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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4>

등록 2005-11-02 17:23수정 2005-11-02 17:23

먼하늘가까운바다 <44>
먼하늘가까운바다 <44>

내 신경은 고슴도치처럼 곤두서 있었다
그 수많은 가시 중 하나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존재 자체가 충렁일 것만 같은

공지영 44

그리고 함께 외식을 하기로 한 그날 준고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어가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전화기 옆을 서성였다. 혹시나 전화기가 고장 났나 싶어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부질없이 텔레비전의 뉴스를 찾아 틀었다. 별다른 뉴스는 없었다. 세상은 평온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끄려고 하는데 먼 바다에 돌풍이 분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하늘은 몹시 흐려 있어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공원 입구 꼬치집도 문을 닫았고 사방은 고요했다. 먼 바다에서 분다는 돌풍이 뚱딴지 같이 생각났다. 나는 그 돌풍 속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모든 바람을 바다에 풀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그 한복판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때 마침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원 입구에서 집까지 전속력을 다해 뛰었다. 준고에게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계단 입구에서 잠깐 넘어졌지만 아픈 것도 참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전화는 얌전히 놓여 있었다. 완강한 침묵이었다. 벨소리는 환청이었다.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분명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눈물이 나왔다. 어디선가 준고가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환영이 어른거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록이도 지워지고 그가 죽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은 미웠고, 가끔은 야속했던 사람이지만, 내 생애의 첫 사람인 그가 죽는다면…. 나는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무릎을 꿇고 평소에는 잘 부르지도 않던 하느님을 찾았다.

‘하느님 준고를 살려주세요.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격정적인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두 손을 모은 채 얼마가 지났을까. 마음이 싸늘히 식어 내리면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도 나도 오늘을 기다려 왔다. 아침에 다시 한 번 다짐도 했었다. 준고는 약속을 그렇게 허투루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뒤에, 아주 잠깐이었지만 만일 그런 사람이 약속을 어긴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준고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내 신경은 고슴도치처럼 곤두서 있었다. 설사 비단결 같은 바람이라 해도 그 수많은 가시 중 하나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가을 논에 바람이 불듯 존재 자체가 출렁일 것만 같은, 내 온몸이 바늘 끝처럼, 어둠 속을 침입하는 사무라이의 칼끝처럼 준고의 발자국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아직 안 잤어?”

어둠 속으로 들어서며 준고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은 내가 상상 속에서 그린 대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 피치 못한 일을 끝내고 온 사람처럼 미안해하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들의 이 무모한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우리 잡지 간판 작가가 죽었어.”

순간 마음속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기다리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 일본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얼굴도 볼 수 없는 손녀를 그리워하고 있을 우리 할아버지. 그런데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출판사의 간판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태연한 저 일본 남자를 밤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언뜻 웃음이 나왔는데 마음속으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바람을 바다에 풀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났다.

“그래도 전화 한 통 해 줄 수 있지 않았어?”

내가 인내심을 다해 천천히 물었다.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해도, 아직은 이 사태를 믿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희망의 문이 다 닫힌 것은 아니라고 내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희망의 문을 낑낑거리며 내가 붙들고 있었던가. 나는 그렇게 온 존재의 힘을 다해 닫히려는 문을 붙들고 있는데 준고는 나를 외면한 채 태연히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쪽은 보지 않은 채,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어, 하더니 식탁에 앉았다. 그가 나를 바라만 보았더라도, 어쩌면 그가 내 손을 잡아만 주었더라면 모든 일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모른다. 머리 속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토악질처럼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나를 사로잡았다.


도대체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무엇이 없는 걸까
내 정체성의 근간을 점점 알 수가 없었다

쓰지 히토나리 44

칸나를 보내고 나는 프런트 앞 소파에 앉아 한동안 힘이 빠진 상태로 체크아웃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빨간 모자를 쓴 대여섯 살 정도의 백인 아이가 넓은 로비를 뛰어다니고 있다. 아이 어머니가 잡으려고 하지만 뛰어다니는 소년을 좀처럼 따라잡지 못한다. 소년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진다. 아이 어머니도 뒤쫓는 것을 단념하고 웃는다. 체크아웃을 마친 아버지처럼 보이는 남자가 이번엔 어머니를 대신해 소년의 뒤를 쫓는다. 소년이 꺄꺄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소년을 그대로 안아 올린 다음 아버지 팔에 안겨준다. 소년의 아버지가 한국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나는 소년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녕, 하고 한국어로 작별인사를 한다.

취재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일단 방으로 올라가 코트를 꺼내 입고 호텔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구름이 끼었지만 온화한 아침이다. 코트깃을 세우고 나는 호텔을 나왔다. 목적지는 없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걸어가 보고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고 올 생각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큰길까지 걸어가 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일본인이라고 생각할까.

교차로에 서 있는데 누군가 내게 길을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영어로 대답한다. 상대가 놀란 얼굴로 날 들여다보더니 뭐라 말을 하고는 지나간다.

한 시간 정도 걷자 배가 고파왔다.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비빔밥 도시락과 플라스틱 용기에 든 바나나우유를 하나 샀다. 주택가 한쪽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먹기로 했다.

고추장 소스를 도시락에 얹어 잘 비빈 다음 한입 넣었다. 생각보다 훨씬 맛이 있어 나도 모르게 맛있는 걸! 하는 말이 튀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산 바나나우유는 더욱 감동적이었다. 어린 시절에 곧잘 마시던 것과 꼭 같았다. 너무도 반가워 무심코 용기 안을 들여다봤을 정도다.

다 먹고 난 용기를 비닐 봉투에 담아 편의점 앞에 놓인 쓰레기통까지 가져와 버렸다. 뭔가를 이루어 낸 것 같은 상쾌함을 느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우스워졌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것도 우스웠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슬슬 호텔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하지만 좀 더 걸어 보고 싶다. 이 길 어딘가에서 우연히 홍이와 마주칠 것만 같다.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무리가 웃으며 내 앞을 지나간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일본 젊은이들이 입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머리 모양도 색깔도 신발이나 목도리, 등에 진 배낭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이라고는 그들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다.

대형 전자 제품 가게의 쇼윈도를 들여다본다. 삼성의 액정 텔레비전 화면에 일본 연예인과 닮은 귀여운 여자가 멋진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어는 읽을 수 없지만 영문으로 ‘BoA’라고 써 있다. 내가 보아, 하고 소리를 내 읽자, 곁에서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던 나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회사원풍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한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도 기쁜 듯이 미소로 답한다. 나는 레코드 가게로 들어가 보아의 시디를 샀다. 그녀가 무대에서 소년들과 춤추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고 레코드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을까. 아니면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을까. 홍이처럼 윤동주가 걸어온 길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을 갔을까. 그리고 거기서 한국인인 나는 어떤 일본을 발견하게 될까.

예전, 홍이는 그곳에서 어떤 일본을 발견했을까. 이렇게 지금 내가 낯선 거리에서 일상의 한국과 접하는 것 같은 공통된 감촉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섞인 다음에 밀려오는 이해 부족이란 바람에 절망했을까. 그것이 이민족 간에 일어나기 쉬운 일이라 하더라도….

며칠밖에 되지 않은 기간에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서울 어디에 있든 나는 홍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날의 홍이가 되어 사랑하는 이의 조국을 느낄 수가 있다.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어떻게든 동대문까지만 가면 호텔에 도착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레코드 가게로 돌아가 젊은 점원에게 영어로 동대문까지 가는 길을 물었다. 자세하게 길을 가르쳐 준 점원이

“보아를 좋아하세요?”

하고 묻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She is so pretty.”

그러자 청년이 만면의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윙크를 했다.

도대체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무엇이 없는 걸까. 나는 내가 누군지 내 정체성의 근간을 점점 알 수가 없었다.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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