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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6>

등록 2005-10-13 17:03수정 2005-10-13 17:03

먼하늘가까운바다 <36>
먼하늘가까운바다 <36>

지희 위로해주고 다시 전화해줄래? 언제나 늦지만 넌 결국 내게로 오잖아!

공지영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인데도 차가 많이 막혀 있었다. 남산순환도로를 타고 신촌 지희네 집에 가려다가 그냥 한남대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충동 쪽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멀리 남산 아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 그와 나는 저 불빛을 보며 이 차에 앉아 있었다.

―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내가 말했다.

먼데서 불빛들이 겨울바람에 날리는 유리꽃들처럼 후드득 후드득거리던 밤이었다. 그때 그가 베니, 라고 부르자 모든 풍경이 안개에 덮히듯 뿌옇게 변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신호를 받아 무심히 좌회전을 했다. 그런데 돌아가 놓고 보니까 그쪽이 신라호텔 방향이었다. 차는 여전히 막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가 앉아 있던 좌석을 돌아보았다. 이제 거기 그는 없다. 이제 그는 다시는 거기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 빈자리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 베니,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다.

― 실은…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 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신라호텔 창에서 빛나는 노란 불빛들이 반짝거리며 그의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 준고,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내가 말했었다.

― 약속해.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때 호주머니에서 문자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이었다.

― 홍, 차라리 잘된 거 같아. 하고 싶은 말 있었거든…. 홍, 널 사랑해! 우리 할아버지가 이사간 집에서 처음, 그 옆집에 살던 열다섯 살, 크림색 장미꽃 울타리에 서 있던 널 보던 그날부터….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멍하니 휴대폰의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시 메시지가 왔다. 준고의 말인지 민준의 말인지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았다.

― 기억나니? 그때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네가 말했어. 난 최홍이야. 난 크림색 장미를 제일 좋아해! 오늘 함께 밥 먹고 네게 크림색 장미를 만 송이쯤 사주고 싶었는데….

차는 여전히 밀려 있었다. 다시 메시지가 왔다.

― 왜 네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 말을 하지 못했을까, 나 그 후로도 오래도록 내 자신이 미웠어.

내가 떠난 호텔에서 식은 음식을 앞에 두고 이 문자를 보내고 있을 민준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메어왔다. 다시 메시지가 왔다.

― 지희 위로해주고 다시 전화해줄래? 언제나 늦지만 넌 결국 내게로 오잖아!

차가 밀리면 나오는 노점상인들이 차 곁으로 다가왔다. 보통은 과자나 음료수를 파는 사람들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는 장미 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마 오늘 신라호텔 옆의 국립극장에서 영화제 시상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차도 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 두려워하지 마. 설사 여기서 다시 영영 이별을 하고 말더라도….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나 아직 사는 게 뭔지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해 놓고 하는 후회보다 하지 못해서 하는 후회가 더 크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것이 정말 록이의 목소리였을까. 꽃다발을 들고 선 사람이 내 창을 두드렸다. 나는 크림색 장미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들을 따라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한 번만 용서해 줄 수 있지? … 한 번만… 한 번만 말이야.”

나는 누구에겐가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민준이었을까, 아니면 준고였을까, 아니면 내 자신이었을까, 실은 도무지 모른 채로….


나는 소년인형을 그녀에게 내밀며, 이거 당신 건가요, 하고 물었다

쓰지 히토나리

사인회가 끝나고 저녁회식까지는 다소 시간이 여유로웠다. 도쿄에 연락할 일이 있어 저녁회식 자리를 사양한 고바야시 칸나를 일단 호텔에 데려다 주고, 내일출판사로 향했다. 한적한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 나무로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단독주택을 회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나를 맞아 준 홍이 어버지 최한은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모습 그대로였다. 사에키 시즈코가 그렇게 팬이라고까지 한 이유를 알 것 같은 풍채 좋은 신사였다.

대문과 현관은 모두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어 들어가는 것 같은 청초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놀랍게도 안뜰에서는 개도 키우고 있었다. 나를 보고 짖는 개에게 최한이 굵직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그 목소리도 틀림없이 사에키 시즈코가 반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일본어는 전문통역자보다도 자연스럽게 들려 무심코 일본어를 잘 하시는군요, 하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홍이 아버지는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오. 우리 세대는 그런 교육을 강요당했었으니, 하고 안일한 내 역사지식을 일축해버렸다.

“난 친일파라 불리는 게 싫어 내 스스로는 지일파라고 하지요.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여기서 살다보면 상당히 의미가 달라진다오. 특히 우리처럼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일본 책을 많이 취급하자면 말이오.”

그러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일본어를 한다고 해서 자신을 친일파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실은 그가 일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콧등을 긁으며 도쿄에서 신문사 특파원으로서 일하던 때가 몹시 그리운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요, 일본을 좋아하지요. 그렇지만 우리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사람을 좋아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점을 사사에 선생도 알아주기 바랍니다. 선생이 쓴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의 유일한 결점은 아무래도 한일 양국의 역사를 공부해서 쓴 것 같은 부분이 눈에 띈다는 겁니다. 그야 역사를 체험한 적이 없는 선생한테는 당연한 일이고 잘 쓰셨다고 칭찬해야 하겠지만, 이런 의견도 있는 걸 알아주길 바랍니다.

나는 안도 히로시를 떠올렸다. 내 작품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말한 건 안도 히로시와 최한 두 사람뿐이다.

“당신이 쓴 소설로 돈을 벌면서 실례된 말을 했군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하오. 이것도 일본인에 대한 일종의 우정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사람의 일하는 방법을 알 것 같다. 거짓말을 않는 정직한 사람일 것이다.

최한의 안내로 내일출판사를 둘러보았다. 영업부, 디자인부, 그리고 편집부. 편집부는 넓은 응접실을 사용하고 있었고 각 편집자 책상에는 대나무로 짠 멋진 파티션이 쳐 있었다. 그 책상들 중에서 나는 인형을 발견했다. 내 방에서 홍이가 가져간 닥종이인형이다.

“이 휘파람 부는 소년인형은 누구 겁니까?”

최한이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이건, 하고 말했다. 최한을 대신해 이연희 씨가,

“그건 최홍 실장님 거예요.”

하고 대답했다.

“인사를 드렸으면 하는데….”

내 말에 최한은,

“조금 전까지는 있었는데….”

하며 홍이를 찾으러 나갔다. 나는 인형을 집어 들고 살펴본다. 그날 홍이가 가져간 소년인형이 틀림없다. 어째서 다른 한쪽은 남겨 두고 갔을까. 왜 홍이는 이 소년인형만 가지고 갔을까. 내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그날, 머리를 식힐 생각으로 방을 뛰쳐나온 나는 기치조지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심야영업 중인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서는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잤다. 홍이가 쏟아낸 말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발버둥쳤다. 거칠게 갈라진 마음에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몸을 움츠려 나를 꼭 껴안고 조용히 아침을 기다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바로 집으로 들어가 냉정을 되찾은 홍이와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날이 밝자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서 마시고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과는 거꾸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내 집으로 들어오면서 홍이가 가지고 왔던 커다란 트렁크 두 개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닥종이인형의 소년도….

반쪽인 소녀인형만이 외롭게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소년인형은 없었다.

최한이 홍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분당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분위기도 공기도 달랐다. 혼이 빠진 인형 같은 얼굴로 아버지 곁에 서 있다.

“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가니 시간이 있으면 오너라.”

홍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소년인형을 그녀에게 내밀며, 이거 당신 건가요, 하고 물었다. 홍이는 잠시 인형에 떨어뜨렸던 시선을 거두고, 아니오, 하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제가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과의 추억이 깃든 인형이에요.”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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