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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7>

등록 2005-10-13 17:05수정 2005-10-13 17:06

먼하늘가까운바다 <37>
먼하늘가까운바다 <37>
멀리서였지만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공지영

가슴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신라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고 건조한 대기가 창 안으로 손쓸 틈도 없이 휘익 몰려들었다. 그제야 내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차 안의 미등을 켜고 아직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둔 카드를 꺼냈다. 희미한 어둠속에서 카드 안에 펼쳐진 백지가 망망한 바다처럼 느껴졌다.

부신 불빛이 내 눈을 찔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차가 한 대 들어와 내 맞은편에 서서 헤드라이트를 끄고 있었다. 부부인 듯한 남녀와 아이들 둘이 내렸다. 그들은 민준이 내게 제시하는 미래의 모범답안처럼 보였다. 좋은 차와 아담한 아파트, 아들과 딸, 가끔씩 초대받는 우아한 호텔에서의 저녁식사, 은은한 향수와 잘 다림질된 양복의 깃… 학교 식당에서처럼 긴 줄을 서서 가는 그곳, 결혼….

준고와 내가 함께 누워 이야기했던 결혼은 그런 결혼이 분명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혼이라기보다는 그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는 내 열망의 보통 명사였으며 영원히 사랑하자던 말의 다른 이름이었다.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나로서는 그 이상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이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뿔 달린 어린 양처럼 뛰는 두 아이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노가시라 공원에서 나와 부딪쳐 내 손에 든 인형을 떨어뜨린 아이들 생각이 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혼자 웃었던가, 기특한 것들, 하고…. 그러자 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 너를 사랑해!

민준의 문자메시지가 떠올랐다. 너는? 민준이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사랑을 하면 길거리를 걷다가 우두커니 서서, 내 앞을 걸어가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건데, 그 사람 지금 여기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하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걸어가다가 우두커니 서 있게 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는 볼펜을 꺼내 카드 위에 간단하게 생일을 축하합니다, 라고 썼다. 그리고 호텔 로비로 들어가 사사에 선생의 방을 물었다. 프론트의 직원은 잠깐 열쇠함을 살피더니, 아 참, 아까 저리 바로 가셨는데요, 했다. 나는 천천히 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쾌한 밴드의 연주 음악이 로비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딛는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콩콩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 사이로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집으로 걸어가는 민준의 반듯한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사랑의 슬픔으로 울고 있는 지희의 가엾은 얼굴도 아른거렸다.


바 입구에 들어가 나는 혼자 앉아 있는 남자를 찾아 눈길을 돌렸다. 아직 늦은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바 안은 한산했다. 저쪽에 서양 사람 두서넛이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고, 구석자리쯤에 반백의 머리를 한 서양 남자가 두리번거리는 내 눈길을 의식하더니 빙긋 웃었다. 혼자 앉아 있는 동양 남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한 눈길로 끌려들어가듯 고개를 돌렸다. 거기 고양이처럼 노란빛에 가까운 갈색 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낯익은 듯한 눈초리, 낭창낭창한 몸매, 가느다란 윤곽, 자신 있는 입매에 화사한 검은 제비나비 같은 머릿결을 가진. 그 여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였지만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 와 붙박인 그 여자의 시선에서 그녀 또한 나를 알아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거절했던 그 남자, 그래서 7년 전 엄마 잃은 얼굴을 하고 내게로 왔던 그 남자가 이제는 등을 보이며 칸나 앞에 앉아 있었다.

가끔 수많은 생각을 동시에 할 때가 있다. 머릿속이 하얗게 폭발하고 마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고바야시 칸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도 그랬다. 그 폭발의 잔해들을 다 거두지도 못하고 내 몸이 먼저 돌아섰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화사한 꽃다발을 든 내 모습이 로비 유리창에 비쳤다. 어떻게 카운터까지 걸어가 꽃다발을 맡겼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그 곁에 쓰레기통이 있다면 거기다가 꽃다발을 버렸을 테지만, 내가 다가가자 카운터의 여자가 물어버렸던 것이다.

“사사에 선생님께 전해드릴까요?”

나는 다만 이런 비참한 순간에 흰 장미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내 모습이 싫었을 뿐이었다.

지희야, 민준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주차장을 향해 달렸다.


홍이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쓰지 히토나리

따뜻한 온돌이 차가워진 내 몸과 마음을 달래준다. 북한음식점이에요, 하고 이연희 씨가 설명한다. 함께 온 직원들이 모두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다.

식탁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음식이 나오고 있는데, 일이 끝나면 합류하겠다고 혼자 회사에 남아 있던 홍이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날 찾아왔던 남자의 프러포즈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일본과 한국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주앉은 최한 씨에게 물었다. 그래요, 하고 최한 씨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나는 그런 희망을 갖고 일본작품을 많이 소개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걸릴 거요. 진정한 의미의 신뢰관계를 회복하기까지는 앞으로 오십 년은 더 걸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침략전쟁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내가 아무리 일본을 좋아한다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또한 지워지지는 않아요. 그래도 나는 일본을 그리고 일본인을 좋아하고 싶소. 그래서 일부러 일본문학을 소개해 오고 있는 거요.”

앞에 앉은 최한 씨에게 술을 따르려 했지만 손이 닿질 않았다. 양손으로 따르는 것이 한국에서는 바른 예절로, 받는 쪽도 양손이어야 한다. 손이 닿지 않을 경우는 한손을 다른 손에 받치거나 가슴에 대고 따른다. 예를 다하는 국민성을 말해 준다.

“나는 일본사람을 잘 알지요.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오.”

최한 씨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가 내민 잔을 받아들고 성의에 답하기 위해 나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때, 홍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연희 씨가 자리를 비켜 그녀를 아버지 옆에 앉게 한다. 곧이어 종업원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들어와 내 앞에 놓으려 했다. 이연희 씨가 무슨 말을 하자 종업원이 놓던 접시를 다시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이가 이를 말리며 뭐라 말을 한다.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본 적이 있다. 그건 홍이가 기치조지 내 아파트에서 몇 번이나 만들어 준 적이 있는 오징어볶음이다.

최한 씨가 홍이를 나무랐다. 늦게 온데다 새삼스럽게 음식을 시키면 어떻게 하냐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홍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오징어볶음을 만들었을 때였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는지 시무룩해 있던 홍이는 언젠가 준고 생일에 정말 맛있는 오징어볶음을 먹게 해 줄게, 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이 내 서른 번째 생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홍이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간다. 홍이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 같아 나도 몰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고마워요.”

복받쳐 오는 기쁨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 않도록 꾹 참으며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실은…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아버지가 곁에서 홍이 얼굴을 살폈다. 홍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 깊은 곳에 차마 다 숨기지 못하고 쌓아둔 거짓을 찾아내고 만다.

홍이가 입을 열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건 선생님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거군요.”

최한 씨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비우더니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지요. 사사에 선생, 그렇죠? 당신은 분명히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홍이가 시선을 피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갑자기 홍이가 일어나더니,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최한 씨가 딸을 바라보며 뭐냐, 아직 15분도 채 안 됐잖아, 하고 나무란다.

“전부터 있었던 약속이에요. 사사에 선생님,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잘 부탁드려요.”

가위로 가슴 한쪽이 잘려나간 듯이 아프다. 홍이는 내게 희미하나마 희망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채 부풀기도 전에 다시 떠나려고 한다. 그렇다. 그녀의 약혼자 곁으로. 그의 프러포즈를 받기 위해.

나는 눈을 감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다. 최한이 일본과 한국의 출판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애써 듣는 척하지만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 그 한국청년이 홍이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만이 뇌리를 스친다. 알을 부화시키는 어미새처럼 따뜻한 온돌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하다.

어째서 뛰쳐나가 그녀를 막지 못하는지. 어째서 또다시 겁쟁이가 될 생각인지!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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