 꽃같이 화사했던 사케 이쿠라 스시를 나누어 먹던 열차 안…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일본의 작은 마을들은 비가 그치자 엷은 레이스 같은 커튼을 열어 내게 인생의 새로운 막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여기 어느 마을에서, 혹은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그는 글을 쓰고 나는 공부를 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야수네 서재처럼 커다란 서재만 있다면 거기에 그의 책상과 내 책상이 나란히 있다면, 침실도 욕실도 다 작아도 상관없었다. 흰 밥에 된장국만 먹고라도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볼 수만 있다면 가난해도 좋을 것 같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내 가슴에 가득했었다. 그가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가 그냥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좋았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냥, 그였다.

…교토 대나무숲을 산책하다가 그가 내게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눈을 떴을 때 진초록 대나무숲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때문에 나는 잠깐 아찔했었다. 그때도 준고는 물었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그렇게 오래 하는 법이 어딨어? 입술이 좀 아파. 내가 타박을 주자 준고는 미안, 하더니 어디 입술 다쳤나 보자, 하며 다시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오래오래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 우리가 7년 후 이렇게 어이없이 이렇게 슬픈 눈빛으로 서로를 찾아와서, 그때는 결코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싶어 하던 그 입술로 서로를 상처 입히고 입으며 마주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것도 내색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로 이렇게 추억이 날뛰는 날의 마음은 여기저기 피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만, 나는 내 자신에게 타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뭐냐, 온 지 아직 15분도 채 안 됐잖아.”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최대한 그를 보지 않으며 말했다.

“전부터 있었던 약속이에요. 사사에 선생님,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내일 출판사를 잘 부탁드려요.”

나는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이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래도, 혹시,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거 같았다. 서른이 된 그도 서른이 될 나도 더 이상 젊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를 처음 떠나던 그날처럼 또 말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가 좋아하던 그 한국말, 안녕히 계세요, 라는 그 말을.


그날 밤, 홍이는 어머니가 잘 부탁한다고 한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하며 기뻐했다

쓰지 히토나리

심각하다는 건 이처럼 쌓여가는 사소한 일들 위에 몇몇 오해와 아무 생각 없이 한 이야기들이 왜곡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오기쿠보에 있는 집에 들러 병약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매번 홍이가 따라 왔다.

그날, 홍이는 아버지를 위해 오징어볶음이란 한국음식을 만들었다. 무척 매웠다. 고혈압인 아버지는 평소 매운 음식을 멀리했지만, 홍이가 만든 음식이라 맛있다며 계속 젓가락을 가져갔다.

홍이는 아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서툰 요리솜씨지만 솔선해 만들려고 했다. 감기에 걸려 누워 있을 때, 홍이는 내게 영양섭취를 시킨다며 온갖 재료를 넣은 야키소바를 만들어 주었다. 고기와 야채뿐 아니라 치즈에 떡까지. 홍이가 접시에 담아온 야키소바는 젓가락으로는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엉켜, 결국 포크와 나이프로 먹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홍이가 주부역할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문제도 생겼다.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가슴에 쌓여 홍이 자존심에 상처가 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미래에 대한 커다란 부담을 주기도 했던 것 같다.

─ 언젠가 준고의 아내가 되는 게 꿈이에요.

어느 날, 홍이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바보 아들에게는 너무 아까운 걸, 하고 말했다. 아버지의 응원을 얻은 홍이는 뭔가 희망을 손에 넣은 것 같았지만, 홍이 어머니의 반대를 이길 만한 강력한 원군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준고 어머니도 만나고 싶어.

홍이는 길거리에 붙은 콘서트 포스터나 잡지광고를 보며 말했다. 내가 어머니 콘서트에 가자고 했을 때 홍이가 얼마나 기뻐했던지…. 하지만 결국엔 그것도 그녀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나와 어머니 사이는 시간의 연결고리가 없을 뿐 아니라, 흔히 말하는 모자관계란 것도 희박했다.

어머니에게 티켓을 부탁하지 못한 나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 티켓을 구입했다. 2층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자 홍이는 무대가 너무 멀다, 하고 불평을 했다. 이게 나하고 어머니와의 거리니 어쩔 수 없지,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 중에 나는 줄곧 음악회가 끝나면 분장실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분장실에 갈 거지, 하고 홍이가 귀엣말을 할 때마다 나는 한숨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베토벤의 <비창> 도입부를 쳤을 때는 나보다 먼저 홍이가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것 봐, 이렇게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잖아, 홍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리고 겁먹은 아이처럼 쭈뼛거리는 나를 억지로 분장실로 끌고 갔다.

─ 그 분은 준고 어머니시잖아.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가야지, 어서 가.

홍이의 격려를 받으며 분장실을 향했지만, 관계자도 아닌 우리가 어떻게 무대 뒤까지 갈 수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홍이의 의연한 태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분장실 앞에서 관계자가 불러 세웠을 때는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복도 앞에는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광경을 본 것만으로도 위축된 나는 그만 도망치고 싶었다.

─ 이 사람은 아오키 나오미 선생님 아들이에요.

홍이가 직원에게 말하자, 내가 저 차가운 여자의 아들일 리가 없어,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대신해 의연히 대처하는 홍이가 큰 위로가 되었다. 담당자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다음, 분장실로 사라졌다. 사람들을 제치고 어머니가 안에서 나왔을 때, 나는 홍이 손을 꼭 잡았다. 그저 홍이를 어머니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이렇게 멋진 애인이 생겼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제 와서 다른 어머니들이 보이는 그런 얼굴을 하는 건 원치 않았다.

어머니가 달려 나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홍이 손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손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었다.

─ 온다고 미리 연락해 주면 좋았을걸.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만나는 건 4년 만이었다. 18살 때 집에 찾아 온 어머니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혹시 대학입학금 때문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돈을 빌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홍이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무슨 말 좀 해, 하는 재촉도 했다.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홍이를 보더니, 누구… 하고 물었다. 홍이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최홍이라고 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 애인이에요. 저한테는 큰 의지가 되죠.

조금은 흥분한 기색으로 내가 말했다. 당신 대신, 이라고는 덧붙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홍이를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아들을 잘 부탁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충분했다. 홍이 손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뒤로했다.

─ 윤오. 아직 말도 못 했잖아.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지.

곱게 화장한 어머니의 화려한 얼굴이 뇌리에 새겨졌다. 포스터로 보던 얼굴과 똑같았다.

그날 밤, 홍이는 어머니가 잘 부탁한다고 한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기뻐했다. 그녀에게 그것은 결혼을 허락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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