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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4>

등록 2005-10-13 16:57수정 2005-10-13 16:57

먼하늘가까운바다 <34>
먼하늘가까운바다 <34>

나는 스물아홈이고 민준이 얼마나 좋은 신랑감인지 잘 안다

공지영

나는 또 늦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놓고 뛰어올라가며 시간을 보니까 벌써 25분이나 지나 있었다. 민준은 여느 때처럼 책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내가 헐떡이며 들어서자 민준은 뜻밖에도 읽고 있던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였다. 미안해, 잠깐 회식에 다녀오느라고, 내가 말했다.

“괜찮아… 넌 늘 늦잖아. 그래도 오는 걸, 결국 내게로 말이야.”

오늘은 시작 모드가 좀 이상했다. 마지막 말이 그랬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가 물었다.

“뭐 마실래? 티 아이스 그랏세? …몽블랑 케이크두 먹을까? 말해 봐, 오늘 다 사줄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랬다. 여긴 프랑스 식당…. 나는 그가 읽고 있던 사사에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굳어지며 무슨 뜻이야, 하는 듯 바라보자, 민준이 하하 웃었다.


“너 전에 나보고 프랑스 식당에 가서 그거 사달라고 했지 않았던가? 아닌가? 오늘 특별히 돈 좀 쓰려는데….”

민준은 웨이터가 가져온 메뉴판을 보며 그럼 와인 한잔 할까, 하고 물었다. 명치끝에서부터 목줄기까지 뻣뻣한 기운이 쭈욱 곤두섰다. 회식이 있어서, 뭘 좀 먹고 왔더니, 나는 명치끝을 누르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민준은 음식을 아 라 카르트로 몇 가지 시키고 나서 등을 뒤에 기댄 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얼굴 닳잖아, 내가 예전의 홍이의 모습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퉁명스레 말했다. 민준은 뜻밖에도 조금 더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미국지사로 발령 났어. 시애틀… 같이 가자. 가서,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집을 얻고 널 닮은 딸 하나, 날 닮은 아들 하나. 그리고 너랑 나를 반씩 닮은 남녀 쌍둥이, 이렇게 넷쯤 만들어 오자.”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무안해서 물만 마시고 있던 내가 컵을 든 채로 말했다.

“뭐라구?”

“최홍 양, 정식으로 그대에게 청혼하는 거야.”

그때 와인이 날라져 오지 않았다면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아마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말없이 와인을 마시고 조금씩 날라져 오는 앙증맞은 프랑스 요리를 먹었다. 예전의 홍이였다면, 만일 오늘이 민준이 메일에서 말한 대로 오늘이 아닌 지난 금요일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공항에 나가는 일도 없었고, 그가 오지도 않았다면, 아니 그가 왔다 해도 예정대로 통역인 후나 선생이 그리로 나갔다면, 그래서 그가 온 줄도 모르고 여기서 그와 마주 앉았더라면 나는 대답했을 것이다.

― 야아, 꽃도 없구, 뭐 가짜라두 조촐한 보석 하나도 없이, 공짜로? 싫어!

“민준아, 나는….”

“너 친구들 좋은 남자랑 결혼한다고 배 아파 했잖아. 나 괜찮은 남자 아니니? 나는 네게 몽블랑 케이크도 가끔은 사줄 수 있고, 너를 업어줄 만큼 체격도 튼튼하고, 그리고 나는 네게 약속할 수 있어. 절대로, 어떤 순간에도 너를 혼자 놓아두지 않을 거라고.”

내가 민준을 노려보았다. 노려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민준이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홍, 하고 나를 불렀다. 참으려고 했는데 한번 나온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민준이 손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코 풀어도 돼, 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스물아홉이고 민준이 얼마나 좋은 신랑감인지 잘 안다. 조건을 보고 하는 결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이제 나도 순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 결혼식에 갔을 때 주례선생님들은 묻곤 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습니까. 그럴 때 나는 하객석에 앉아서 스스로에게 가만히 묻곤 했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누구일까, 하고. 나는 적어도 민준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보이는 호의를 거부하지 않을 만큼 교활하기도 했다. 그가 홍, 나 다른 여자 사랑하게 되었어, 라고 말하면 가슴이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를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두고 있었고 쭉 그러기를 바라고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민준이 일본인이었고, 엄마가 그를 싫어하고, 그의 부모는 이혼하고, 아버지는 학비도 대주지 않고, 별 일 없이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나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친구로서말고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곁에 있고 싶은 사람으로… 그렇게?


마치 홍이 뒤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내 뒤에는 일장기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쓰지 히토나리

어느 날, 홍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기치조지역 앞에 있는 빵집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 집 외동딸과 싸움을 했다며 눈이 새빨갛게 되어 돌아왔다.

─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묻자, 홍이는 화를 삭이지 못하며 말했다.

─ 정말 다 싫어. 한국에 가고 싶어.

홍이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그것도 내게는 작은 오해들이 쌓여 일어난 것에 불과한 것 같았다. 빵집 딸 마리코는 특별히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홍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부터 마리코와 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홍이도 차별을 받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느꼈던 조바심은 어쩌면 좀 더 홍이 내면을 향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홍이는 그것을 한국과 일본의 문제로 확대시키고 있었다. 당시 내게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 홍, 좀 응석이 심한 거 아닐까. 일본과 한국의 문화 차이 때문에 싸웠다고 하지만, 난 마리코가 너를 모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찻집에서 케이크만 시키는 일본인도 많다구.

─ 그렇지 않아. 준고가 항상 절약해야 한다고 해서 난 케이크만 시켰어. 그랬더니 마리코가 음료도 같이 시키는 게 일본에서는 보통이야 하는 거야. 한국에서는 케이크만 시켜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들 친절한데.

나는 홍이의 고독을 한 가지도 이해해 주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자기 생각만 주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건 쌓이고 쌓인 그녀의 고독 탓으로, 결국 원인은 나였다.

─ 일본도!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아르바이트로 쫓기는 일상에 나도 지쳐 있었는지 모른다. 동거라는 이름의 인생의 시작에도.

─ 일본도 마찬가지야! 나도 케이크만 시킬 때가 있다고!

─ 누가 준고 생각을 물었어? 난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과 일본은 문화가 다르다고 한 것뿐이야.

─ 그렇지만 네가 문제를 비약시키잖아. 케이크와 음료가….

우리는 녹초가 될 때까지 그런 바보스런 논쟁을 되풀이하다, 결국엔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홍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고, 부탁이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줘. 부탁이니 무조건 날 지켜 줘. 준고, 부탁이야, 무슨 일이든 내 편만 들어 줘….

그런데도 나는 홍이의 고독을 알아주기는커녕 홍이 마음을 내치려 했다. 왜 홍이가 조바심을 내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홍이가 마리코와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빵집 마리코 탓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내 탓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혐한이니 반일이니 하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을 싫어하고, 한국은 일본에 반감을 갖는다는 허무한 조어다. 언젠가 홍이가 그 말의 뜻을 물어 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설명하기를 주저했다. 나와 홍이 사이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역사가 그림자를 드리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젊었기에 역사의 불행을 극복할 자신이 있었고, 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 혐한반일 같은 거 우리 사이에는 없어.

언젠가 홍이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며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런 문제가 우리에게 덮쳐 오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데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굴러가던 톱니바퀴에 뭔가 이상이 생기자, 갑자기 방향이 흐트러지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은, 한국은, 이란 말이 대화 첫머리에 놓이게 되었다. 마치 홍이 뒤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내 뒤에는 일장기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나라를 짊어진 사랑이 가능할 리 없다. 가끔 대화중에 자기 나라를 옹호하는 듯한 말이 튀어나올 때면, 그때마다 두 사람은 마치 배신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갑자기 마음에 방어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98년 장마가 시작되던 6월 어느 날로 이어진 것이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속을 조용히 기억이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우리 둘은 뜻하지 않은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고독과 오해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마지막 날은 기정사실로 두 사람 앞에 다가온 것이다.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벌어진 틈을 다시 좁힐 수 있다고 믿었다. 무모할 정도의 젊음이 있었기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도 바로 원래 상태로 회복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출판사에서 갑자기 문제가 생겨 예정했던 시간에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한 예상 밖의 일이었다.

내 상사가 담당하던 작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편집부가 발칵 뒤집혔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마감 날짜와 겹쳐 누군가가 편집부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르바이트 신분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 왔기 때문에 회사에서 나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때문에 나는 자청해서 그 큰 일을 맡았다.

하지만 그날 밤은 오래 전에 홍이와 외식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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